[월드컵 20] 제4회 월드컵 : 불참과 포기가 속출한 지역예선 제4회 월드컵 개최 배경과 지역예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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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이후 첫 번째 월드컵
제2차 세계대전은 올림픽뿐만 아니라 월드컵에도 영향을 끼쳤다. 1938년 프랑스 월드컵 이후 1942년 월드컵은 독일과 아르헨티나, 브라질이 개최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독일은 그들은 1938년 월드컵을 프랑스에게 양보한 것을 이유로 다음번 개최를 강력하게 희망하고 있었다. 반면 남미는 2회와 3회 대회가 유럽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차기 대회는 남미에서 개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1938년 파리 총회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 FIFA는 2년 뒤인 1940년 룩셈부르크 총회에서 최종적으로 개최지를 선정하기로 결정했다. 그 동안 줄리메 회장은 남미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와 타협을 시도하였고, 차기 대회는 거의 아르헨티나로 결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전 유럽이 전쟁에 휩싸이면서 1940년 룩셈부르크 총회도 무산되고 1942년 월드컵 역시 무산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1946년에 룩셈부르크에서 모인 FIFA 총회는 제4회 대회를 브라질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특별히 이 총회에서는 참가국과 개최국에게 준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해서 제5회 대회(스위스)와 제6회 대회(스웨덴) 개최지도 확정해 버렸다.
#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
전쟁의 기간 동안 축구는 세계적으로 빠르게 보급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의 공백기간 동안 어느 나라가 축구의 강국으로 성장해 있는지를 평가하는 대회에서 이전 대회의 기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세계적인 축구 대회가 열렸지만 남미 소속의 국가들이 참가하지 못하는 바람에 ‘세계적’이라는 이름에 흠집이 생겼다.
그러나 축구 대회는 축구 자체의 실력 이외에 주변의 부수적인 다양한 여건이 작용하기 때문에 조금 넓은 마음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축구 자체의 실력과 아울러 국제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상황도 축구 실력에 포함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8년 올림픽 축구 경기는 남미 소속 국가들이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이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그렇기 때문에 1950년 브라질에서 열리는 제4회 월드컵은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지역예선을 거치면서 전쟁 이후의 혼란한 상황이 그대로 반영되었고, 불참과 포기가 속출하여 다시금 초라한 국제대회가 되어 버렸다.
당시 FIFA의 가맹국은 73개국으로 늘어나 있었지만, 전쟁 후의 상황으로 34개 나라가 참가를 희망하였고 디팬딩 챔피언 이탈리아와 개최국 브라질이 지역예선을 거치지 않고 본선에 자동진출하였다.
# 불참과 포기가 속출한 지역예선
제4회 대회의 지역예선은 총 10개의 그룹으로 나뉘었다. 특별히 이번 대회에서 처음으로 영국이 참가를 결정하였다. 영국은 2년 전 올림픽에서 단일팀으로 참가하여 4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영국으로서는 단일팀이고, 아마추어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실력을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즈의 네 개의 나라가 지역예선에 참가하였다. 예선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각각 1, 2위를 차지하며 본선 진출권을 획득하였으나, 스코틀랜드가 민족적인 감정으로 본선 참가를 돌연 포기함으로 FIFA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FIFA는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3조에서 아깝게 기회를 놓친 프랑스에게 대신 참가할 것을 권유했다. 프랑스는 이스라엘을 이기고 올라온 유고슬라비아와 두 번 무승부를 기록하고 제3국에서 세 번째 대결을 하여 연장전에서 2-3으로 패하고 탈락한 상황이었다. 프랑스는 처음에 참가를 결정했지만 뒤에 포기했다.
이처럼 제4회 월드컵을 위한 지역예선은 오늘날과는 달리 그다지 치열하지 않았다. 참가 포기가 속출하는 가운데 어부지리로 경기를 치르지 않고 본선에 진출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룩셈부르크를 두 번 누른 스위스는 벨기에와 겨루기로 되어 있었는데 벨기에가 기권하는 바람에 본선에 진출하였다.
올림픽 금메달 스웨덴은 아일랜드와 핀란드와 한조가 되었는데, 아일랜드를 두 번 격파한 시점(3-1, 3-1)에서 핀란드가 포기하는 바람에 그때까지의 성적으로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와 터키, 시리아가 한 조가 되어 한 장의 티켓을 놓고 겨룬 2조에서는 오스트리아가 시드를 배정받아 부전승으로 결승 라운드에 진출하였고, 터키와 시리아의 승자와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첫 번째 라운드에서 시리아는 터키와의 첫 경기에서 0-7로 패하는 바람에 두 번째 경기를 포기했고, 터키가 결승 라운드에 진출해서 오스트리아와 경기를 치르기로 되어 있었는데, 오스트리아가 참가를 포기하는 가운데 터키가 본선 진출을 확정했다. 그러나 터키 역시 이후에 참가를 포기하게 되어, FIFA는 6조에서 스페인에게 패하고 탈락한 포르투갈에게 대신 참가할 것을 권유했으나, 포르투갈 역시 참가를 포기했다.
유럽에서의 불참이 속출하는 가운데 남미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7개 나라(칠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페루, 에콰도르)가 지역예선에 그 명단을 올렸는데, 아르헨티나(개최국 쟁탈전에서 밀려나 불만이 많았음), 페루, 에콰도르가 참가를 포기하는 바람에 한 경기도 치르지 않고 나머지 나라들(칠레, 볼리비아, 우루과이, 파라과이)이 본선에 진출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본선 진출이 오늘날처럼 국가적인 영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한 상황은 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시아에서는 인도, 버마(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가 한 장 할당된 본선 티켓을 놓고 겨루게 되었지만, 버마(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가 포기하여 인도가 티켓을 확보했다. 그러나 인도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맨발로 경기할 수 없다는 FIFA의 입장에 대해서 출전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나마 예선을 제대로 치른 조는 북중비의 멕시코, 미국, 쿠바가 한 장의 티켓을 놓고 제대로 예선을 치러 멕시코가 전승(4승)으로 월드컵 참가자격을 획득하였고, 미국이 2위를 차지하여 본선에 참가하게 되었다.
물론 이들 외에 지역예선을 일정대로 마무리한 그룹이 있다. 1그룹의 영연방의 4개국은 지역예선을 무사히 끝냈지만 참가자격을 얻은 스코틀랜드가 불참을 선언하는 바람에 완전함에 차질이 생겼다. 6그룹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일정대로 지역예선을 끝내고 스페인이 1승 1무로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런데 다른 조에서 터키가 참가를 포기하는 바람에 참가를 대신 권유받은 포르투갈이 참가를 포기하는 바람에 역시 완전함에 무리가 생겼다.
# 새로운 방식
제4회 월드컵은 종전과는 달리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였다. 토너먼트로 진행하는 것은 경기 수가 적고 수입 또한 적다고 판단한 브라질은 대회를 4개 조로 나누어 조별리그를 통해 각 조의 승자가 다시금 결승 리그를 치러 성적이 좋은 팀이 우승하는 방식을 도입하였다. 처음에 FIFA는 그러한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결국 브라질의 요구대로 경기 방식을 수정하였다.
불참과 포기가 속출하면서 제4회 브라질 월드컵 본선은 13개 나라로 확정되었다. 본선 진출에 성공한 스코틀랜드, 터키, 인도가 참가를 포기하였고, 그들을 대신할 나라를 FIFA에서는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13개 나라가 아래와 같이 4개조로 나뉘어 조별리그를 진행하여 각 조의 1위 팀이 결승 리그를 진행하고 최종 우승을 결정하게 되었다.
[Group 1] 브라질, 유고슬라비아, 스위스, 멕시코 [Group 2] 스페인, 잉글랜드, 칠레, 미국 [Group 3] 스웨덴, 이탈리아, 파라과이 [Group 4] 우루과이, 볼리비아
=-=-=-=-=-=-= 오마이뉴스에도 올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