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이후, 용서받지 못한 아시아의 독수리
2002년 이후, 용서받지 못한 아시아의 독수리
[축구 이야기] 아시아의 독수리 최용수에 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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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날지 못한 아시아의 독수리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본선을 위한 지역예선을 파죽지세로 통과한 대한민국 대표팀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월드컵 본선은 지역예선과 확실히 다르다는 사실을 망각한 매스컴과 국민들은 지역예선의 성적을 토대로 본선의 시나리오를 마음대로 그리기 시작하였다.
매스컴을 통하여 대한민국은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같은 조에 속한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를 이기거나 비길 수 있는 강팀으로 탈바꿈하였다. 전혀 꿀릴 팀이 없다는 것이 대회 시작 전, 대한민국의 전반적인 생각이었다. 지역예선을 통하여 나타난 황선홍과 최용수를 투톱으로 하는 공격력은 역대 어느 팀보다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월드컵 1승과 16강에 대한 국민적인 갈망이 가져온 신기루였다는 사실을 본선에서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렇지만 훗날 축구 전문가들이 평가하듯, 만약 본선 직전에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황선홍이 부상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월드컵에서의 1승은 신기루에 불과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회 직전 황선홍의 부상은 대표팀의 전술에 커다란 차질을 야기시켰고, 덩달아 차범근 감독과 최용수 선수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차범근 감독은 황선홍이 없는 최용수는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본선 첫 경기에서 최용수 대신에 김도훈을 깜짝 선발로 기용하였다.
국민들이 최용수에게 거는 기대가 남달랐기 때문에 이러한 차범근 감독의 선수 기용은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만약 김도훈 선발 기용에 대해서 매스컴이 치밀한 전술 분석을 토대로 기사를 작성했다거나,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허무하게 역전패 하지 않았다면 차범근 감독은 국민적인 비난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멕시코의 전력을 과소평가하도록 만든 매스컴은 멕시코전 패배의 이유를 감독의 선수기용에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최용수 선수의 기용 문제를 가지고 차범근 감독과 최용수 선수의 인터뷰가 대조적으로 소개되기도 하였으며, 결국 네덜란드전의 무기력한 0-5 패배로 차범근 감독이 경질되는 사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네덜란드전부터 선발로 출장한 최용수는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이렇다할 활약을 펼치지 못하는 바람에 스트라이커가 받아야 하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특히 벨기에전에서 보여준 전봇대 헤딩(?)은 이후 2002년 미국전에서 홈런볼(?)의 등장 이전까지 최용수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좋은 무기가 되어버렸다.
그 어느 때보다 기대가 컸던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의 처참한 결과는 차범근 감독의 지도력과 선수들의 기량 평가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을 월드컵 본선무대에 올려놓은 일등공신이었던 최용수는 정작 본선에서는 주눅들어서 제대로 뛰지도 못했다는 견해와 함께, 국제무대에는 전혀 통하지 않는 선수였다는 가혹한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 일본에서의 성공
최용수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 끝난 직후 영국 프리미어리그 진출을 노렸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좌절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1999년과 2000년 K-리그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 당시의 최용수는 받아먹기에 의존하던 모습에서 탈피하여 폭넓은 시야, 패싱능력, 그리고 볼키핑 등의 기량의 성장을 보여주었다.
2001년 일본으로 이적한 후 제프 이치하라에서 보여준 최용수의 모습은 그야말로 최고의 절정기에 도달한 독수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J리그의 하위권을 맴도는 팀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리면서 팀의 중심이 되어 활약하는 플레이는 다시금 비상을 꿈꾸는 독수리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일본 진출 첫 해에 21골을 기록하며 득점 2위에 오르는 맹활약을 하며 일본의 축구팬들에게 확실한 인상을 심어준 것이다.
최용수의 일본에서의 성공을 낮게 평가하는 축구팬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일본 J리그의 수비가 K리그보다 허술하고, 파워면에서 부족하기 때문에 최용수 같은 공격수가 기량을 펼치기에 최적의 조건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텃세가 심한 일본의 무대에서 정상의 기량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최용수의 J리그와 K리그에서의 뛰어난 활약은 월드컵에만 매달리는 축구팬들에게 그다지 깊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시금 월드컵의 시즌이 도래했을 때, 축구팬들은 그동안 일본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던 최용수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들추어내기 시작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최용수가 뛰어난 활약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점차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하던 히딩크 사단에 대한 일종의 우려에서 출발된 생각이었다.
# 히딩크 스타일에는 맞지 않았던 최용수
그러나 최용수를 높이 평가하는 국민들과는 달리 사령탑을 맞고 있는 히딩크는 최용수에게 높은 점수를 주기를 꺼려했다. 왜냐하면 네덜란드의 토탈사커를 한국 축구에 접목시키면서 상대적으로 개인기가 뒤떨어지는 것을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창조적인 협력플레이로 커버하는 데 주력을 두던 히딩크의 입장에서 최용수는 ‘계륵’과도 같은 존재였다.
히딩크는 당시에 이름을 날리던 윤정환, 이동국, 최용수 대신에 그라운드를 줄기차게 열심히 뛰어다니는 박지성, 이을룡, 이영표 등을 더욱 선호하고 있었다. 결국 히딩크 스타일에 맞지 않았던 이동국은 대표팀 선발에서 제외되었고, 윤정환은 선발되기는 했지만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고, 최용수는 그나마 출전의 기회를 얻었지만, 결과적으로 축구 인생에서 가장 쓰라린 경험을 맛보게 된다.
최용수가 대표팀에 선발된 이후 평가전에서 최용수는 다른 선수들과 주전 경쟁을 치러야 했다. 오늘날의 해외파와 마찬가지로 연습시간이 별로 없이 다른 선수들과 호흡을 맞춰야 하는 국가대표의 평가전에서 최용수가 히딩크 스타일을 충분히 소화하기는 힘들었다. 반면 안정환은 히딩크의 차가운 시선을 받아가면서 스스로 자신의 스타일을 히딩크에게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결국 2002년 한일월드컵을 통해서 새롭게 재기에 성공하게 된다.
# 하늘이 준 기회를 하늘로 날려버린 최용수
누군가가 최용수에 대해 이렇게 평가를 한 적이 있다. “최용수는 자신이 주목을 받는 경기의 흐름 속에서 최고의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다.” 이것은 그가 일본 J리그에서 줄기차게 보여준 모습이었다.
이러한 최용수의 스타일이 바로 히딩크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경기를 주도하고 자신이 주목받아야 하는데, 몇 분을 남기고 교체 투입되어서 남은 시간을 소화하는 것은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고, 어딘지 모르게 자신만의 플레이를 하지 못하고 경기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플레이를 하곤 했다. 최용수로서는 교체 투입으로는 충분한 기량을 발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2002년 월드컵, 폴란드와의 첫 경기에서 대한민국은 사상 첫 승을 거두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하였지만, 당시에 최용수는 그라운드가 아닌 벤치에서 그것을 느끼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의 두 번째 경기, 운명의 미국전에 드디어 최용수는 꿈에 그리던 월드컵의 무대를 다시 밟게 되었다. 그러나 그 경기가 최용수로서는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경기가 되어버린다.
후반에 교체 투입되어서 아직 몸이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후반 43분, 그에게 너무나도 쉬운(관중들이 보기에 너무나도 쉬운) 찬스가 그에게 찾아왔다. 미국의 왼쪽을 파고들던 이을룡 선수가 패스한 볼이 최용수의 발에 맞고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순간, 국민들은 승리를 날려버렸다고 최용수 선수에게 비난의 화살을 무자비하게 날리기 시작했다.
선수로서 부담감을 갖지 않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골을 넣지 않으면 안된다는 부담감은 그의 플레이를 위축시켰던 것이다. 이후 경기에서 최용수 선수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최용수를 동정하는 국민들은 마지막 터키 전에 부진을 만회하기를 기대했지만, 부상이라는 이유로 출전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 2002년 이후, 용서받지 못한 아시아의 독수리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은 4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히딩크 감독은 일약 영웅으로 등극했고, 페널티킥의 실축으로 한때 역적으로 몰릴 뻔했던 이을용과 안정환은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그 기회를 최대한 살림으로서 국민의 따뜻한 격려 속에 영웅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영웅이었던 최용수에게는 미국전 이후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미국전에서 보여준 결정적인 실수는 그를 한순간에 역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대표팀에 발탁되었을 때에도 실수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여지없이 여론은 2002년 월드컵 당시 미국전을 들먹거렸다.
월드컵이 끝나고 최용수 선수는 ‘전술 소화 능력의 부재’, ‘받아먹기만 잘한다’, ‘성질만 급하다’, ‘국내용이다’, ‘아시아용이다’ 등이라는 가혹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평가의 기반에는 미국전의 실수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지역예선전 당시에 팀을 본선에 올려놓은 최고의 선수로 평가를 받았던 선수가 몇 번의 실수 때문에 전반적인 능력이 기준치 이하의 판정을 받기 시작한 것은 조금 가혹하다고 할 수 있다.
황선홍 선수가 영광스러운 은퇴를 한 이후, 최용수 선수는 조용하게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였고, 2006년에 일본에서의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국내에서 마지막 선수 생활을 하기 위해서 고향 땅을 밟고 플레잉코치로 K-리그에 복귀하였으나, 후배들의 활약에 밀려 2경기만 출전하는 부진을 보이다가 끝내 2006년 8월에 조용하게 선수생활을 마감하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접고 지도자의 길에 들어선 최용수가 (최근 결혼의 파경의 아픔을 극복하고) 지도자로서 성공한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있는 날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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