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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제4회 월드컵 :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던 브라질

*미카엘* 2007. 5. 31. 18:19

[월드컵 22]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던 브라질
[제4회 월드컵] 브라질, 다잡았던 우승을 놓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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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질, 안방 불패의 역사

브라질은 1950년 월드컵을 개최하면서 남미 축구의 정상과 함께 세계 축구의 정상을 차지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의 상황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월드컵 개최국으로서 홈그라운드의 이점도 있었고, 당시까지 브라질은 자국에서 열린 세 번의 코파아메리카(1919, 1922, 1949)에서 모두 우승할 정도로 ‘안방 불패’의 신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브라질이 또한 우승을 향한 강한 집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데미르(Ademir), 지지뇨(Zizinho) 자이르(Jair)와 같은 뛰어난 공격진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이르는 1년 전 1949년 코파아메리카에서 9골로 브라질의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브라질은 또한 월드컵을 위해서 2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경기장 마라카나 스타디움을 건설하며 대회를 준비했다. 국민들은 브라질의 우승을 확신하고 있었고 대회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조별리그

브라질은 제1조(브라질, 스위스, 유고슬라비아, 멕시코)에 속해 있었다. 브라질은 멕시코와의 첫 경기(6월 24일)에서 아데미르(2골), 자이르(1골) 발타자르(1골)가 득점을 올리며 멕시코를 4-0으로 가볍게 눌렀다.

브라질의 두 번째 상대는 다음 대회 개최국 스위스였다. 스위스는 당시 유럽에서는 중위권에 속하는 나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브라질로서는 당연히 승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브라질로서는 오히려 다음 상대인 유고슬라비아(1948년 은메달 획득)가 더 어려운 상대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6월 28일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브라질은 전반에 알프레도(Alfredo)와 발타자르의 골로 2-1로 앞서나갔다. 스위스의 수비가 견고한 탓인지 브라질은 추가 득점을 하지 못했지만 경기 종료 직전까지 2-1로 앞서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승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경기 종료 직전 스위스의 Fatton에게 뼈아픈 동점골을 허용하여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다음번 상대인 유고슬라비아는 스위스(3-0)와 멕시코(4-1)를 제압하고 2승으로 브라질과 동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사실상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 결과에 따라 결승리그 진출이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브라질로서는 스위스에게 경기 종료 직전 동점을 허용하며 무승부를 기록한 것이 오히려 약이 되었다. 7월 1일, 브라질은 올림픽 준우승팀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아데미르가 전반에 한 골, 후반에 지지뇨가 한 골을 넣어 2-0으로 승리하고 1위를 기록하고 네 팀이 겨루는 결승 리그에 진출하였다.

# 결승리그, 화려한 브라질의 공격력이 살아나다

조별리그에서 비록 1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브라질은 브라질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대부분의 강호들이 조별리그 이후의 상황에 팀의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과 같이 브라질 역시 조별리그를 통과한 이후 결승리그에서 화려한 득점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브라질의 결승리그 첫 상대는 1948년 올림픽 챔피언 스웨덴이었다. 스웨덴은 전 대회 챔피언이었던 이탈리아를 조별리그에서 따돌리고 결승리그에 올라온 팀이었다. 아마추어 대회인 올림픽 챔피언으로서 브라질과 좋은 승부가 예상되었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니 양상은 브라질의 일방적인 경기가 되었다. 이날 경기에서 아데미르가 혼자서 네 골을 넣는 활약에 힘입어 브라질은 스웨덴을 7-1로 대파하고 1승을 거두었다.

브라질의 다음번 상대는 축구종가 잉글랜드를 1-0으로 따돌리고 결승리그에 안착한 스페인이었다. 스페인 역시 유럽의 강호에 속하는 팀으로 브라질과 좋은 승부를 보여주리라고 예상되었지만, 브라질의 공격력은 스페인을 6-1로 압도하며 1승을 추가했다.

#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던 결승리그 마지막 경기

결승리그의 마지막 경기는 남미의 우루과이였다. 우루과이는 제1회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1920년대와 30년대 초반까지 세계 축구의 강자로 등극했던 팀이었다. 그러나 1940년대 중반 이후에 남미에서도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파워에 다소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루과이는 결승리그에서 스페인에게 간신히 2-2로 무승부를 이루었고, 스웨덴에게 3-2로 간신히 역전승하여 1승 1무를 기록 중이었다. 반면 브라질은 2승을 거둔 상황이었기 때문에 브라질로서는 우루과이와 비기기만 해도 우승이 확정되는 유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브라질 국민들은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우승을 확신하고 있었다. ‘브라질의 승리’라는 삼바 노래는 작업을 마치고 브라질의 승리에 맞추어 발표되기 위해 준비 중에 있었다.

7월 16일, 마라카나 경기장에는 거의 20만 명의 관중이 자국의 월드컵 재패를 기념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브라질의 막강한 공격진은 우루과이의 진영을 향해서 거침없이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우루과이의 수비는 좀처럼 브라질에게 허점을 보이지 않았다. 경기장을 가득 채운 관중들은 예상과 달리 브라질이 골을 넣지 못하자 불안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전반을 득점없이 비긴 브라질은 후반에 먼저 선취골을 넣었다. 경기장은 떠나갈 정도였고 거리로 뛰쳐나온 국민들은 폭죽에 불을 붙이며 기뻐했다. 그러나 0-1로 뒤지기 시작한 우루과이 선수들의 플레이가 점차 살아나고, 앞서는 브라질 선수들의 플레이는 오히려 경직되기 시작했다.

우루과이의 Schiaffino가 동점골을 넣은 후(66분), 비기기만 해도 우승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브라질 선수들은 오히려 소극적으로 경기에 임하게 되었다. 결국 이겨야 우승할 수 있다는 배수의 진을 친 우루과이의 플레이가 더욱 브라질을 위협했고, 우루과이의 Ghiggia는 79분 경에 역전골을 성공시켰다.

# 브라질 월드컵, 그 이후

경기가 끝나고 우루과이의 승리가 확정된 순간 경기장을 가득 채운 관중들과 브라질 국민들은 패배의 슬픔에 휩싸였다. 예정되어 있던 의장대 사열이나 국가 연주, 피파 회장의 축사도 없어졌다. 대회 득점왕은 9골을 넣은 브라질의 아데미르가 차지했으나 마지막 경기에서 팀이 패하고 준우승에 머무는 바람에 빛이 바랬다.

1950년 자국에서 개최한 월드컵에서 다 잡았던 우승을 날려버린 브라질은 이날의 패배를 오랫동안 치유하지 못했다. 패배의 실망과 슬픔은 자살로까지 이어졌다. 이후 브라질 국민들은 준우승을 거둔 브라질 선수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쏟아부었다.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 참가한 선수들 대부분이 다시는 브라질의 국가대표로 뽑히지 못할 정도로 브라질은 패배의 충격이 컸다. 브라질은 이 패배의 징스크를 제거하기 위해서 당시에 입었던 유니폼에서 오늘날의 유니폼으로 바꾸기도 했다.

비록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우승을 거머쥐는 데는 실패했지만 세계는 앞으로의 축구는 브라질에 의해서 지배될 것이라는 인식을 점차 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영원한 우승 후보' 브라질의 시대가 서서히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