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민주화운동] 16.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출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출범
시인 김지하는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고 제안했다.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 다시 쳐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김지하, ‘1974년 1월’ 앞부분).
1973년 12월24일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가 발족하면서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고조되었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박정희는 74년 1월8일 대통령 긴급조치라는 ‘절묘한’ 발상을 통해 다시금 탄압의 강도를 높였다. 예민한 더듬이의 시인은 새삼 죽음의 공포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긴급조치 시대의 서막을 알리며 시작된 74년은 한국 문학사에서도 매우 독특하고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74년 1월7일 새해
벽두부터 61명의 문인들이 개헌 지지선언을 통해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을 뿐만 아니라, 그 해가 저물던 11월18일에는 새로운
문학단체 자유실천문인협의회(약칭 자실)가 출범했기 때문이다. 특히 자실은 문인들의 동호회적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기존 문학단체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분명한 목적을, 그것도 전투적인 방식으로 내세웠다. 당연히 그 대립항에는 바로 서슬 푸른 유신체제가 있었다.
그렇지만 자실이 처음부터 분명한 하나의 조직체로서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의 태반은 서울 청진동 뒷골목이었고, 시대가 주는
모멸감을 견디기 어려웠던 문인들이 모여 앉은 술상 앞이었다. 당시 청진동에는 문인들의 가벼운 호주머니에 걸맞은 값싼 술집들이 즐비했고, 게다가
막 등록을 마친 창작과비평사를 비롯해서 여러 잡지사와 출판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말하자면 문인들이 저녁이면 굳이 그 골목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당시의 풍경을 소설가 박태순은 이렇게 그려내고 있다. “어느 때나 빼놓지 않고 골목 어귀마다 배치돼 있는 무장 경찰병력과
장갑차·닭장차, 인도와 지하도에 깔려 있는 사복 형사, 정보원, 민간인 복장의 보안사 군인들과 그들이 벌이는 시도 때도 없는 불심검문과 신분증
제시 요구 등, 시민들은 잔뜩 긴장한 채 겁을 먹지 않고서는 이 네거리를 지나다닐 수 없을 지경이었다. 더구나 세상 냄새에 예민한 문인들은
이같은 광화문 네거리를 돌아들 적마다 자신의 시대에 대한 슬픔과 억울함과 분노를 함께 일깨우지 않을 수 없었다”(박태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문예운동사’ 제14회).
74년 10월에 접어들면서 청진동 뒷골목 문인들의 울분도 더욱 커져만 갔다. 무엇보다도 동지적 유대 관계를 짙게 느끼고 있던 언론에
대한 탄압이 노골적으로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10월22일 한국일보 사장 장강재 등 2명이 월남의 반정부운동 기사와 관련하여, 이튿날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송건호 등 3명이 서울대 농대생 데모 기사와 관련하여 각기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 기자들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편집국에 모여
철야농성을 벌이던 동아일보 기자들이 이른바 10·24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발표하며 당국의 언론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이어 다른
신문·방송사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이 선언에 동참했다.
문인들은 표현의 자유 없이 문학 역시 존재하지 못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그러면서도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너울 아래 여지없이 짓밟히고
있던 대명제를 새삼 확인했다. 연초의 터무니없는 이른바 ‘문인 간첩단 사건’을 통해 이미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받은 문인들의 가슴은 그야말로
성냥불만 가까이 대도 확 타오를 만큼 달아오른 상태였다.
11월15일 오후 6시 청진동 소재 귀향 다방에 고은·신경림·백낙청·염무웅·조태일·이문구·박태순·황석영 등이 모였다. 1월의 ‘문인
61인 개헌 지지선언’을 주도했던 문인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은 다시금 ‘선언’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는 데 쉽게 합의했다.
선언문에 담아야 할 내용에 대해서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발표할 것인가가 주로 논의되었다. ‘문인 61인 개헌 지지선언’이
다방에서 발표되어 업주로 하여금 본의 아니게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 전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방이나 출판사 등 영업에 지장을 주는 곳을
피하다 보니 자연스레 거리에서 발표하자는, 매우 낭만적인 것처럼 보이는 제안이 어느새 주류를 이루었다.
광화문 네거리 시위. 디데이는 사흘 뒤 월요일로 정했다. 주동자 문제는 의외로 간단히 풀렸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시인 고은의
태도가 단호하였다. 대학생이 데모 한번으로 사형 언도를 받는 세상인 만치, 이번 일에 있어서도 그 주동자는 10년쯤 푹 썩을 각오는 해두어야 할
일이었다. ‘면벽 수도 10년’을 수행한 달마대사를 본받겠다는 땡초인 ‘나, 일초(一超)’ 외에 어떤 다른 적임자가 있겠느냐 하였다(‘일초’는
고은이 효봉 스님 문하에서 수계할 때 받은 법명)” (박태순, 앞의 글 제15회).
동조자를 모으는 일 역시 어렵지 않았다. 많은 문인들이 적극적인 동참의사를 표해 왔는데, 이틀 후 계산을 해보니 공교롭게도 더도
덜도 아닌 딱 100명이었다. 박태순이 101명이면 좋겠다고 아쉬워할 때, 이문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문구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소원대로 됐구먼”. 서명자가 한명 더 늘어난 것이다. 따라서 선언문의 제목은 ‘문학인 101인 선언’으로 정해졌다.
문학평론가 염무웅이 작성한 초안을 놓고 논의하던 일행은 발표 주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문학표현자유 실천운동위원회’라는
시안을 박태순이 제시하였다. ‘문학자유 실천운동위원회’라고 고은이 ‘표현’이란 단어를 빼내어 다시 옮겨 썼다. 이를 백낙청이 ‘자유문학
실천운동위원회’라고 순서를 바꾸어 썼다. … 고은이 ‘자유실천 문학운동협의회’라고 다시 고쳐 썼다. 백낙청이 한참 고심하다가 ‘자유실천
문학인운동협의회’라고, ‘문학’ 대신 ‘문학인’이란 어휘를 넣고는, 다시 ‘문학인’을 ‘문인’으로 고쳐보더니, ‘더 포괄적인 명칭으로
일반인들에게 선보이기 위해서는 ‘운동’이라는 단어도 빼버리는 것이 낫겠다’ 하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라고 다시 고쳐 적어놓고 이를 여러
문인들이 보도록 했다”(박태순, 앞의 글 제15회).
5·16 군사쿠데타 이후 15년간 굴종과 노예의 언어로 기술되었던 한국 문학사가 억압을 떨쳐내고 바야흐로 새로운 실천의 계단을 밟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이튿날 오전 10시, 지난 밤 자실의 대표간사로 임명된 고은을 비롯하여
이호철·염무웅·황석영·양성우·백낙청·조태일·최민·한남철·조해일·조선작·송영·이시영·송기원·윤흥길·석지현·임정남·김국태·김연균·백도기·이문구·박태순
등이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 모였다. 광주에서 올라온 시인 양성우가 밤새 등사기를 긁어 만든 선언문을 고은이 읽어 내려갔다.
“오늘날 우리 현실은 민족사적으로 일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사회 도처에서 불신과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정직하고 근면한 사람은 살기
어렵고 거짓과 아첨에 능한 사람은 살기 편하게 되어 있으며, 왜곡된 근대화 정책의 무리한 강행으로 인하여 권력과 금력에서 소외된 대다수 민중들은
기초적인 생존마저 안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러한 모순과 부조리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몇몇 정치가의 독단적인
결정에 맡겨질 일이 아니라 전국민적인 지혜와 용기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라 믿고, 이에 우리 뜻있는 문학인 일동은 우리의 순수한 문학적 양심과
떳떳한 인간적 이성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결의·선언하는 바이며, 이러한 우리의 주장이 실현되는 것만이 국민총화와 민족안보에 이르는
길이라고 선언하는 바이다”
선언문은 이어 김지하를 비롯한 긴급조치 구속 인사 즉각 석방,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신앙·사상의 자유 보장 등 5개 항의 결의를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송기원은 갓 문단에 등단한 신인이었다. 아는 얼굴도 거의 없었다. 그는 반은 하숙집 동료인 시인 이시영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해서,
또 반은 호기심으로 그 자리에 나왔다. 그러나 송기원은 패기만만한 신인답게 이시영과 함께 파쇼의 거리에서 단단히 한몫을 했다. 갑작스러운 시위에
놀란 경찰이 달려들자 미리 준비한 ‘우리는 중단하지 않는다-자유실천문인협의회’ ‘시인 석방하라-자유실천문인협의회’라는 두 개의 현수막을 몸싸움을
벌여가며 악착같이 지켜내려 했던 것이다.
이날 시위와 관련해 고은·조해일·윤흥길·이시영·송기원·이문구·박태순 등 7명이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고 한남철·황석영 등 다수
문인들은 광화문 네거리의 예총회관 내 한국문인협회 사무실에서 연행 문인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언론은 이 사건을 매우 비중있게
다뤘다. 그리하여 자유실천문인협의회라는 생소한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의 문인들은 이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시대의 최전선으로 나아갔다. 자실은 엄혹한 독재정권에 맞서 이 땅의 문인들이 결성한 최초의
조직체로서, 여타 문예운동의 활발한 대두를 이끌어냈으며 이후 활동을 통해서는 민족민중문학을 한국 문학사에서 더 없이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자실을 통해 한국 문학은 비로소 양심적인 세계문학의 흐름에 당당히 섞여들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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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신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실은 1987년 9월17일 공식 명칭이 ‘민족문학작가회의’(작가회의)로 바뀌면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74년 ‘101인
선언’으로 출발했던 조직이 2003년 현재 1,300여명의 회원에 각 지역 지부와 지회까지 거느린 거대 조직으로 바뀐 것이다. 조직이 확대되고
시대 상황도 많이 바뀜에 따라 작가회의는 작가들의 권익 향상을 위한 활동을 겸하게 됐지만 독재와 왜곡된 근대화가 불러온 수많은 불의에 항거하던
자실의 정신은 현재까지 살아있다.
작가회의는 정관에 “표현의 자유와 사회의 민주화를 위하여 헌신해 왔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참다운 민족문학을
이룩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정관은 이를 위해 ‘자유실천위원회’를 두도록 했다. 자유실천위원회는 작가들의 발언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시대적인 사안들에 대해 끊임없이 성명을 내고 행사를 조직한다. 작가회의는 등단 작가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있지만 회원자격심사위원회에서
민주화 정신과 작가주의 정신을 인정받는 사람만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심사에서 합격하지 못해 가입이 거부되는 사례도 종종 있다고 한다.
민주화 이후 작가회의는 통일과 반전, 외국인 노동자 인권 등의 사회적 사안에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문학 대중화, 세계 작가들과의
교류에도 힘을 쏟고 있다. 특히 지난 3월에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규탄하기 위해 87년 6월항쟁 이후 15년 만에 처음으로 거리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소모임인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은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알리고 이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베트남
작가들과 정기적으로 교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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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이영진(시인)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장종택(출판인)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종합기획부장) 김재중(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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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3년 8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