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민주화운동] 18. 목요·금요기도회
목요·금요기도회
1973년 7월 목사 박형규 등의 구속사건(남산 야외음악당 부활절 사건)은 한국 기독교계에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해방 이후
반공의 일선에 서서 항상 친정부적으로 일관해왔고 개인주의적이며 기복적인 신앙에 몰두해 있던 한국 기독교계에서, 비록 소수나마 민주주의와 억눌리고
소외된 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행동에 나선 목회자들이 등장한 것은 많은 목회자들로 하여금 한국 기독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새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우선 평소 박형규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동료 기독교인에 대한 인간적·신앙적 사랑을 나타내면서 구속자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그뿐 아니라 무고한 자들을 박해하는 악의 세력을 하느님 앞에 고발하고, 그 악에 사로잡힌 자들이 회개함으로써 사회가
변화하기를 함께 기도했다.
그들의 기도모임이 비록 크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분명 한국 기독교의 새로운 전통이 시작됐음을 의미했다. 교회는 이제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억눌리고 소외된 자들의 인간다운 삶에 대해 진지하고도 지속적인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무였던
김관석의 회고대로 70년대 반유신운동을 기도회로 시작했다는 것은 교회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박형규가 73년 9월27일 병보석으로 출감하면서 잠시 주춤했던 기도모임은 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무려 253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된 이 사건 관련자들이 수사과정에서 온갖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구속자 가족들은 종교계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게 되었다. 이미 이 사건과 관련하여 박형규·김동길 등 기독교계 인사들이 구속된 데 격앙되어 있던
기독교계는 이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 잠시 중단했던 기도모임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7월11일, 긴급조치 위반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긴급조치 위반으로 처벌받던 시절, 목사인 김상근·이해동·조승혁·오충일 등을 중심으로 하여 구속자 가족들과 교역자, 평신도들이 종로5가 기독교회관
2층 소회의실에 모였다. 이들은 긴장으로 가슴을 졸이며 민청학련 관련 구속자 및 기타 긴급조치 위반 구속자들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했다.
목요일인 이날의 모임을 계기로 기도모임은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로 정례화되었고, 민청학련 관련 구속자뿐 아니라 정치적 이유로
박해받고 구속된 모든 사람들의 억울한 사정을 알리고 이에 대한 교회의 의견을 밝히는 중요한 모임으로 정착되어 갔다. 이 기도회 참석자는 꼭
기독교 신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정치적인 이유로 박해받은 사람들, 남편이나 자식을 유신독재 때문에 감옥에 빼앗긴 가족들이 신자 여부에
관계없이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돌아가는 사정을 알아보고, 서로 위안받기 위해 몰려들었다. 언론이 통제되고 정부에 비판적인 발언이
처벌받던 시절, 이 목요기도회는 그들이 하소연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을 독재권력이 그냥 묵과할 리는 없었다. 입에 재갈을 물리고 긴급조치로 위협하면 유신에 반대하는 운동이 소멸할
것으로 기대했던 그들에게 목요기도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철저히 언론보도를 통제했지만 목요기도회를 통하여 유신에 반대하는 활동
소식이 소리없이 전파되었다. 감옥에 넣으면 움츠러들 것으로 기대했지만 목요기도회의 만남을 통하여 서로 위안받고 힘을 얻었다. 이제는 가족조차
유신에 반대하는 투사로 점차 단련되어 갔다. 유신정권은 기독교회관 입구에 경찰을 배치하여 참석하는 사람들을 위협했고, 수시로 검문하고 연행해
갔다. 기도회를 주관하는 목회자들에게도 위협·회유·연행을 일삼았으며, 심지어는 장소를 봉쇄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구속자 가족들을 위해 기독교
신앙 차원에서 기도한다는데 그것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종교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였기 때문이다. 기도회라는 형식이 모임 자체에 대한
보호막이 되었던 것이다.
75년 5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고 유신의 탄압이 더욱 가혹해지면서 한동안 중단되었던 목요기도회는 그해 9월 수도권 선교자금 유용
혐의로 박형규·권호경이 구속되면서 재개된다. 이후 공식적인 목요기도회가 계속되는 가운데 76년 1월15일 구속자 가족들을 중심으로 한 또 하나의
목요기도회가 시작되었다. 전자가 오후 3시(혹은 6시)에 모임을 가졌던 데 반해, 후자는 오전 10시 구속자 가족들을 중심으로 소규모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두 개로 진행되던 기도회는 76년 3월 3·1민주구국선언사건(세칭 명동사건)이 발생하면서 하나로 통합된다. 76년 3월19일
KNCC 제1차 실행위원회가 결의하여 조직한 선교자유대책위원회가 공식적으로 기도회의 주최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선교자유대책위원회는 기도회
요일을 금요일로 변경하고 76년 5월3일 오후 6시 기독교회관에서 120명이 참여한 가운데 첫 금요기도회를 개최했다. 목요일이 금요일로 변경된
이유는 당시 명동사건 재판일이 주로 토요일이라 재판일 전날 기도회를 갖던 전례를 따르기 위함이었다.
이후 금요기도회는 79년 10월 박정희의 사망으로 유신이 붕괴될 때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계속된다. 이 기간 동안 특이할
만한 점은 금요기도회가 학생·정치인·지식인 등 주로 정치적 이유로 구속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 일변도에서 벗어나 노동자·농민 등 민중의 인간다운
삶에 대해서도 서서히 관심을 늘려갔다는 것이다. 박정희 집권기간 내내 노동자·농민들은 소위 경제개발이라는 명분 하에 저임금·저곡가라는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당했다. 그런 그들이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인간다운 삶을 향한 자기들의 의지를 나타내기 시작하자 금요기도회도 그들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허름한 옷차림에 조리도 없는 말을 더듬거리며, 그러나 애절하면서도 진실에 찬 목소리로 악덕사장이나
정부로부터 당한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노동자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어느덧 장내는 훌쩍이는 소리로 가득 차곤 했다. 그리고 이런
속에서 노동자·농민들은 자신들이 결코 혼자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도회가 결코 치외법권 지역은 아니었다. 78년, 당시 막 20살을 넘긴 김주호는 기도회에서 동일방직 여공들에게 유신정권이
저지른 만행 소식을 듣고 흥분하여 “박정희는 빨갱이보다 더 나쁜 자식”이라고 외쳤다. 그는 기도회장을 나오다가 바로 연행되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기도회장 안에는 항상 수십 명의 기관원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유신체제가 붕괴된 이후 이제 곧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금요기도회도 그 역할이 끝나는 듯했으나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광주에서 저 엄청난 살육이 벌어진 직후인 1980년 5월30일 서강대생 김의기는 기독교회관에서 광주의 참상을 폭로하는 글을 남기고
투신 자살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광주 영령들의 억울함을 호소할 금요기도회가 전두환 일당의 봉쇄로 열리지 못하게 되자 자신의 생명으로
금요기도회를 대신한 것이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금요기도회는 서서히 역할이 축소되어 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상황의 변화 때문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폭정에 항의하는 대중운동이 확산되고 구속자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이제 기도회라는 틀로는 더 이상 그들의 억울함과 인권문제를 담아낼 수
없게 된 것이다.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등 각 부문 대중운동이 발전하면서 이제 민중은 자기들의 문제를 자기들의 운동조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구속자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대중의 의식이 각성되면서 구속자들의 인권문제는 구속자 가족 스스로가 나섰다.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민가협)가 그것이다. 70년대 목요·금요기도회가 맡았던 역할의 대부분은 이제 민가협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가 상당 부분 진척되면서 이제 목요·금요기도회는 먼 옛날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목요·금요기도회가
이 나라 민주주의와 인권, 사회정의, 그리고 억눌리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에 대해 보여준 깊은 관심은 이 나라 기독교의 자랑스런
전통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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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 등 구속자 가족
긴급조치가 남발되며 정권이 극도로 경직돼 있던 1970년대 중반, 구속자 아들이나 남편을 둔 가족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
억울함과 분함에 몸서리치던 이들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한 곳은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이었다. 이곳은 소재지 주소에 따라 흔히
‘5가 그룹’으로 불리었다. 구속자 가족들은 기독교회관에 있던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교회여성연합회
사무실 등에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 슬픔을 위로했다.
남들 앞에 별로 서본 적 없는 주부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들은 점차 투사가 되어갔다. 기도회가 끝나면 으레 성명서 낭독과 시위가
뒤따랐다. 정보과 형사들은 목이 터져라 아들과 남편의 석방을 외치는 이들을 붙잡아 속칭 ‘닭장차’에 태웠다. 하지만 형사들에게 “그래, 나도
잡아가라”며 악을 쓰는 구속자 가족들은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버스에 태워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 아무데나 내동댕이쳤다. 빠른 시간에 다시 모여
데모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구속자 가족들은 이것을 ‘설사똥’에 비유했다고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찔끔거리며 두세 명씩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데모를 거듭하다보니 투쟁 방법도 다양해졌다.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플래카드를 펼쳤지만
순식간에 빼앗기기 일쑤였다. 그래서 여러개를 만들어 각자 숨기고 있다가 여기서 빼앗기면 저기서 꺼내드는 식으로 시위를 벌였다. 3·1명동사건
구속자 가족들은 보라색 한복을 맞추어 입고 ‘민주인사 석방하라’는 글씨를 양산이나 부채에 적어 들고 다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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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장종택(출판인)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종합기획부장) 김재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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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3년 8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