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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민주화운동] 32. 스승들의 양심 ‘학원 병영화’ 거부하다

*미카엘* 2005. 3. 2. 18:10

스승들의 양심 ‘학원 병영화’ 거부하다

 


1975년 5월 긴급조치9호 선포 이후 전국의 고교와 대학은 학도호국단으로 편성되어 학내 군사교육 체제를 갖추게 된다. 교육관계법 등 소위 4대 전시입법의 국회 통과와 함께 교수 재임용제가 신설되었다. 곧이어 9월 서울대는 학생집회, 데모, 농성, 등교거부, 마이크 사용 등을 일절 금지하는 새 학칙을 선포한다. 76년 새 학기에는 전국 98개 대학에서 416명의 교수가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함으로써 강제 해직되었다. 문교부(현 교육부)는 유신통치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교수들을 합법적으로 남김없이 학내에서 추방해버렸다.


학원에 대한 감시와 탄압은 노골화되어 학내에는 아예 전경과 경찰기동대, 사복형사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상주하면서 ‘경비일보’(학내에 상주하는 기관원들의 상황보고 일지)를 작성해서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학생 수까지 시시콜콜 치안당국에 보고하기에 이른다. 교수들에게는 연구활동이나 강의보다 학생 시위를 막는 행정부의 보조역이 오히려 더 중요한 임무로 주어졌다. 제자의 시위와 집회를 감시하고 예방하기 위해 중등학교의 담임교사처럼 학생 모두에게 지도교수가 배정되었다.


초·중등학교에는 전국의 관공서와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사진과 함께 ‘국민교육헌장’이 내걸렸다. 교육주체들의 자율성과 민주성이 사라지고 삼엄한 병영과도 같이 강요된 침묵이 지배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소규모 집회와 시위가 일어나면 학내에 상주하는 전경들은 교수가 보는 앞에서 학생들을 끌고 갔다. 참다못한 해직교수들은 78년 4월 동료 교수들에게 보내는 글을 채택한다. 해직교수협의회 명의로 작성된 이 글은 “‘공부하는 대학’이란 결과적으로 무엇입니까? 권력이 허용하는 지식만을 전수하고 권력에게 편리한 기술만을 습득하는 것이 곧 대학인의 공부라는 것 아닙니까? ‘면학 분위기 조성’은 또 무엇을 말합니까? 대학인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비판정신과 자주정신을 봉쇄하기 위해서는 모든 강권이 발동되리라는 공공연한 선언이 아닙니까?”라고 자책과 비통함을 토로한다. 이들은 국민교육헌장을 일본 군국주의 시절 ‘교육칙어’의 재현으로 비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78년 6월27일 마침내 전남대에서 민주교육, 인간교육을 주창하는 선언문이 채택된다.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제목의 이 선언문은 “부국강병과 낡은 권위주의 문화에서 조상의 빛난 얼을 찾고, 민주주의에 굳건히 바탕을 두지 않은 민족중흥의 구호는 전체주의와 복고주의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또 능률과 실질을 숭상한다함이 공리주의와 권력에의 순응을 조장할 뿐 정의로운 인간과 사회를 위한 용기를 소홀히 하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역설한다.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에 서명한 교수들은 송기숙·명노근 등 11명의 전남대 교수들이었다. 그러나 이 선언은 애초에 전국의 대학 교수들이 참여하기로 계획되어 있던 것이었다.


송기숙은 일제하 농민의 소작쟁의를 다룬 장편소설 ‘암태도’를 비롯하여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던 국문학과의 중견 교수. 그는 서울대 영문과에서 이미 해직되어 있던 백낙청을 78년 초 찾아갔다가 그의 소개로 교수선언에 동의해줄 만한 몇몇 현직 또는 해직교수들을 만난다. 해직교수협의회 대표인 성내운(전 연세대 교수), 서울대 교수 안병직 등이 그들이었다. 각 대학별로 동조자를 모색하되 70명 정도가 될 때 선언문을 발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송기숙은 전남대 교수 11명을 어렵사리 서명자로 확보했다. 그러나 서울의 사정을 살펴보기 위해 6월 서울에 온 송기숙은 선언의 대표자를 맡겠다는 사람이 없는데다 별도로 선언문을 채택하겠다는 학교가 많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언문 채택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송기숙은 낙심한 채 6월26일 광주로 내려왔다. 그런데 이튿날인 27일 광주에 온 성내운이 뜻밖의 말을 하는 게 아닌가. 박정희 정권의 정보 수집능력으로 보건데 계획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고, 그리되면 주동자 몇 명이 쥐도 새도 모르게 ‘제2의 최종길 교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성내운은 그예 일을 터뜨리고 만 것이다. 그는 전남대 교수 11명의 이름으로 된 선언문을 AP통신 아사히 등 언론사에 보내고, 서울대를 비롯한 몇몇 대학교수들에게도 이를 우송했다. 다른 대학의 결행을 앞당기기 위한 것이었다.


송기숙은 큰일났구나 하고 탄식했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상태였다. 그는 먼저 선언문 초안 작성자이자 창작과비평사를 맡고 있는 백낙청을 철저히 보호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울러 이미 해직된 성내운 한 사람만 끌어들이기로 작정하고 성내운과 말을 맞춘 후 헤어졌다. 물론 성내운은 잠적하기로 했으며 설령 체포되더라도 나머지 교수들의 이름은 끝까지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송기숙은 다음날 바로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어 서울지역 교수 중에도 가담자가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추궁받았다. 당연히 서명 참여 교수 11명은 모두 해직되었으며 송기숙은 즉각 구속기소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전남대는 곧 대규모 시위에 휩싸였다. 대학당국은 휴교령으로 시위를 막아보려 했지만 학생들은 오히려 시내로 진출하여 격렬하게 경찰과 맞섰다. 5일 동안 계속된 시위로 학생 500여명이 연행되고 18명이 구속·제적되었다. 파문은 학교 담장을 넘어 종교·문인단체 등으로 번져갔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을 살고 출소한 윤한봉·김상윤 등과 김남주·이강 등의 제적학생, ‘함성’지 사건의 박석무 등이 연일 기도회가 열리고 있던 광주 YWCA에 모여들면서 제각기 움직이던 여러 세력은 하나로 통합되었다. 이들은 서울의 민주화세력과도 자연스럽게 연대하게 되었다. 1세대 인권변호사 이돈명과 홍성우 등은 법정을 민주화 교육장으로 변화시켰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을 중심으로 수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이 법정에 나와 호쾌한 선배 소설가를 응원했다. 송기숙은 ‘문학의 내적 실천과 외적 실천을 분리하지 않는 전일적 인간에의 열망’을 소유한 소설가였다. 결심공판에서 징역 7년을 구형받은 그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에게 길어야 징역 1년여를 선고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긴급조치 적용의 부당성을 토로했다.


성내운은 6개월여의 잠행 끝에 79년 1월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교육학과 교수인 그는 낭송시인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많은 저항시인들의 시는 그의 입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 음악으로 변모했다. 그는 시의 연주가였다. 교도소에 입감하던 첫날, 검정 고무신에 죄수복을 입고 감방에 들어선 그는 감방 가장자리를 끝없이 돌면서 큰 소리로 시를 낭송했다. “살아오는 저 푸른 자유의 추억/되살아나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치떨리는 노여움이/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타는 목마름으로/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 만세.”


윤동주의 ‘별헤는 밤’ 양성우의 ‘겨울 공화국’ 채광석의 ‘밧줄을 탄다’ 문익환의 ‘꿈을 비는 마음’에서부터 김구의 ‘나의 소원’에 이르기까지 그의 암송은 서정과 서사, 시와 산문을 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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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교육지표]

 

‘우리의 교육지표’는 국가주의에 근거해 애국애족교육을 강조한 ‘국민교육헌장’을 정면 비판한 실천적 다짐으로 선언 2일 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등의 지지로 이어졌다. 민주주의에 뿌리박지 못한 교육은 정의로운 사회, 양심과 진실 그리고 인간적 품위를 존중하는 교육을 실현키 어렵다고 본 것이다. 다음은 교육지표의 4개항.


1.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교육,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 교육의 참 현장인 우리의 일상생활과 학원이 아울러 인간화되고 민주화돼야 한다.


2. 학원의 인간화와 민주화의 첫걸음으로 교육자 자신이 인간적 양심과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적 정열로써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들과 함께 배워야 한다.


3.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대한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며, 그러한 간섭에 따른 대학인의 희생에 항의한다.


4. 3·1정신과 4·19정신을 충실히 계승 전파하며 겨레의 숙원인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민족역량을 함양하는 교육을 한다.


1978년 6월27일 전남대학교 교수 일동 (김두진 김정수 김현곤 명노근 배영남 송기숙 안진오 이방기 이석연 이홍길 홍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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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김정섭("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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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3년 11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