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민주화운동] 33. 고문으로 짓밟힌 ‘민중·민주’ 교육사업
고문으로 짓밟힌 ‘민중·민주’ 교육사업
“오로지 인간을 위하여 하느님의 형상을 버리고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인간, 성자나 범인이나
신자나 불신자나 땅 위에 태어난 모든 인간을 차별없이 사랑해야 함을 의미한다. 참된 크리스천 운동이란 기독교단체의 이익이나 영광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이웃인 모든 인간을 위해 그것마저 감추고 버릴 수 있어야 한다.”(강원룡, ‘중간집단이란 무엇인가’)
‘크리스챤아카데미’는 한국사회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건강한 중간집단의 육성이 필요하다고 보고 이를 위한 사회교육
프로젝트를 1972년 그리스 크레타에 모인 세계기독교사회운동단체협의회에 보고한 후 이를 한국에서 시범적으로 시행할 수 있도록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요청한다. WCC의 지원을 받아 74년부터 우선 5개년 계획으로 교육을 실시한다. 독일 본에 소재한 개신교개발원조회의
기금을 끌어낸 박경서(현 인권대사)는 이듬해 아카데미 부원장으로 부임해 이 교육사업에 참여한다.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강원룡은 한국 사회구조의 병폐를 양극화로 진단했다. 이념과 체제의 양극화 외에도 소수 권력 특권층과 다수
국민대중, 도시와 농촌, 호화주택과 빈민촌, 기업주와 노동자, 남성 패권과 여성 등등. 이들 집단간의 양극화 현상을 해소하는 것이야말로
사회갈등을 치유하는 사활적 문제로 생각했다. 중간집단이란 ‘자율적·민주적 바탕 위에 형성된 집단으로 사회개혁에 관심을 가지며 민중의 편에 서서
힘을 조직화·동력화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양극화 사회의 화해와 통합에 기여하는 세력’을 의미했다. 주로 노동, 여성, 농민, 학생, 교회단체
회원을 수강생으로 하여 그 방면의 전문가들이 강사로 참여하면서 합숙 세미나와 강의 등 정규교육과 함께 현장 방문 및 교육, 소그룹 운용,
활동평가회로 후속교육을 이어나갔다.
이 교육의 각 분야 간사로 헌신적인 활동을 벌인 이는 신인령(현 이화여대 총장), 한명숙(환경부 장관), 이우재(국회의원),
장상환(경상대 교수), 김세균(서울대 교수), 정창렬(한양대 교수), 황한식(경남대 교수) 등으로 대학원을 마치고 막 강단에 선 신진
엘리트그룹이었다.
작은 키에 몸이 약해 약봉지를 끼고 살았던 신인령은 아카데미 교육활동에 전념하면서 기쁨과 벅찬 사명감으로 저절로 건강을 찾게
되었다. 그녀는 ‘최상의 윤리적 규범은 사랑의 법이다’ ‘자기 실현의 극치는 자기 희생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기독교윤리학의 거장 라인홀드 니버의
말을 그의 책(‘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이 아니라, 4박5일간 지속되는 수강생들과의 공동생활을 통해 체험한다. 한명숙은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남편이 서울대 상대의 ‘경제복지회’ 서클에 연루되어 감옥에 있었음에도 아카데미 교육에 몰두했기 때문에 외롭고 슬퍼할 틈이 없었다. 그녀는
봉함엽서 한 장에 깨알 같은 글씨로 옥중의 남편과 모든 사회현상에 관해 토론하고 교류하고, 그리고 그를 한없이 사랑했다.
이들 실무 간사의 열정은 점차 그 효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역사와 사회를 향한 새로운 의식에 눈을 뜬 수강생들은 각자의 일터로
돌아가 노조를 결성하기 시작했으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각종 조직을 건설했다. 중앙정보부는 마침내 이들을 향해 ‘용공 매도’라는 전가의 보도를
뽑아들었다.
맨 먼저 한명숙이 79년 3월9일 오전 10시, 중부경찰서 김형사라고 거짓신분을 말하는 중정 요원에게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다.
이후 간사 6명이 차례로 연행되었다. 그뿐 아니라 산업사회 교육 이수생이던 노조 여성지부장 최순영(YH무역), 이총각(동일방직),
박순희(원풍모방), 장현자(반도상사), 이영순(콘트롤데이타) 등이 끌려간 데 이어 마침내 3월27일 원장 강원룡이 중정으로 연행되었다. 이들이
연행된 후 중정은 압수수색영장도 없이 사무실과 집안의 모든 자료를 훑어갔다.
여성노조원 두어 명이 훈방된 이후에야 연행된 이들에게 실로 무섭고도 혹독한 고문이 가해진 사실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4월16일 중앙일간지들은 일제히 중정의 발표문을 그대로 받아 대서특필했다. ‘불법 용공서클 일당 검거’라는 제목 아래 소위
불온서적이라는 이상야릇한 증거물과 간사들의 사진을 내보냈다. 해외에서도 관심이 높아 WCC와 독일교회연합회, 유럽에큐메니칼연합, 미국연합장로교회
등에서 한국을 항의 방문하기도 했다.
구속자들의 고문 사실이 정식으로 폭로된 것은 변호인 반대신문이 있던 7회 공판이었다. “야전침대 각목을 무릎 사이에 넣고 양쪽에서
밟는가 하면 ‘간첩도 이렇게 4시간이면 다 분다’면서 담뱃불로 등을 지지고 벽에 세워놓고 가슴을 쳐 숨을 쉬지 못했다. 18일간을 쉬지 않고
당하니 차라리 죽고 싶었다. 거기다 지하 고문실에 끌고 간다는 협박이 숨을 멎게 했다”(이우재). “따귀를 얻어맞고 구둣발로차이고 각목으로
얻어맞고 지하실로 옮겨갈 때 자살하고 싶었다. 나는 거기서 완전히 항복했다. 그들이 불러주는 대로 쓰겠다고 빌었다”(한명숙). “발가벗기고
각목으로 패기 시작했다. 불러주는 대로 쓰지 않으면 계속 각목이 날아들었다”(장상환). “‘이북과 어떻게 접선했느냐. 난수표와 책자를
내놓아라’며 간첩 대하듯 했다. 발가벗기고 각목으로 치니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김세균).
이런 상태에서 이들에 대한 모든 혐의사실은 중정이 만들었고, 검찰은 이를 그대로 인정하여 법정 최고형을 구형했다. 검찰은 논고를
통하여 어처구니없게도 아카데미의 후원자인 WCC는 소련의 비밀경찰인 KGB(국가보안위원회)의 손아귀에 있다고 단언했다. 법원 역시 검찰과 호흡이
잘 맞아 9월22일 담당판사는 공소사실을 대부분 인정하여 징역 7년 등으로 형량을 듬뿍 얹어 선고했다. 각국 교회기관들이 정부에 공한을 보내고
학술원 원장 이병도를 비롯한 교수 137명이 용감하게도 용공혐의를 뒤집어쓴 정창렬의 석방진정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그래서인지 해가 바뀐 80년
1월, 항소심은 정창렬과 황한식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피고인 모두에게 1심에서 가장 큰 범죄였던 지하비밀서클 조직 부분에 대해서 무죄를
인정했다.
역설적이게도 재판부의 판결문은 아카데미 교육의 목적과 내용을 가장 잘 간추리고 있다. “아카데미는 궁극적으로 인간화의 실현을
이념으로 자유와 평등이 동시에 실현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심각한 양극화 현상을 해소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여
그 방법으로 노조, 여성, 농민, 학생, 종교, 언론 등 소위 중간집단을 육성 강화하고 때로는 압력을 통하여, 때로는 화해와 통합 기능을 통하여
양극화의 해소를 기한다는 전제 아래(…) 그들을 의식화시키는 과정에서 착취로부터 해방되고 권익이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식을 고취시키고 이들을 조직화시켜 사회주의 실현을 목적으로 했다”. 마지막 사회주의 운운한 부분을 뺀다면 이는 정확한 지적이다. 수사기관이
수사과정에서 무수하게 자행한 불법적 연행과 압수수색, 고문에 대한 당사자와 가족들의 절규를 검찰과 재판부가 철저히 외면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김정섭(" 미디어부 기자)
=-=-=-=-=-=-=
[출처 : 경향신문, 2003년 11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