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민주화운동] 36. YWCA 위장결혼식 사건
“유신잔당 음모 분쇄” 첫시위 불길댕기다
유신의 몰락. 최규하 권한대행의 ‘先대선 後개헌’ 담화. 민주화 실현 기대에 불길한 조짐이 보였다. ‘체육관선거를 막아라’
유신반대운동 제적생들이 주축인 ‘민청’은 통대선거 저지 국민선언 집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79년 11월24일 명동 YWCA 강당에서의 위장
결혼식. 유인물을 뿌리고 구호를 외치는 순간 ‘백골단’이 들이닥쳐 집회는 아수라장이 됐지만 종로2가·청계천에서의 가투는 성공적이었다. 계엄사는
140여명을 연행, 유신독재보다 더한 고문으로 18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했고 12·12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일당은 사법체계를 무시하고 이듬해
1월25일 전원에게 징역 3년 등을 선고했다.
서울 궁정동의 10·26 총성과 함께 유신독재가 종말을 고한 직후 대통령권한대행이 된 최규하는 박정희의 국장(國葬)이 끝났음에도
민주화 일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1979년 11월10일 그는 당시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통대)에서 대통령을 선출한
이후 민의를 수렴해 개헌을 하겠다는 원론적인 수준의 담화문을 내놓았다. 이는 매우 불길한 조짐이었다.
유신반대운동으로 감옥에서 청춘을 보낸 각 대학 제적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민주청년협의회(민청)’는 10·26 다음날 긴급
운영위원회를 소집했다. 조성우·이우회·최민화·이석표·김경남·이신범·이명준 등이었다. 그들은 모두 긴급조치 위반으로 징역을 3년 이상씩 살고 나온
학생운동 리더들로 10·26 직후,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예비검거를 피해 도망다니는 신세였다. 이들은 독재자 박정희의 국장을 저지하고 통대가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는 점에 의견을 모았다. 문제는 집회를 어떻게 여느냐는 것이었는데, 계엄하이기
때문에 일체의 대중집회가 불가능했으므로 궁리끝에 결혼식 형식을 빌리기로 했다.
토요일인 11월24일 오후 5시30분 서울 명동 YWCA 강당. 일시와 장소는 쉽게 합의되었으나 신랑·신부를 정하는 게 문제였다.
마침 민청 상임위원인 홍성엽이 신랑을 자청하고 나섰다. 홍성엽은 얼굴이 희고 고운 꽃미남형이었다. 신부는 가상 인물 윤정민으로 정하고 청첩장을
명함 크기로 제작해 널리 뿌렸다. 사건 당일 홍성엽은 진짜 신랑 못지않은 차림으로 나타나 하객을 맞았다. 300석 남짓한 강당도 모자라 복도까지
가득 메운 하객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긴장되어 있었다. 드디어 신랑이 입장하자 여러 곳에서 유인물이 빠르게 손에서 손으로 건네졌다.
“18년 장기독재에 결연히 저항해온 민주회복 투쟁이 그 최종적 승리를 눈 앞에 두고 있는 이 역사적 시점에 서서 오늘 우리는 아직도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선 대통령 선출, 후 개헌’이라는 기만적인 정치일정을 내걸고 유신독재의 연장을 획책하고 있는 유신잔당의 음모를
단호히 분쇄하고 민권의 승리를 확실히 보장하기 위한 전국민적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기 위하여 여기에 모였다.”(‘통대선거 저지를 위한
국민선언’에서)
결의문 낭독에 이어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회장 김정택이 상기된 얼굴로 ‘통대 선출 반대’ ‘거국내각 구성’ 등의 구호를
선창하는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뒤편 출입구로부터 의자와 사람이 한꺼번에 넘어지면서 강당은 수라장으로 변했다. “수백명의 날렵한 쥐색 잠바들이
뛰어들어 단상을 점거하고 대회장을 덮쳤다. 의자가 날고 비명이 들리고 유리창이 깨지고 곤봉에 피가 튀었다.”(이시영의 시 ‘역사의 눈’에서)
‘쥐색 잠바’는 바로 경찰이 고용한 백골단이다.
이 아비규환 속에서 큰 키에 안경을 쓴 지성인 풍모의 훤칠한 신사가 뭐라고 큰 소리를 한번 지르고 냉정한 눈으로 침착하게 성큼성큼
출구로 걸어갔다. 그 당당함 때문이었을까. 얼떨결에 백골단이 길을 터주었고 현기영·이호철·조태일·박태순·이문구·이시영 등 문인들이 그를 따라
재빨리 대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는 서울대 교수 백낙청이었다.
대회장을 용케 빠져나간 일부는 명동 입구 코스모스백화점 앞에서 이미 대기 중이던 민청의 양관수·이상익 등과 합세한다. 핸드마이크를
든 양관수가 번화한 명동 거리에서 “예수를 믿읍시다”라고 신호음을 외치자 ‘유신 철폐’ ‘통대선거 결사반대’ 고함이 울렸고 이들은 을지로 쪽으로
스크럼을 짠 채 200여m를 달려갔다. 같은 시각, 종로2가 화신백화점 앞과 청계천에서도 비슷한 시위가 벌어졌다. 대회장의 안쪽 팀과 바깥
팀으로 나누어 진행한다는 애초의 계획은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계엄사가 연행자 140여명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고문과 능욕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김병걸은 몽둥이와 군화발에
짓밟혀 정신착란을 일으켜 실려나왔으며 백기완은 고문 후유증으로 이후 수년간 입원해야 했다. 군인들이 저지른 처참한 고문은 여러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었다. 신랑 역을 자임한 홍성엽은 그 이후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처절한 고통과 맞서야 했다.
사건 발생 한 달 후인 12월27일 계엄사는 ‘양심과 명분의 그늘 속에서 탐욕을 드러낸 정치집회’라고 이 사건을 규정하고 관련자
가운데 18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이미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 일당이 권력의 핵을 공고히 다진 후였음을 이들 구속자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이듬해인 80년 1월25일 계엄군법회의는 피고인 전원에게 징역 3년 등의 중형을 선고한다. 피고인들과 변호인 이돈명·박세경·이세중은
비상계엄과 계엄포고령 1호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혼신으로 최후진술과 변론에 임했지만 이미 전두환 그룹의 손에 장악된 군법회의는 이를 간단히
묵살했다. 비상계엄과 계엄포고령 1호가 ‘당연 무효’라는 변호인들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비록 군법회의의 담장을 넘지 못했지만 3권분립이 제대로
된 정상적인 사회라면 법리상 숙고할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79년 10월27일 오전 4시에 선포된 비상계엄은 계엄법 4조 비상계엄 선포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하는
사변에 있어서 적의 포위공격으로 인해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된 지역’에 선포해야 하는데 단지 대통령 유고라는 단 한 가지 이유로 평온한 밤을
지난 새벽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이는 사법심사의 대상이다. 또 같은 날짜의 계엄사령관 포고령 1호는 대통령권한대행의 승인없이 발해진 것이므로
그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
관련자들은 이런 요지의 최후진술을 했다.
“현재의 비상계엄은 원인적으로 무효이다. 고문에 의한 허위 진술은 법정 기록이 될 수 없다. 이 재판 자체가 부당하며 역사는
우리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임을 확신한다.”(이우회) “긴급조치 9호로 4년 징역을 살고 나왔다. 민주사회 건설을 위해 질경이와 같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좌절과 고난을 이기겠다.”(최열) “유신을 비호해 온 세력은 헌법 개정의 주체가 될 수 없다. 10·26이 아니었더라도 박정권은
80년대에는 도저히 존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백기완) “유신은 거짓과 허구의 역사이다. 우리 당대에 이 치욕을 바로잡지 않으면 다음 세대가
고통을 받는다.”(임채정) “보안사에서의 고문에 경악한다. 수사받을 때 입은 우리의 군복은 피와 군화 발자국으로 범벅이 되었다. 우리 모두 귀와
눈, 입이 찢어졌으며 손발이 짓이겨졌다.”(이상익) “이런 훌륭한 청년들이 있는 한 한국의 앞날은 희망이 있다. 치욕적 유신을 반대하는 애국자를
고문한 자들의 처벌을 요구한다.”(윤보선)
이들은 모두 감옥 안에서 ‘서울의 봄’과 5·17 소식을 접했다. 대법원은 80년 8월26일 군법회의 그대로 형을 확정한다. 세칭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은 긴급조치 시대를 지나면서 대부분의 조직이 와해된 폐허 위에서 민청이 중심이 되어 조직적으로 집회와 시위를 결행한
유일한 경우이다. 이 소수정예 중심의 조직운동은 이후 80년대에 진입하면서 전국적인 조직화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 엄혹한 암흑기에 인간의 한계를
이겨낸 투혼을 역사는 잊지 않으리라.
=-=-=-=-=-=-=
신군부의 총칼 다시온 암흑기
1979년 10월 박정희의 사망으로 유신체제가 종식되면서 이제 이 나라에도 민주주의의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그러나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면서 정국은 다시 안개 속으로 빠져들었다. 학내민주화에만 열중하고 있던 학생들이 사회민주화투쟁의 전면에 나선 것은
12·12사태의 주역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하면서부터였다. 80년 5월13일 가두로 진출한 학생들의 민주화투쟁은 15일 서울역 앞
시위에서 정점을 이루었으나 17일 신군부의 비상계엄확대조치로 ‘서울의 봄’은 허무하게 끝났다. 광주에서는 전 시민이 궐기해 전두환의 쿠데타에
온몸으로 저항하며 맞섰다. 그러나 광주 시민들의 투쟁도 무수한 죽음과 한만을 남긴 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81년 봄 학림 세력이 주도가 되어 전개한 일련의 학생 시위를 통해 학생운동권은 총칼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광주사태의
와중에 미국이 보여준 행태는 미국이 과연 이 나라 민주세력의 벗인가 하는 심각한 의문을 던져주었다. 82년 3월17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관련자 중 한 명을 가톨릭 신부가 숨겨준 사실이 드러나 사건은 가톨릭과 정부간 정면 충돌 양상으로 발전했다.
=-=-=-=-=-=-=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김정섭(" 미디어부 기자)
[출처 : 경향신문, 2003년 12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