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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민주화운동] 40. 광주항쟁 - 들불야학팀

*미카엘* 2005. 3. 2. 18:18

한톨의 들불 ‘시민혁명 광야’를 태우다

 


1980년 5월18일 오전 9시 광주 전남대 정문 앞으로 학생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다. 교문을 봉쇄하고 있던 공수부대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대치 속에서 어느덧 학생들의 수는 200~300명에 이르렀다. 이윽고 학생들 사이에서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 해제” 등의 구호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돌격 앞으로” 하는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공수부대가 앞으로 돌진하면서 쇠심이 박힌 살상용 특수 곤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광주민주항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공수부대의 잔인무도한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이 대거 가담하면서 시위는 민중봉기 차원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그 시위대 속에는 ‘들불야학’ 강학(講學·교사를 이르는 말로,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뜻을 담고 있음)인 윤상원·박용준·김영철도 있었다.


19일이 되었다. 윤상원을 비롯한 들불야학 강학들이 광천동 소재 야학당으로 모여들었다. 강학들은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했다. 토론 끝에 학살과 저항의 실상을 알리고 투쟁을 효과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선전홍보활동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곧이어 2인 1조가 되어 시내 전역에 선전물을 배포하기 시작했다. ‘투사회보’는 이렇게 탄생했다. 투사회보라는 이름으로 선전물이 나온 것은 21일부터였다. 투사회보가 배포되면서 광주 시민들은 사태의 진상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투쟁구호, 차량의 임무, 보급문제, 사체 운반 등에 대해 분명한 지침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투사회보가 광주 시민들의 투쟁의지를 한 방향으로 조직한 것이다.


윤상원이 들불야학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78년 10월 중순께였다. 50년 전남 광산군 임곡면에서 태어난 그는 78년 2월 전남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주택은행에 취직해 서울 봉천동지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 속에는 항상 핍박 속에 신음하는 이 땅의 민중 생각뿐이었다. 78년 6월 전남대 교수들이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한 뒤 구속되고 이어 대대적인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분연히 직장에 사표를 내고 광주로 내려왔다. 이어 그는 광천공단(당시 지방공단으로 지금의 광천터미널 일대)의 한남플라스틱이란 회사에 신분을 속이고 일당 노동자로 취업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활동하고 있던, 나중에 그의 영혼상의 반려자가 된 전남대 후배 박기순을 만나 들불야학에 합류한다.


들불야학은 78년 7월 전남대의 박기순·신영일 등이 광천동 천주교회 교리실을 학당으로 해 노동자들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기 위해 만든 노동야학이었다. 윤상원은 아예 자취방까지 광천동 시민아파트로 옮겨 그곳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그의 동지 김영철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윤상원보다 두 살 많은 김영철은 전남 순천 출신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호남 명문인 광주일고를 졸업했으나 가난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중 78년부터 광주YWCA 신용협동조합 참사로 근무하면서 광천동 시민아파트 주민지역발전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광천동 시민아파트는 말이 아파트지 판자촌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던 중 광천동 성당 교리실에 야학이 생겨 학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또한 강학으로 들불야학에 합류했다.


박용준은 고아 출신이다. 대부분의 고아들처럼 여러 번 가출해 구두닦이도 하고 중국집 배달원도 하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던 박용준은 18세가 되던 73년 광주YWCA 신용협동조합 교도원으로 취직했다. 그리고 76년 1월 신협 지도자 강습회에서 김영철과 처음 만난다. 박용준도 김영철을 따라 들불야학에 강학으로 참여한다.


80년 5월21일 온갖 만행을 자행하던 공수부대가 금남로에 모여 있던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한 뒤 퇴각했다. 수백명의 사상자를 낸 4일간의 처절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광주가 해방된 것이다. 그러나 이 해방 공간은 폭풍전야의 고요함 같은 것이었다. 계엄군은 철통같이 광주를 에워싸고 있었다. 진입은 시간문제였다. 일부 그룹은 총기를 반납하고 협상을 통해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으나 윤상원은 죽음을 각오한 ‘사수 항쟁’만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고 설득했다. 마침내 25일 밤 ‘민주시민투쟁위원회’가 조직되어 결사항전의 준비를 갖추었다. 이 항쟁지도부에서 윤상원은 대변인, 김영철은 기획실장을 맡았다.


26일 밤 상무대 근처 주민들로부터 군인들이 항쟁지도부가 있는 전남도청에 진입하기 위해 저녁 회식으로 돼지고기 파티를 했다는 제보가 줄을 이었다. 긴장 속에서 투쟁위원회도 시민군을 도청과 YMCA, YWCA, 그리고 시내 요소마다 배치했다. 27일 새벽 1시 야음을 틈타 계엄군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M16 소총은 연신 ‘드르륵 드르륵’ 소리를 울려댔고 시민군의 M1 소총은 간혹 ‘땅 땅’ 할 뿐이었다.


새벽 4시 도청 북동쪽 무등산이 보이는 방향 창틀에서 윤상원과 김영철은 총구를 밖으로 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잠시 후 뒷담을 넘어 온 공수대원의 총격이 윤상원의 복부를 관통했다. 김영철이 윤상원을 부축했으나 윤상원은 “저승에서 만나서도 동지애를 나누며 살자”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곧 운명했다. 김영철은 계엄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같은 시각 박용준은 YWCA에 있었다. 희뿌옇게 동이 터오는 새벽 계엄군이 YWCA에 총격을 가했다. 박용준은 3층 바닥에 엎드려 응사했다. 그때 YWCA 3층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일빌딩 5층쯤 되는 곳에서 계엄군이 박용준을 향해 M16을 발사했다. 운명하기 전날인 26일 박용준은 나중에 발견된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의 피를 원한다면 하느님, 이 조그만 한 몸의 희생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희생하겠습니다. … 하느님,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양심이 그 무엇입니까? 왜 이토록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십니까?”


김영철이 끌려간 곳은 상무대 영창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박용준의 소식을 듣고 자살을 결심했다. 먼저 왼손 동맥을 끊으려 했으나 실패하자 화장실 콘크리트 모서리 벽에 온몸을 던져 이마를 세 번 부딪쳤다. 계엄군은 그의 겉 상처만 봉합하고 말았다. 2개월이 지난 뒤 그의 말과 행동에서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정상적인 치료를 받지 못했다. 81년 12월 김영철은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예전의 건강한 모습은 이미 잃은 지 오래였다. 98년 8월16일 정신병원을 전전하던 그는 간식으로 먹은 빵 한 조각이 기도에 걸린 것이 원인이 되어 결국 이 세상을 떠난다. 18년 만에 사랑하는 동지 윤상원과 박용준의 곁으로 간 것이다.


82년 2월20일 광주 망월동 구묘역에서는 윤상원과 들불야학 활동 중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열렸다. 그리고 6월 소설가 황석영의 집에서 이 결혼식을 기리는 노래극이 공연되었다. 이 노래극에는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를 김종률이 작곡한 다음 노래가 들어 있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끝없는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님을 위한 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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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김정섭("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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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1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