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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민주화운동] 45. 서울대 무림사건

*미카엘* 2005. 3. 2. 18:21

서울대 무림사건
  
 
1980년 12월11일 마침내 서울대에서 데모가 터졌다. 5월15일 서울역에서 ‘회군’한 이래 전두환 일파의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와 광주의 살육 만행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던 서울대생들이 드디어 전두환 독재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데모를 주동하고 경찰에 끌려가는 남명수(현 출판사 운영)의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시원섭섭’이었다. 데모가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아 섭섭했지만 그간의 지긋지긋한 논쟁에서 이제 해방됐다고 생각할 때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80년 9월 오랜 휴교 끝에 개강하면서 서울대 운동권 내부는 격렬한 논쟁에 휩싸여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쟁점은 서울역 회군 문제였다. 서울역에서 회군한 학생들은 이틀 후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 계엄 확대 조치를 지켜보아야만 했다. 학교가 봉쇄되면서 아무런 저항의 수단을 갖지 못한 것이다.


서울역 회군 결정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믿어지는 당시 총학생회장 심재철(한나라당 의원)과 그 배후로 짐작되는 학교내 이념서클 한국사회연구회(이하 ‘한사’) 그룹에 대한 성토의 목소리가 또다른 이념서클 흥사단아카데미(이하 ‘아카데미’) 그룹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이념서클 조직을 장악하고 있던 ‘한사’ 중심의 이른바 ‘언더(under·총학생회 등 공식적인 조직을 사실상 지휘하는 일종의 지하조직)’ 지도부는 80년 5월 실패의 원인을 민중역량의 미성숙에서 찾으며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한 술 더 떠 “데모만이 능사가 아니다. 학생운동은 민중역량의 강화를 위해 헌신해야 하며 노동자·농민을 조직하기 위해 집단적·조직적으로 노동현장에 침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직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불필요한 시위는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쟁이 점점 더 격렬해지면서 이제는 감정의 골까지 깊어졌다. 아카데미 그룹은 언더 지도부가 쥐고 있던 이념서클 조직에 대한 통제권을 약화시키려 하부 구성원들에 대한 개별 접촉을 시작했고, 언더 지도부는 이를 막기 위해 조직 단속을 더욱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서로간에 매터도까지 횡행했다. 아카데미 쪽이 데모를 강행하려고 하면 언더 지도부는 동원을 거부하고 정보를 흘리는 등의 방법으로 이를 저지했다. 80년 2학기 내내 외견상 언더 지도부의 통제는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광주의 살육을 기억하고 있는 학생 대중 사이에서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즉각적인 항전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만 갔다. 조직 보존과 노동현장 진출이라는 논리로 데모를 전면적으로 통제하고 있던 언더 지도부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면서 마침내 언더 지도부도 데모를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12월11일의 데모는 그 결정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제 남명수에게 남은 것은 얼마가 될지 모르는 징역살이를 하는 것뿐이었다. 힘들긴 하겠지만 선배들도 다 그런 과정을 겪었으니 자신도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을 것이었다. 다만 현무환(웅진미디어 대표)이 자신에게 당일 현장에서 살포하라고 건네준 유인물 초안이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과격하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으나 별 탈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명수의 기대와는 달리 전두환 정권은 당일 데모 현장에서 살포된 ‘반파쇼학우투쟁선언’의 내용을 즉각 문제시하고 나섰다. 12월13일 각 신문들은 사회면 톱으로 서울대 학생시위가 민주질서를 부정하고 좌경화했다고 보도했다. 15일에는 이례적으로 유인물 내용을 전면 공개한 후 각계 반응까지 게재했다.


‘반파쇼학우투쟁선언’ 중 “우리의 적은 누구이며 그들의 본질은 무엇인가. … 국내 매판 지배세력으로서 국내 매판 독점자본과 매판 관료집단, 매판 군부 등이 바로 그들이다. 또 매판 파쇼정권을 지지하는 미국이나 그 대리인 일본은 우리의 영원한 우방일 수 없다” “우리 운동의 궁극적 과제는 민중이 주체가 되는 통일민족국가의 수립이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수탈체제에 의해 기본적 생존권조차 부정당하는 노동자, 농민 등 근로대중과 진보적인 지식인 세력이 스스로를 조직화하여 외세와 국내 매판 지배세력을 이 땅에서 완전히 축출하고 일체의 분단조건을 분쇄하여 궁극적으로 민족의 통일을 성취하는 위대한 민중투쟁의 승리를 의미한다”는 등의 내용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계급투쟁에 의한 폭력혁명을 주장하고 있으며, 논리전개 방식이 유물론적 변증법과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이어 데모 주동자들에 대한 혹독한 고문과 대대적인 조사가 시작됐다. 데모의 배후세력이 혹시 전년 가을에 발각된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잔존세력이 아닌가 의심한 경찰은 집요하게 배후를 캐물었다. 원래 선언문은 다른 사람이 작성한 것으로 말을 맞춰 놓았으나 계속되는 고문과 신문 속에 이는 곧 깨지고 말았다. 남명수는 유인물 작성자로 현무환과 김명인(문학평론가)을 지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곧이어 김명인이 경찰에 연행됐다.


김명인이 연행된 후 사건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번져 나갔다. 김명인의 입에서 이른바 77학번(77학년도에 입학한 학생들) 언더 지도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사건은 이제 좌경 유인물 사건에서 서울대 학생운동 전체 조직사건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77학번뿐만 아니라 78학번 언더 지도부의 명단도 경찰에 입수됐다. 나중에는 서울대 학회 전체 현황과 그 구성원 명단까지 드러났다. 70년대 긴급조치 9호의 엄혹한 조건 하에서 학생운동의 원활한 전개를 위해 조직한 학회와 그 학회간 연락체계, 의사결정 방법 등이 모두 밝혀진 것이다. 언더 지도부란 각 학번별로 이들 학회를 대표하는 학생들간의 모임으로 데모의 시기와 방법, 조직 동원 등을 의논하던 협의체였다. 80년의 학생운동은 당시 4학년이던 77학번 언더 지도부에서 이끌었다.


이어 학회 회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뒤따랐다. 모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학회 선배·동료·후배들에 대한 사항을 진술할 것을 강요받았다.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도 소용없었다. 이미 경찰에서 명단을 다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만 더 맞을 뿐이었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에 관련돼 제적됐다가 80년에 복학한 73학번 박용훈(대학생)이 끌려간 것은 12월24일이었다. 그는 12월11일 데모가 문제가 되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자기에게까지 불똥이 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80년 9월 당시까지 77학번 언더를 지도하고 있던 76학번 이원주(회사원)가 군대에 가면서 그에게 대신 77학번을 지도해 줄 것을 부탁해 현무환·김명인·최영선(신문기자) 등을 한 두 차례 만난 적은 있었으나 그것은 선후배간의 일상적인 만남이었지 배후라거나 지도라거나 할 성질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77학번 언더의 지도자로 지목됐고 경찰은 그를 데모의 배후로 규정했다. 박용훈은 또 다시 징역을 살아야만 했다.


뜻밖에 서울대 학생운동 조직의 실체를 파악하게 된 경찰은 이 사건을 ‘무림(霧林)’이라고 이름지었다. ‘림(林)’이란 조직사건을 뜻하는 경찰 내부의 용어였고 ‘무(霧)’는 안개로, 안개 속에 있던 서울대 학생운동 조직이라는 뜻이었다. 그동안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서울대 학생운동 조직의 전모를 파악한 경찰은 이어 뒷마무리 작업에 착수했다. 경찰은 남명수 등 9명을 구속하고 90여명을 군대로 보냈다.


서울대 학생운동 조직을 일거에 ‘소탕’한 경찰은 이제 당분간 서울대 안에서 데모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었음이 밝혀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81년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계속 데모가 터져나온 것이다. 무림이 빠진 그 공백을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학림(學林)’ 세력이 대신한 것이다. 그것도 훨씬 전투적이고 조직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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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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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2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