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민주화운동] 51. 질풍노도, 승리를 거머쥐다
질풍노도, 승리를 거머쥐다
1983년 12월2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전국 대학 총학장회의에서 문교부 장관 권이혁은 뜻밖의 조치를 발표한다. 80년 5·17
이후 학원사태와 관련해 제적된 학생들 중 잘못을 깊이 뉘우치는 사람에 대해 84년 1학기를 기해 복교를 허용하고, 지금까지 처벌 위주의
학원대책을 선도 위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이튿날인 22일 학원사태로 수감 중이던 학생 131명이 석방됐다. 학원자율화 조치로 상징되는 유화
국면이 시작된 것이다.
이같이 유화정책으로 전환한 데에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야 한다는 전두환 정권의 절박한 노림수가 있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때까지의 강경 일변도 학원 대책으로는 이미 학원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상황인식 때문이었다. 5·17 이후 83년
12월까지 학원사태로 제적당한 학생은 전국 65개 대학, 총 1,363명이었다. 이는 유신 7년 동안 제적된 학생(786명)의 두 배에 달했다.
제적생 수는 80년 538명, 81년 300명, 82년 198명, 83년 327명으로 83년 들어 급증했다. 학생 시위도 81년 56건, 82년
40건, 83년 134건으로 역시 83년 들어 크게 늘었다. 83년은 방학과 쉬는 날을 빼면 거의 매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학생 시위가
만연한 해였다.
전두환 정권은 학생운동에 대해 강경대응이냐, 근본적인 정책전환이냐를 놓고 선택의 기로에 섰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전자가
불가능하다면, 전정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유화적인 제스처밖에 없었던 셈이다.
12·21 복교 허용조치에 대해 당사자인 제적생들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84년 1월4일 서울대·성균관대를 비롯한 서울지역 13개
대학 제적 학생 명의로 발표된 ‘제적 학생 복교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란 성명서를 통해 제적생들은 12·21조치가 결코 정부로부터 받은
‘은전’이 아니라 그동안 빼앗겼던 ‘배울 권리의 정당한 회복’이란 입장을 나타냈다.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학원문제 해결을 위해 사회의 민주화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추방된 교수들의 복직과 해고된 언론인·노동자들의 원직 복귀도 함께 요구했다.
제적생들에게 12·21 조치는 그동안 전두환 정권 하에서 빼앗겼던 모든 민주적인 권리를 되찾기 위한 또 다른 투쟁의 시작이었다.
이어 1월14일 서울대를 필두로 각 대학에서 제적생복교대책위원회가 구성됐고 마침내 1월25일에는 경인지역 20여개 대학을 중심으로
경인지구복교대책위원회(복대위)가 결성돼 의장으로 고려대의 서원기, 부의장으로 서울대의 이우재가 선임됐다.
문교당국과 경찰은 제적생 전원 무조건 복교를 주장하는 복대위의 요구와 달리 제적생의 선별 복학을 강행하는 한편, 언론을 동원해 제적
학생들을 좌경용공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중앙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은 제적 학생들의 요구를 “학원 복귀 자체를 도외시하고 복교조치를 정치투쟁의
기회로 삼으려 할 뿐 아니라, 신학기 대학가를 좌경이념 투쟁장으로 삼으려 하는 것”으로 매도했다.
3월 신학기가 시작됐으나 복교한 학생은 전체 1,363명 중 482명에 불과했다. 학교당국은 복대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제적생들은
해직된 교수들의 복직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학생들만의 선별적인 복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모처럼 전두환 정권이 큰 선심이나 베푸는 듯이
내민 학원자율화 조치는 시작부터 엉망이 됐다.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재학생들이 12·21조치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나섰다. 학생들은 우선 학원민주화에 주력했다. 5·17 이후
학생회는 해산됐고 대신 학도호국단이 들어선 상태였다. 민주화운동에 관심이 많은 이른바 ‘문제 학생’들은 학교당국에 의해 지도휴학을 당하고 강제
징집됐다. 강제 징집된 학생들은 복무 기간 중 항상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으며 ‘녹화사업’이라는 미명 아래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세뇌교육을 받고
동료 학생들을 밀고할 것을 강요당했다. 그 과정에서 한희철·이윤성·김두황 등 6명의 학생이 보안사령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학생들은 학원민주화의 핵심 사항으로 우선 강제 징집의 철폐를 주장하고 나섰다. 5월4일 고려대에서 고려대·서울대 등 6개 대학
5,000여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강제 징집돼 군 복무 중 사망한 6명의 학생들에 대한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위령제가 끝난 후 학생들은
경찰과 대치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인 뒤 도서관에 들어가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한편에서는 학생운동의 대중적 기초를 세우기 위한 학생회 부활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84년 9월20일 고려대에서 최초로 총학생회가
부활돼 김영춘(현 열린우리당 의원)이 학생회장으로, 허인회가 부회장으로 선임됐다. 이어 서울대·연세대 등 전국 9개 대학에서 총학생회가
건설됐다. 문교부는 학생회 부활에 제동을 걸려고 했으나 터진 봇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85년이 되면서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학생회가
건설됐다.
학원자율화 조치를 발표하면서 전두환 정권은 학내에 상주하던 경찰을 철수시키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정복이 사복으로 대체되고
공공연하던 것이 은밀하게 변했을 뿐이었다. 84년 9월17일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창립총회에서 정보 수집활동을 벌이던 가짜 학생이 발각됐다.
학생들은 이들이 정보기관의 프락치라고 주장했다. 전두환 정권은 가짜 학생 색출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폭력사건을 빌미삼아 복학생
유시민(열린우리당 의원)을 구속하는 한편 9명의 학생을 지명수배했다.
그리고 10월24일에는 총학생회장 이정우(변호사) 등 학생회 간부에 대한 제명 조치에 항의해 중간고사를 거부하고 나선 서울대에 경찰
병력 6,000여명을 투입했다. 전투경찰이 학내에 진주하는 상황에서 학원 자율은 존재할 수 없었다. 결단인 양 내세웠던 12·21 학원자율화
조치는 이로써 종말을 고했다. 그것은 존재해서는 안될 전두환 정권의 비극적 숙명이었다. 대학가는 또 다시 시위, 경찰 투입, 구속, 제명의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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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 87년 6월항쟁 폭발
1983년 12월 전두환 정권은 제적생의 복교 허용을 포함한 일련의 유화조치를 발표한다. 민주화운동권은 이를 이용해 운동공간 확보에
나선다.
83년 9월 학생운동권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한 민주화운동권은 이후 부문별·지역단위 운동권
단체들을 조직했다. 이를 기반으로 85년 3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결성된다.
민통련은 민주화운동을 대표해 양김씨와 더불어 본격적인 민주화투쟁에 나섰다. 85년 2·12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함으로써 민주화
열기는 한층 고조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태어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범민주세력을 총망라해 87년 6월항쟁을 이끌어낸다.
이 시기 학생들의 투쟁은 빛났다. 학생회를 재건한 학생들은 전국학생총연합과 같은 전국 조직을 건설해 85년 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
86년 건국대 사건과 같은 선도적인 투쟁에 헌신했다.
학생들은 노동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85년 4월 부평 대우자동차 파업과 85년 6월 구로공단 연대파업은 학생운동 출신의
노동운동가들이 중심이 돼 일으킨 것이었다.
학생뿐만 아니라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호주에서 소를 대량 수입하면서 소값이 폭락하자 농민들도 소를 몰고 시위에 나섰고, 서울
상계동·사당동 일대 도시 빈민들도 일방적인 철거에 항의해 반정부 투쟁에 동참했다.
전두환 정권은 더욱 가혹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87년 1월 정권의 야만적 폭력에 의해 서울대생 박종철이 목숨을 잃었다. 더이상
젊은이들의 목숨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퍼지면서 시민들이 거리 시위대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87년 6월29일 마침내
6·29선언이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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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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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4월 0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