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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민주화운동] 52. 민청련 출범

*미카엘* 2005. 3. 2. 18:26

민청련 출범

 


5·17이후 민주화운동이 와해된 상황에서 1982년 12월 학생운동권 출신을 중심으로 단체 재건 의견이 모아졌다. 학교별·학번별 합의를 유도하고 노동자·농민 등 대중운동 역량을 아우르는 새로운 청년단체를 모색했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 83년 9월30일 돈암동 상지회관에 모인 이들은 오랫동안 노동현장에 몸담아 온 김근태를 의장으로 선임했다. 조직을 철저히 숨기며 가열찬 투쟁으로 5共정권에 맞섰다. 자신의 몸을 먹히면서 독으로 뱀을 죽이고 그 양분으로 새끼들을 부화시키는 두꺼비와 같은 처절한 희생을 각오했다. 전두환 정권은 민청년 공세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김근태 살인적 고문과 박종철군 고문 살해. 마침내 민중의 분노는 폭발했고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불길을 헤치고 물속을 헤엄치고/ 가시밭 돌무덤 바위산을 뚫고서/ 모두들 여기까지 달려왔구나/ 온 나라에 울려퍼지는/ 노래 크게 외쳐 부르면서”(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 창간호에 실린 시인 신경림의 시 중에서)


1983년 9월30일 저녁 7시 서울 성북구 돈암동 소재 상지회관으로 긴장된 모습의 젊은이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모두들 “등에는 깊은 이빨 자국/ 이마와 손바닥엔 아직 피 붉은 채”였다. 얼마 후 경찰이 출동해 상지회관을 철통같이 봉쇄하고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속속 연행했으나 이미 회관 안에는 40~50명의 청년들이 집결한 후였다. 열띤 분위기 속에서 전두환 정권의 그 어떤 탄압에도 “끝내 흔들리지 않을 깃발/ 저 하늘 높이 세울” 것을 결의하고 의장에 김근태(현 열린우리당 의원)를 만장일치로 선임함으로써 일단 이날 모임은 끝났다. 민주화운동 역사에 찬연히 빛나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은 이렇게 탄생했다.


민청련의 출범은 78년 5월 결성된 민주청년인권협의회(민청협)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성우·정문화·장만철(영화감독 장선우)·양관수·문국주 등 학생운동과 관련해 옥고를 치른 청년들이 중심이 돼 결성한 민청협은 70년대 말 종교단체를 제외하고는 공개적인 민주화운동단체가 전무했던 시절, 최초로 정치권이나 종교권과 무관하게 학생운동 출신들만으로 건설한 공개적인 민주화운동단체였다.


그러나 정치투쟁을 우선으로 삼은 민청협은 노동자·농민 등 대중운동 역량의 강화가 우선(현장론)이라는 당시 학생운동권 내부의 지배적 분위기로 인해 운동권 내부의 폭넓은 지지는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79년 11월24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속칭 ‘YWCA 위장결혼식 사건’)로 민청협 지도부가 대거 구속·수배되고 이어 80년 5·17쿠데타가 발생하면서 민청협은 사실상 와해상태에 있었다.


82년 12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 수감된 전 민청협 의장 조성우가 출소하면서 민청협 재건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조성우·이명준·이해찬·이범영·박우섭 등이 중심이 된 이들 그룹은 5·17 이후 민주화운동이 전부 와해된 상황에서 학생운동 출신 청년들을 기반으로 시급히 공개적인 민주화운동단체를 건설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다만 문제는 지난날 민청협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선 학생운동 출신들의 광범한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조직을 서두르지 않고 각 대학별·학번별로 합의를 유도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운동권 내의 주도적 흐름의 하나였던 현장론자들의 회의적인 우려도 적지 않았으나 83년 상반기를 넘어가면서 학생운동 출신 청년들이 중심이 된 공개적인 민주화운동단체가 필요하다는 데 대략적인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 중 이와는 별도로 경북대 출신 정화영, 국민대 출신 장영달 등이 중심이 돼 추진하던 또 다른 청년단체 건설론도 합류하게 됐다. 마지막 남은 문제는 이 단체를 누가 이끌어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의장으로 맨 먼저 거론된 사람은 조성우였다. 그러나 전 민청협 의장 조성우로는 지난날의 민청협과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데 한계가 있었다. 특히 학생운동권 내부의 지배적 흐름이었던 현장론을 포용하는 데도 문제가 있었다. 또한 조성우 본인도 극구 사양하고 있었다. 새롭게 건설되는 청년단체는 현장론도 함께 아우를 수 있어야만 했다.


여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오랫동안 노동현장에서 몸담고 있었던 김근태였다. 김근태 본인은 완강히 고사했으나 결국 새로운 청년단체의 대표로 김근태가 결정됐다.


민청련은 외형적으로는 공개적인 민주화운동단체였다. 그러나 민청련은 그 회원 구조를 공개하지 않았다. 전두환 독재정권 아래서 회원 조직까지 공개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조직을 통째로 먹으라고 내놓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민청련 회원들은 계반 또는 기대라고 하는 각 대학별·학번별 모임에 참여해 주요 안건을 논의하고 회비를 납부했다. 그리고 집행부의 지시에 따라 각종 투쟁에 참가했다. 85년 전두환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에도 민청련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회원 구조 덕분이었다. 이러한 탓에 민청련 관계자들은 스스로를 반공개단체라고 규정했다.


민청련은 조직의 상징물로 두꺼비를 내세웠다. 예로부터 전해오기를 두꺼비는 알을 품으면 뱀을 찾아 나선다고 했다. 뱀을 만난 두꺼비는 자신을 잡아먹으려면 잡아먹어보라고 뱀의 성질을 돋운다. 두꺼비를 잡아먹으면 독 때문에 자신도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뱀은 화가 나도 참으며 두꺼비를 무시하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참다 못한 뱀이 두꺼비를 잡아먹고 만다. 뱀은 그 자리에서 죽게 되고 두꺼비 몸 속에 있던 알들은 뱀을 양분으로 삼아 부화해 뱀의 몸을 뚫고 나온다. 두꺼비는 자신의 몸을 희생해 새끼들을 키우는 것이다.


민청련은 자신이 언젠가는 뱀(전두환 정권)에게 잡아먹혀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자신의 죽음을 양분으로 삼아 이 땅의 민중들이 압제와 착취의 사슬을 깨고 분연히 일어설 것을 기대한 것이다. 실로 처절한 각오였다.


민청련이 출범하면서 민주화운동은 새로운 활력을 띠기 시작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파고다빌딩에 자리잡은 민청련 사무실은 민주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의 사랑방이었다. 84년 5월에는 그동안 남몰래 찾아가곤 했던 광주 망월동 5·18묘소를 공개적으로 참배해 광주 문제가 아직 끝난 것이 아님을 천명했다. 84년 3월부터 발간되기 시작한 기관지 ‘민주화의 길’은 활동가들에게는 운동의 이론과 지침을 전달해 주었고 대중에게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각종 소식과 전두환 정권의 잔혹한 탄압상을 알려주었다.


노동현장에서 악덕 자본가와 독재정권에 의해 탄압받고 수탈당하는 노동자들은 민청련의 연대·지원 속에서 자신들이 혼자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고 상호간 굳건한 연대가 형성됐다. 5·17 이후 침묵하고 있던 재야 원로들도 다시 민주화운동에 속속 복귀했다. 마침내 민청련은 이를 기반으로 각 부문 운동을 아우르는 광범한 민주화운동 전선체 ‘민중민주운동협의회’를 추동해냈다.


민청련은 상도동(전 대통령 김영삼 중심의 정치계파)과 동교동(전 대통령 김대중 중심의 정치계파)에 버금가는 민주화운동의 한 축으로서 굳건히 자리를 잡게 됐다.


그러나 민청련 활동이 커지면 커질수록 정권의 탄압도 점점 심해졌다. 출범 때부터 민청련 간부들을 불법 연행하는 것으로 맞섰던 전두환 정권은 민청련 현판을 떼어내고 사무실을 수시로 봉쇄하는 한편 출입자들을 불법으로 검문하고 연행했다. 계속되는 민청련의 공세에 정권은 점점 이성을 잃어갔다.


집행부 간부들은 경찰에 수시로 구타당하고 경찰서 유치장을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들어야만 했다. 83년 11월23일에는 김근태와의 개별 면담을 제의한 안기부 수사국장 성용욱이 회담 도중 김근태를 피투성이가 되도록 구타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태어날 때부터 광주사태라는 원죄를 갖고 태어난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민청련의 활동을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었다.


뱀은 독이 있는 줄 알면서도 두꺼비를 잡아먹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으로 몰렸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85년 9월 김근태·이을호 등 민청련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착수했다. 이어 살인적인 고문을 가했다. 요는 김근태가 공산주의자이고 민청련은 공산혁명을 의도한 단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근태에게 가한 살인적인 고문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정권의 의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두꺼비를 잡아먹은 뱀은 이제 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제 정신을 잃은 전두환 정권은 김근태가 고문을 당한 바로 그 곳,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박종철이라는 꽃다운 젊은이를 고문으로 살해했다.


그러자 마침내 껍질을 깨고 뛰쳐나온 거대한 민중의 물결이 거리를 누볐다. 6월 항쟁이었다. 두꺼비를 잡아먹은 뱀의 몸 속에서 마침내 수많은 두꺼비의 알들이 깨어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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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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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4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