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민주화운동] 53. 민통련 영광과 좌절
민통련 영광과 좌절
1983년 9월 민청련 출범은 5·17 이후 침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민주화 운동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민청련
출범에 자극받은 각 부문운동은 자신들의 운동조직 건설에 착수했다. 84년 3월10일 8백만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민주사회를 건설할 것을
목적으로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가 세워졌고, 4월14일에는 ‘민중문화운동협의회’가 창립돼 참다운 민중문화와 분단 극복의 문화를 건설할 것을
다짐했다. 이어 12월19일에는 해직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결성됐고, 85년 5월4일에는 불교인들이 중심이 돼
‘민중불교운동연합’이 건설됐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도 조직을 재정비했으며 가톨릭농민회 등 농민단체들도 심기일전하고 나섰다.
지역에서도 민주화운동단체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84년에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8월27일),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11월8일),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11월19일), 85년에 민주통일국민회의 경북지부(1월31일), 충남민주운동협의회(2월4일), 부산민주시민협의회(5월3일)가
잇달아 결성됐다. 민주화운동은 부문과 지역에 걸쳐 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질풍처럼 진행된 조직작업에도 중대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부문·지역간 이해관계를 조정·통일해 민주화운동으로 집중시키고,
민주화의 깃발 아래 대중을 집결시킬 수 있는 통합단체가 건설되지 않은 것이었다.
70년대 민주화 운동은 제도정치권의 그늘 아래 있었고, 종교단체의 틀 속에서 진행됐다. 그러나 5·17을 겪으면서
양김(김영삼·김대중)으로 대표되는 정치권에 대해 더 이상 환상을 갖지 않게 됐고, 광주사태의 경험은 종교단체의 틀 안에 안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운동가들이 민주화운동의 독자적인 깃발을 세워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문제는 그 방법이었다.
84년 6월29일 통합단체로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가 출범했다. 민민협은 민청련 등이 중심이 돼 건설한 단체로 각 부문
운동단체간 협의체적 성격이 강했다. 노동자·농민 등 기층 대중운동의 역량 강화에 중점을 두고, 조직도 개인 회원보다는 회원 단체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그러나 기층 대중운동의 정치역량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민민협과 같은 조직으로는 정치투쟁의 효율성·집중성을 기대하기 힘들었고,
명망있는 재야 원로들을 조직 내에 흡수할 수도 없었다. 이에 10월16일 문익환·장기표 등을 중심으로 해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가 따로
조직됐다. 국민회의는 대중운동단체를 포함하지는 못했으나 명망있는 재야 원로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아직 역량이 부족했던 각 지역단체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민민협이 대중운동에 중점을 두고 대중조직에 기반했다면 국민회의는 당면 투쟁을 중시하고 명망성과 개인회원에 뿌리를 두고자 했다.
양자는 대립적이면서도 보완적이었다.
따라서 양자의 통합을 위한 논의가 시작됐다. 고도의 운동이론들이 오고 갔으며, 때로는 심각할 정도의 노선 갈등도 있었다. 오랜 논의
끝에 두 단체는 85년 3월29일 서울 장충동 분도회관에서 통합대회를 갖고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출범시켰고, 의장으로 문익환을
선출했다. 총 23개 단체가 가입한 민통련은 상임위원회를 통해 부문운동단체를 포괄했고, 각 지역조직을 통해 개인 회원들을 받아들였다.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민통련 상임의장으로 선출된 문익환은 1918년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서시’로 유명한 민족시인 윤동주와는 어깨동무였다. 47년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55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구약을
전공하고 돌아와 우리나라 구약학계의 권위자로 있었다. 68년부터 신·구교 공동 구약번역책임위원으로 일하면서 교회 일에만 몰두하던 그가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75년 8월 박정희에 의해 오랜 친구 장준하가 타살되면서부터였다. 친한 친구 둘을 일제와 박정희에게
빼앗기면서 그는 이 땅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자신의 남은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죽는다/나는 이 겨레의 허기진 역사에 묻혀야 한다/두 동강난 이 땅에 묻히기 전에/나의 스승은 죽어서 산다고 그러셨지/아/
그 말만 생각하자/그 말만 믿자. 그리고/ 동주와 같이 별을 노래하면서/이 밤에도/ 죽음을 살자”(문익환의 시 ‘마지막 시’)
76년 ‘3·1민주구국선언’을 초안해 감옥에 가기 시작한 이래, 78년 형집행정지 취소로 재수감되고, 80년 내란예비음모죄로
구속되는 등 이미 세 차례나 수감됐던 그는 민통련 의장에 선출되고 난 후 85년 5월 학생 시위를 선동했다고 해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또 다시 구속됐다. 89년 3월에는 방북을 감행해 김일성과 민족통일 3단계 방안 원칙에 합의하는 등 인생을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해
바쳤다. 모두 6회에 걸쳐 11년 2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그는 94년 1월 심장마비로 사망해 이 겨레의 허기진 역사에 묻혔다.
민통련은 기관지로 ‘민주통일’, 신문으로 ‘민중의 소리’를 발간해 국민 대중에게 민주화운동을 알리는 한편 85년 2·12 총선 이후
고양되기 시작한 민주화 열기를 이끌며 민주헌법 쟁취투쟁에 나섰다. 한편으로는 신민당의 직선제 개헌운동과 연대하고 한편으로는 신민당의 타협
움직임을 경계·비판하면서 전개된 이 투쟁은 86년 3월30일 5만여명이 모인 광주에서의 투쟁을 시발로 해 5월3일 인천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5·3인천사태는 비타협적인 민주화 운동세력으로서 민통련의 위상을 국민들에게 뚜렷이 각인시켰으나 그 피해는 컸다. 민통련 간부 대부분이 수배되고
문익환이 구속됐으며 사무실이 경찰에 의해 폐쇄됐다.
하지만 민통련 활동은 위축되지 않았다. 주요 간부들이 구속 또는 수배된 상태에서 민통련은 87년 5월27일 통일민주당과 민추협을
위시한 제도권 정치세력과 가톨릭·개신교·언론·여성·노동자·농민 등 모든 민주화운동세력을 총망라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후 6월항쟁 기간 동안 국민들은 국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고 마침내 6·29 선언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민통련의 절정기였다. 양김이 갈라지는 상황이 벌어지자 민통련은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파와 양김의 단일화를
주장하는 후보단일화파, 그리고 독자적으로 백기완을 후보로 내세우자는 독자후보파로 분열되면서 내분에 휩싸였다. 우여곡절 끝에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결정이 났으나 후보단일화파와 독자후보파는 승복하지 않고 민통련을 탈퇴했다.
12월16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고 김대중이 3위에 머물면서 민통련은 사실상 와해 상태에 들어갔다. 안팎 비난에
직면하면서 민통련의 위상은 실추했고, 구성원의 사기도 떨어졌다. 85년 창립 이래 엄혹한 상황을 뚫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데 앞장섰던
민통련은 결국 89년 1월21일 출범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에 찬란했던 민주화운동의 전통을 넘겨주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 민통련 후신 ‘전민련’재야민주화 구심점 -
“자주·민주·통일을 민중의 힘으로 달성한다는 민통련의 이념을 계승한다.”
1989년 1월에 출범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은 창립 성명서에서 이같이 밝혔다. 전민련은 민통련의 명맥을 이은 전국적인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라는 것을 내세웠다.
이부영이 상임의장, 장기표가 사무처장, 김근태가 정책기획실장을 맡아 ‘재야 트로이카’가 됐다. 하지만 90~91년 이부영과 장기표가
신당 추진을 위해 전민련을 떠났고 김근태도 95년 정계에 입문했다.
전민련은 국가보안법 철폐, 주한미군 철수 문제 등을 사회적 이슈로 가시화하는 데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러나 당시 전민련 간부
김기설의 분신자살을 둘러싸고 제기된 이른바 ‘유서대필사건’을 겪으면서 조직 역량이 크게 약해졌다.
92년 대선을 앞두고 재야 운동세력들은 재결집이 불가피해졌다. 91년 12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등 27개 재야 단체가
참가해 출범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이 전민련의 후신이다.
=-=-=-=-=-=-=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 미디어부 기자)
=-=-=-=-=-=-=
[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4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