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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민주화운동] 56.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미카엘* 2005. 3. 2. 18:29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태가 이렇게 커지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함운경과 한마디라도 더 이야기를 나누려고 몰려드는 수십명의 내외신 기자들을 바라보는 오경중의 마음 속에는 이제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도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번 농성이 예상 밖의 성과를 거둔 것은 분명했다.


3일 전인 1985년 5월20일 서울대 1년 선배인 함운경이 자신을 보자고 했을 때 오경중은 직감적으로 ‘아, 무슨 일이 있겠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광주사태 문제로 대학가가 한창 투쟁의 회오리 속에 있던 5월인지라 운동권 선배인 함운경의 말이 예사롭게 생각되지 않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함운경은 “2~3일 내로 점거 농성이 있을 것이다. 장소는 그때 가서 알려주겠다”며 그때까지 자신과 함께 지낼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농성장에 진입할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이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도 요구했다. 자신이 농성장의 책임자라 꼭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22일 농성장이 서울 미국 문화원이라고 알려주었다. 광주사태 문제를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국회의사당이나 KBS에 진입할 것도 생각했으나 경비가 심해 들어가기 어려울 것 같아 비교적 경비가 허술한 을지로1가 미국 문화원을 농성장으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23일 낮 12시, 함운경을 비롯해 서울대·고려대·연세대·서강대·성균관대 등 5개대 학생 총 73명이 미문화원 정문을 경비하는 전경을 밀치고 2층 도서관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진입하자마자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후 출입문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언제 있을지 모를 경찰의 강제진압에 대비했다. 모두 미국과 전두환 정권이 어떻게 나올까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미국이 경찰 투입을 요청하지 않고 대화로 풀어보자고 나왔다. 광주 문제를 국내외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학생들은 ‘전국학생총연합 광주학살원흉처단투쟁위원회’ 명의로 살포된 유인물을 통해 ▲광주사태의 진상과 그 책임자를 명백히 국민 앞에 공개할 것 ▲광주학살 주모자와 관련자들은 책임질 것 ▲광주사태에 대해 책임을 지고 미국은 한국 국민 앞에 정중히 사과할 것 등을 요구했다. 첫번째와 두번째 것은 항상 제기돼 왔던 문제라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 문제는 세번째 요구사항이었다. 이제까지 광주사태는 한국 내부의 문제라고 하면서 국외자처럼 행동했던 미국에 대해 그 책임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물론 앞서 82년 3월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도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책임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했다. 그러나 그때는 방화와 그로 인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묻혀 미국 문제는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었다. 이번에는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놓고 다시 그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예상 밖의 사태를 맞이한 미국은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경찰을 동원해 학생들의 농성을 강제 해산시킬 수도 없었다. 세계는 이 사태가 한국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반미운동의 시작이 아닌지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먼저 미 대사와의 면담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끝내 이 요구를 거부하고 미 대사관 정치 참사관 던롭이 협상에 나섰다. 단식농성으로 맞선 학생들에게 던롭은 철수를 요구하며 “광주사태는 비극이다. 사태의 중요성을 안다. 그러나 광주사태 당시 군병력 지휘자는 한국측이었으므로 미국은 지원 책임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경찰은 미문화원 앞길을 봉쇄하고 기자와 학생 가족들의 출입만 허용했다. 기자들과의 문답은 육성이나 종이에 글씨를 크게 써서 보여주는 방법으로 진행됐다. 미국측이 신문을 제공한 덕분에 학생들은 사태의 진행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기자들이 주로 묻는 것은 이 사건이 반미운동의 일환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광주사태 문제가 아니라 반미냐 아니냐가 사건의 핵심이 된 것이다. 학생들을 대표해 함운경은 “미국은 우리의 해방에 기여했고 6·25때 참전했으며 그후 굳건한 우방으로 있어왔다. 그러나 5·17 이후 국민들이 미국을 불신하는 현상이 안타깝다. 광주사태에 관해 솔직히 사과하고 우리의 민주회복을 진정으로 도와줄 때 비로소 올바른 한·미관계가 이룩된다”고 밝혔다. 요컨대 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때까지 반미는 외면적으로는 아직 민주화운동이 넘어서는 안될 금기사항이었다.


그러나 미국도 학생들도 얼마 안 있어 곧 그 금기가 깨질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사건은 그 단초를 연 것이었다.


24일 저녁 미국 대사 워커가 학생들에게 “학생들이 의견을 표명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으나 한·미 양국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들을 함께 조사하고 논의하는 일이 의미가 있다는 데는 의견을 같이한다”는 서신을 보냈다. 워커는 미국이 광주사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을 보여준다는, 미국 국무부가 80년 5월16일부터 6월까지의 관련 기록을 담아 80년 9월22일 펴낸 미공개 자료도 함께 학생들에게 제시했다. 미국은 광주사태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전면 부인했다.


미국과의 대화가 더 이상 진척이 없으면서 단식농성 중인 학생들도 지쳐갔다. 25일부터 학생들 중 일부가 탈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27일에는 서울에서 남북 적십자회담이 열리기로 돼 있었다. 이는 학생들이 미처 고려하지 않은 변수였다. 자신들의 농성이 남북문제에 이용당할 것을 우려한 학생들은 26일 새벽 전격적으로 이날 정오에 농성을 해제할 것을 발표한다. 계속 있어봤자 미국의 입장에 변화가 있을 것 같지 않았고 또 광주사태를 이슈화하는 데는 이미 충분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6일 정오 학생들은 직접 만든 태극기를 앞세우고 미문화원을 나와 경찰 버스에 올라탔다.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은 발생 72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


이사건 관계자 73명 중 25명이 구속되고 43명이 구류, 5명은 훈방조치됐다. 그후 검찰에 의해 기소된 사람은 함운경을 비롯해 총 19명이었다. 함운경에게는 국가보안법이 함께 적용돼 징역 6년6개월이 선고됐고 오경중은 2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석방됐다.


학생들은 당초 이번 사건을 반미운동 차원에서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광주문제의 일환으로 제기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진행 도중 반미냐 아니냐가 핵심이 됐다. 이 사건에 관련된 학생들이나 미국 모두 이번 사건이 결코 반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이 사건의 본질이 반미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학생들은 반미임을 애써 감추려고 했고 미국은 무시하려고 했지만 누구의 눈에도 이번 사건은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터진 최초의 반미운동이었다. 다만 학생들은 역풍을 우려해서, 미국은 반미운동이 기정사실화될까 우려해서 서로 알고도 숨겼을 뿐이었다.


얼마의 세월이 지난 후 학생들은 2심 재판에서 스스로 반미운동임을 밝혔다. 그리고 미국도 이후 발생하는 미문화원 점거 사건에서 이번과 같은 인내심을 발휘하지 않고 가차없이 한국 경찰의 투입을 요청했다. 이미 반미운동의 봇물이 터진 상황에서 굳이 계속 진실을 외면하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 ‘점거농성’ 새투쟁 봇물 -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은 학생운동에 ‘점거 농성’이라는 새 양상을 불러일으켰다.


85년에는 대학생들이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주한 미상공회의소, 민정당 중앙연수원 등을 잇따라 점거하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고조됐다.


이듬해 건국대 사건은 학생들이 농성한 지 나흘만에 경찰이 헬리콥터까지 동원한 진압작전을 펼쳐 가담자 1,290명을 구속하는 등 단일 사건으로 최대 구속자 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미문화원 농성으로 기소됐던 학생 19명은 재판 거부 등 파행이 거듭되는 가운데 결국 전원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들 중 신정훈(나주시장)과 함운경은 정계에 입문했다. 장영승(렛츠 대표)은 일찍이 IT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이강백(‘아름다운 가게’ 사무처장)처럼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각 대학 총학생회장이었던 김민석(서울대), 허인회(고려대), 정태근(연세대)과 고진화(성균관대 삼민투위원장)도 이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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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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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5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