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민주화운동] 64. '암흑속 한줄기 빛' 진실을 파헤치다
‘암흑속 한줄기 빛’진실을 파헤치다
언론 출판의 자유는 집회 결사의 자유와 더불어 민주주의 사회질서를 이루기 위해서는 빠져서는 안될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다. 우리 헌법은 언론 출판의 자유를 법률로 제한할 경우라도 그 본질적 내용은 침해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없는 한 언론 출판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으며 설령 이러한 경우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의 언론 현실은 이러한 헌법 정신을 정면으로 유린했다. 당시 언론에 관한 기초적인 법률인 언론기본법은 80년
12월 이른바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제정·공포한 것으로 수많은 독소조항을 내포하고 있었다.
언론기관의 정보청구권을 배제할 수 있는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예외 규정을 두었고, 정부가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강제로 연수를 시킬 수
있도록 했으며, 정기간행물에 대한 행정관청의 검열과 간섭을 사실상 허용하는 등 정상적인 여론 형성을 위한 언론의 기능을 원천봉쇄하는 내용이
수두룩했다.
여기에다 경범죄처벌법 상의 유언비어 날조·유포 규정의 남용, 언론인에 대한 권력기관의 노골적 위협 등으로 인해 언론은 ‘사회의
목탁’이 아니라 정권의 충실한 나팔수로 전락해 갈 수밖에 없었다.
그 대가로 언론사들은 세제·금융 등에서 엄청난 특혜를 누리면서 기업으로서 몸집을 불려나갔다. 84년의 경우 조선일보는 회사 자본금
30억원보다 13억원이 많은 43억원의 세금을 냈으며, 문화방송(MBC)은 1백40억원의 세금 납부로 굴지의 대기업을 제치고 순위 2위를
기록했다. 규모로는 중소형 기업에 불과한 언론사들이 거대한 부를 축적하기에 이른 것이다.
청년·노동자·농민단체를 비롯한 민주화운동 세력은 제도언론이 권력 앞에서 침묵·굴종하거나 진실을 왜곡하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다. 결국
그들은 자구책으로 영세하나마 자신들의 매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민청련의 ‘민주화의 길’, 민통련의 ‘민중의 소리’ 등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농민신문, 도시빈민신문, 노동자신문 등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광주항쟁의 진상, 대학가 등의 반정부운동 소식,
민주화운동에 가해지는 극악한 고문과 폭력의 실상 등 관제언론이 접근조차 하지 않는 사회상이 이들 ‘민중언론’ ‘저항언론’을 타고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민중언론은 재정도 빈약했고, 언론의 전문성도 모자랐으며, 대중적인 영향력도 갖기 어려운 한계를 지녔다. 제도언론에 비하면
비참한 수준이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려는 고민과 노력은 언론인들의 몫이었다. 유신 치하 동아·조선일보에서 해직된 기자들과 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거리로 내몰린 1,000여명의 언론인들은 84년 3월 ‘해직언론인협의회’를 결성해 언론자유 보장, 부당해직의 원상회복을 주장하는
창립선언문을 채택한다. 그 해 12월에는 진보적인 출판인들까지 참여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현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를 창립해 ‘대안언론’
운동을 결의한다. 이들은 송건호(의장), 김인한·최장학·김태홍·김승균(공동대표), 성유보(사무국장) 등을 임원으로 선출했다.
민언협 결성은 언론민주화를 전문적으로 담당할 주체가 비로소 형성된 것을 의미했다. 언론운동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민언협은 당시의 언론 현실을 ‘언론 부재의 캄캄한 암흑기’로 규정하면서 대안언론의 창간, 민주세력과의 연대활동 강화, 제도언론
개선투쟁 등을 목표로 제시함으로써 언론전문가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구체적 실천목표로 언론기본법의 폐지, 신문·방송의 독과점과
카르텔의 해체, 편집권 독립, 언론사 소유구조 개선 등을 설정했다.
85년 6월 민언협은 ‘말’지 창간호를 발행한다. 민언협은 ‘거짓과 허위, 유언비어가 마치 이 시대를 대변하는 언어인양 군림하는
것은 권력과 구조적으로 유착 종속되어 있는 언론기업이 아부를 일삼기’ 때문이기에 ‘말다운 말의 회복을 위해 진실을 알고자 하는 민중의 절실한
염원’을 반영한다는 취지에서 제호를 ‘말’로 정했다.
‘민주 민족 민중언론을 향한 디딤돌’이라는 부제를 단 창간호는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을 표지사진으로 해 96쪽의 잡지 형식으로
발간됐다. 창간호는 대학가 서점들에 배포되자 마자 하루 만에 재판에 들어갔다.
여느 민중언론들이 객관적 사실 보도보다는 입장을 내세우는 선전매체적 성격인 데 비해 ‘말’은 제도언론이 아예 외면하거나 보도하지
못하는 국민생활의 적나라한 진실에 접근해 들어갔다. 미문화원을 점거한 학생들이 미국의 책임을 묻고 나서는 이유, 대우자동차 초유의 파업사태
전말과 학생 출신 노동자들의 역할, 외국 농축산물의 무차별적인 수입으로 인해 침몰해가는 농촌 현실과 집단시위에 나선 농민들의 충격적인 모습,
도시 재개발에 밀려난 빈민들의 찌들리고 남루한 삶의 슬픈 이야기들은 정권의 시각만을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제도언론에 식상한 독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갔다.
창간호에서 특히 돋보인 것은, 기본권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여성 현실을 지적하면서 시대착오적인 여성관에 근거한 사법부의 판결을
비판한 부분이다. 당시 23세의 한 미혼 여성이 교통사고를 당해 노동력을 잃은 사건(이른바 ‘이경숙씨 사건’)에서 재판부는 미혼 여성은
25세까지 일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그 전까지는 회사 급여를 기준으로, 25세 이후에는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것으로 보아 도시일용노동에 해당하는
임금을 기준으로 손해배상액을 산정했다. ‘결혼=퇴직’을 당연시하는 사회 풍토를 재판부가 옹호한 것인데, ‘말’은 이를 정면에서 문제삼은 것이다.
85년 12월 김태홍이 2대 사무국장에 취임하면서 ‘말’은 격월간으로 정착한다. 영업망을 전국으로 확장하고 현장 취재력을 강화하는
한편 취재영역을 끊임없이 확대했다. 하루 수십만부씩 발행하는 제도언론에 비해 겨우 두어달에 한번 1만여부를 발행하는 대안언론은 적어도 물량
측면에서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모든 조건이 열악한 상황에서 ‘말’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오로지 진실을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제도언론의 실상을 국민들에게 폭로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동아일보가 74년 기자 대량 해직과 함께 유신체제와의 갈등을 끝내고 권력과의 밀월 또는 순치의 길로 접어든 이후 우리의 언론기관은
대부분 고유의 기능으로부터 변질됐다. 무분별한 자기 확장에 매몰되면서 ‘언론’이 아닌 ‘정치집단’처럼 행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론은 선거와
개각 때마다 국회와 행정부에 인적 자원을 보급하는 주요 통로가 됐다. ‘말’은 이같은 추잡한 정언(政言) 유착의 현장을 알리고 외치는 외로운
대안언론이었다.
‘말’은 ‘통일에의 꿈, 분단의 현실’(2호), ‘국제정치와 민중’(3호), ‘시장개방 압력과 한국경제’(4호), ‘제3세계
민중운동과 미국’(5호), ‘민중과 미국’(6호), ‘대타협 속의 대탄압’(7호) 등을 주 테마로 후속편을 이어갔다. 이러한 제목들이 시사하듯
제도언론이 명백히 존재하는 문제임에도 굳이 보지 않으려는 사안들을 끄집어내 문제의 핵심과 진실에 접근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5共의 언론통제 ‘보도지침’폭로…말誌 86년 9월호서 584건
공개-
보도지침이란 5공화국 당시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이 매일 각 언론사에 은밀하게 보낸 가이드라인을 말한다. 1986년 ‘말’ 9월호가
85년 10월~86년 8월 보도지침 584건을 폭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보도지침은 문공부의 용어로는 ‘홍보조정지침’이었는데, 실제로는 대통령
정무비서실이 결정해 언론통제 수단으로 활용했다. 보도지침에서 가장 빈번한 단어는 ‘보도하지 말 것’이다. 정부에 불리하지만 조만간 묻혀버릴
사건은 아예 보도불가를 지시해 관심거리가 되지 않게 했다. 게다가 기사 게재 단수에서 사진 사용 여부, 제목 표현까지 시시콜콜하게 지시했다.
보도지침을 ‘말’에 제보한 김주언(당시 한국일보 기자)과 공개를 기획한 김태홍(당시 민언협 사무국장), 신홍범(" 실행위원)은 국보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됐으나 95년 대법원의 무죄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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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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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7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