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민주화운동] 68. 잇단 대학생 분신사건
잇단 대학생 분신사건
1776년 독립전쟁으로 탄생한 미국은 구체제의 압박 아래 신음하던 구대륙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신세계였다. 그러나 자유·평등·박애가
충만할 것 같았던 미국의 그늘진 곳에서는 백인들에게 학살당한 인디언 원주민들과, 멀리 아프리카에서 끌려와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다 간 흑인
노예들의 피맺힌 원한이 곳곳에 응어리져 있었다. 2차대전에서 파시스트와 군국주의자들을 물리친 후 미국이 전세계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자임을
자임했을 때도 제3세계 곳곳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독재정권의 억압과 착취 아래 수많은 민중이 신음하고 있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민족을 해방시켰으며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했다는
미국의 지원 아래 군사독재의 탄압과 착취는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그리고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결국 우리 역사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대학살이 일어났다. 그 5월을 겪은 사람들에게 미국은 결코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아니었다. 미국은 대학살을 같이 공모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묵인 내지 방관한 공범이었다. 82년 3월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85년 5월의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은 미국이 민주화운동 진영의
본격적인 공격 대상이 되리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난 지 꼭 4년째 되는 86년 3월18일 오전 11시쯤 서울대 IMC회관 앞에서 10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집회를 열고 있었다. 학생들은 쏟아지는 빗발 속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사회자의 선창 아래 구호를 외쳤다. “반전반핵 양키고홈.”
“민족생존 위협하는 핵기지를 철수하라.” “친미독재 타도하고 미 제국주의 몰아내자.” 6·25가 끝난 후 이 땅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반미
구호가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이어 ‘반전반핵 평화옹호 투쟁위원회(반전반핵투위·위원장 이재호)’가 발족됐다. 이날 오후 학생들은 청계천5가
미군 공병대대 앞에서 팀스피리트 훈련 반대를 외치며 본격적인 반미운동을 시작했다.
이날 집회는 소위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NL) 계열의 학생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85년을 거치면서 학생운동은 이념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광주사태 이후 학생들은 소위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렸다.
그리고 반공이라는 금기에 더 이상 얽매이려 하지 않았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대신에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학생운동 전반을 휩쓸기 시작했다. 친일파들이 집권한 대한민국에 대한 회의는 빨치산들이 중심이 된 북한 정권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학생운동 일부에서는 북한을 추종하는 그룹까지 생겨났다. 비교적 단일했던 학생운동의 이념적 조류는 분열되고 다양화하기 시작했다.
NL 계열은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이며, 현재 한국 민중이 당하고 있는 착취와 억압은 미국의 지배로부터 유래한다고 인식했다. 그들은
미국이 전세계에서 핵전쟁을 책동하고 있으며, 한반도는 그 최전방이라고 확신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핵전쟁의 위기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도,
그리고 군사독재의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도 미국을 이 땅에서 축출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4월4일 결성된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투쟁위원회(자민투)’를 중심으로 결합했으며, 반전반핵투위는 그 산하의 특별위원회로
재편됐다. 이들의 주장은 미·소간 핵전쟁의 암운이 짙게 깔리고, 남한 단독의 올림픽 개최 결정으로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던 86년 당시의 내외
정세 속에서 점차 학생들의 지지를 넓혀가고 있었다.
전기는 4월 하순에 찾아왔다. 4월7일 성균관대 2학년 학생 500여명이 전방 입소훈련 거부를 선언하고 시위를 벌인 후 100여명이
교내에서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전방 입소훈련은 대학 2학년 학생들이 5박6일 간 전방 군부대에 입소해 군사훈련을 받는 것으로 전두환 정권이
대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대표적인 억압장치였다.
서울대 총학생회와 자민투는 이 투쟁을 높이 평가하면서 “전방 입소훈련은 미 제국주의의 대학생들에 대한 용병교육이며 식민지
노예교육”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4월16일 총학생회장 김지용을 위원장으로 하고 이재호를 공동 부위원장으로 하는 ‘전방 입소훈련 전면거부 및
한반도 미제 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특위)’를 결성해 4월28일부터 5월3일까지의 전방 입소훈련에 대한 전면 거부투쟁에 나섰다.
특위는 2학년 학생들에 대한 조직작업을 계속하면서 은밀히 농성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입소훈련이 예정된 4월28일부터 4일간 서울대
중앙도서관을 점거농성해 ‘민족대학’을 선포하고 강연과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을 세웠으나 대학당국이 4월26일부터 중앙도서관을 전격
휴관하면서 농성은 불발됐다.
특위는 대안으로 종로구 연건동의 의대 도서관을 농성 장소로 정했다. 자연대 학생회장이던 김세진이 사전 답사를 한 후 계획을 세웠다.
D데이는 27일 오후 1시, 농성 지도부로는 김세진과 이재호가 결정됐다. 26일 밤 4~5명씩 조 단위로 기다리고 있던 2학년생들에게 연락이
전해졌고 27일 아침 김세진과 이재호는 미리 의대 구내에 들어가 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경찰에 의해 의대 주변에
경찰의 철통같은 검문검색이 실시됐고 106명의 학생이 체포되면서 이번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27일 밤 특위는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이제 시간은 불과 12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격론 끝에 28일 아침 9시 신림동
사거리에서 연좌농성을 벌이기로 결정이 났다. 농성의 지도는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며 강력히 주장한 김세진과 이재호가 맡기로 했다. 두 사람은
의대 농성이 미수로 끝난 것에 대해 강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운명의 28일 아침 9시 신림동 사거리 가야쇼핑센터 앞으로 40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맞은편 서광빌딩 3층 옥상에서 이재호와
김세진이 핸드마이크를 들고 구호를 선창했다.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 학생들이 도로에 연좌한 채 어깨를 걸고 구호를 따라 외친 지
얼마 안돼 경찰이 출동했다. 경찰은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하며 연행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두 사람이 있는 건물 옥상으로 뛰어올라왔다. 두 사람은
미리 준비한 시너를 온몸에 끼얹으며 외쳤다. “시위대에 덤벼들지 말라.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가까이 오면 분신할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의 주구였던 경찰은 출세욕에 눈이 멀어 두 사람을 덮쳤고, 두 사람은 라이터를 켰다. 두 사람의 몸에 불이 붙었고
김세진이 순간적으로 뒤로 넘어졌다. 그러나 김세진은 곧바로 다시 일어나 온몸이 화염에 휩싸인 가운데서도 두 손을 불끈 쥐고 계속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를 외쳤다. 얼마 후 이재호가 고통에 못이겨 옥상에서 떨어졌고, 곧이어 김세진도 쓰러졌다. 거리에 있던 학생들은
경찰에 맞으며 끌려가면서도 피눈물을 흘리며 ‘재호 형’ ‘세진이 형’을 외쳐댔고 지켜보던 시민들은 연신 눈물을 닦아냈다.
한강성심병원에 입원한 두 사람은 이미 의식불명 상태였다. 이재호는 80%, 김세진은 60%의 화상을 입고 있었다. 경찰은 병원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았다. 부모에게만 간신히 면회가 허용됐다. 두 사람은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제가 죽는 건가요? 저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아요. 친구는 어떻게 됐습니까?”라며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으나, 결국 김세진은 5월3일, 이재호는 5월26일 사랑하는
조국과 동지들을 남겨둔 채 선배 민주영령의 뒤를 따라 열사의 반열에 들었다.
김세진은 65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했으며, 이재호는 같은해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광주의 핏자국이 아직 지워지지도 않은 83년
대학에 입학한 두 사람은 3년이 조금 넘는 젊은 시절의 전 인생을 조국의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화를 위해 바쳤다. 김세진이 4학년이 됐을 때 그의
어머니가 1년만 무사히 넘기고 유학갈 것을 권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예수 믿는 분인데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대접받으러 오셨나요? 지금 고생하고 억눌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어머니 자식만 안일하게 출세해서 편히 살기를
바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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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8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