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민주화운동] 75. 새로운 연극·영화운동
새로운 연극·영화운동
1998년 9월10일, 광주 기독병원에서는 한 사람의 연극인이 생의 마지막 순간을 힘겹게 보내고 있었다.
“밤새 힘들어하시다가 혼수 상태에 빠지셨어요. 그러다가도 문득 문득 정신이 들면 ‘자, 설명이 다 끝났으니까 이제 다시 한번 시작해
봅시다’라며 연출을 하시는 겁니다. 단원들 이름을 부르고 한 장면이 끝나면 다음 장으로 이어지며 밤새 내내 연극을 하고 계셨어요.”(서현희,
‘5·18 광주민주화운동 자료총서’)
그의 연극은 새벽을 넘기지 못했다. 이틀 후, 사람들은 그를 광주 망월동 묘역에 묻었다. 그곳이 그의 자리였다. ‘5월 광대’
박효선의 자리. ‘광대’라는 명칭은 그에게 고통이자 자랑이었다. 그것도 ‘5월 광대’라니!
80년대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연극운동 역시 광주항쟁을 외면하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항쟁 기간 동안 도청 항쟁지도부의 홍보부장을
맡아 마지막까지 총을 놓지 않았던 연극인 박효선은 그 둘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렇게 설명한다.
“문: 연극과 5·18의 관계는?
답: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이에요. 그러니까 이러한 사회에 대한 목소리를 낸다든가 변혁을, 사회 변혁이든 인간 변혁이든 변혁을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런 거죠. 그런 의미에서 5·18이라는 것도 그 속에서 올바른, 우리들의 가장 어떤 모범적인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인간이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시간. 그런 시간이었으므로 (연극은) 그 시간에 대해 천착을 하는 거죠.”(김선출, ‘5월의
문화예술’)
80년 5월은 당연히 새로운 연극운동을 요구했다. 항쟁 이후 박효선이 수배자가 돼 정처없는 도피 생활을 하던 무렵, 서울에서는
임진택이 KBS PD로 근무하다가 ‘국풍81’의 연출을 거부하고 사표를 냈다. 독재정권이 민중의 의식을 호도하고자 마련한 관제 축제에 들러리를
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통금을 해제하고, 컬러 텔레비전 시대를 열고, 프로 야구를 출범시키고, 미스유니버스대회를 개최한다고 해서 정권의
야만성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그렇듯 난데없이 ‘국풍81’을 한다고 해서 전통예술이 부활하고 초토화된 민중의 신명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이후 그는 치과의사 오종우가 주도하던 극단 연우무대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이미 70년대에 김지하와 만난 인연으로 관심을 갖고 해 오던
마당극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때까지 문화운동을 주도한 것은 탈춤반이었습니다. 연극반은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번역극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또 창작극을
하더라도 무대극을 탈피하지 못한 정도였죠. 혹평해서 말한다면, 유명 외국 극작품에 대한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한 일종의 문화 사치이고요. 그래서
연극이 민중생활에 기여하고, 대학 문화운동, 더 나아가 민중문화운동의 구심점으로 집결되기 위해서는 마당극에 대한 이론적 정립과 이의 보급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임진택, 월간 마당 85년 5월호 인터뷰)
이제 연극은 좁은, 주어진, 제한된, 닫힌 무대뿐만 아니라 넓은, 만들어가는, 무한한, 열린 마당에서 관객과 배우가 따로 없이 한데
어울려 공연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경향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서울·광주·부산은 물론이고, 제주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빠른 물살을 탔다.
제주의 극단 수눌음은 제주도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4·3사태를 정면으로 다루기 힘든 정치적 상황에서 우선 역사적 소재를 마당극 형식으로
형상화내는 데 주력했다. 그 중에서도 식민지시대 해녀들의 항일투쟁을 다룬 ‘잠녀풀이’와 삼별초의 대몽고 항전을 다룬 ‘항파두리’ 등의 작품이
주목을 받았다. 그들의 서울 상륙 공연은 국립국장을 후끈한 열기로 가득 채울 만큼 대성공이었다.
이미 70년대에 공연된 김지하 원작, 김민기 연출의 ‘소리굿 아구’에 마당극 형식이 처음 도입됐다. 거기에 배우로 참여한
이애주(여공), 채희완(여대생), 임진택(쪽발이), 김석만(청년) 등은 80년대에도 여전히 우리 마당극운동을 주도한다. 주요 극단으로는 74년에
창단돼 줄곧 마당극 운동을 이끌어 온 놀이패 한두레를 비롯해 극단 아리랑(86년), 극단 천지연(87년), 극단 한강(88년), 놀이패
열림터(청주, 84년), 놀이패 신명(광주, 82년), 극단 토박이(광주, 83년), 극단 자갈치(부산, 86년) 등이 있었다.
한편으로, 탈춤에 뿌리를 두고 70년대 후반부터 일부 노동현장에서 의식화 교육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촌극을 새롭게
해석해 내는 작업도 활발하게 전개됐다.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전해 내려온 탈춤을 비롯한 전통적 대동놀이를 당대적 현실에 맞게 ‘목적의식적’으로
재해석해 내려는 작업의 결과 80년대 초반부터 대학가의 축제는 급격히 변모하기 시작했다. 메이퀸 대회가 여성을 상품화한다는 이유로 거부됐다.
심지어 쌍쌍파티조차 서구적 퇴폐문화라고 해 축제 프로그램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이제 모든 것은 민중적이어야 했다. 축제라는 이름도 ‘대동제’로 바뀌었다. 함께 어울려 놀자. 놀되, 생각하며 놀자. 대학 축제는
줄다리기, 풍물놀이, 땅빼앗기 놀이 등 적게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수백명이 한데 어울려 우르르 몰려다니며 고함을 치고, 스크럼을 짜고, 깃발을
빼앗고, 어깨를 맞댄 채 몸싸움을 벌이는 한바탕 난장으로 변해 버렸다.
난장 끝에 어둠이 찾아오면, 일순 정적이 감돌고 황혼에 물드는 교정을 바라보며 누구라 먼저 할 것 없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아침이슬’이나 ‘늙은 군인의 노래’를 개사한 ‘투사의 노래’일 때도 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5월의 노래’일 때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 장엄한 마무리를 통해 놀이 주체들은 새삼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식을 다졌다.
너, 어디에 있는가. 수없이 오랜 세월 민중이 고통을 받고 또 받아오는 동안, 너는 이 땅에 사는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무엇을
했는가. 놀이에 몰입하다가도 문득 자기 자신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하는 이러한 기법(소외 효과)을 예술적으로 정리한 사람 중에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가 있었다. 그의 서사극 이론은 80년대 초반 연극을 비롯한 우리 연행(演行)예술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영화운동은 여러 가지 여건상 가장 늦게 출발했고, 가장 더디게 발전했다. 영화를 처음 운동적 개념으로 생각한 이들은 프랑스문화원이나
독일문화원을 들락거리면서 할리우드식 영화 문법에 거부감을 갖게 된 일부 마니아들이었다.
80년 3월 서울대 영화연구회 ‘얄랴셩’도 박광수·홍기선·송능한 등 그런 이들이 모여, 영화의 사회적 기능에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며
출발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영화 단체였다. 그들은 82년에 다시 서울영상집단을 꾸리고 첫 작품으로 ‘판놀이 아리랑’을 선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실천 작업은 장르의 특성상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8㎜, 16㎜ 카메라를 들고 이른바 ‘작은
영화’를 겨우 겨우 만들어냈다. 대신 그들은 영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에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카메라를 인간의
시선으로 낮추자는 장선우의 ‘카메라의 인간 선언’(83년)이 그 대표적인 논문이다. 그의 이론 작업들은 곧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83년)와
‘영화운동론’(85년) 등으로 묶여 나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시 영화인들이 주목한 새로운 영화는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을 비롯해 소련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 그리고
민중을 각성시키는 데 커다란 노력을 기울인 쿠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이른바 혁명영화였다.
영화인들은 84년 제1회 ‘작은영화제’를 개최하고, 영화법 개정을 촉구하는 등 나름대로 많은 땀을 쏟았다. 86년 11월에 터진
이른바 ‘파랑새 사건’은 민주화운동권에서조차 그 존재를 쉽게 인정받지 못한 영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알려지는 계기로 작용했다. 사건은 서울영상집단이
만든 작은 영화 ‘파랑새’가 농민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당국이 문제를 삼으면서 비롯했다. 하지만 영화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쉽게 발견하지
못하자,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 심의를 받지 않고 영화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홍기선과 이효인을 영화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나 영화운동이 이론의 차원을 넘어 말 그대로 해방영화의 단계로 나아가려면 영화패 장산곶매가 만든 장편영화 ‘오! 꿈의
나라’(88년)와 ‘파업전야’(90년)가 나올 때까지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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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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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10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