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민주화운동] 76. '민중 교육' 사건
‘민중 교육’ 사건
4·19직후 교사의 가입률이 90%를 넘었던 전국교원노조운동이 5·16 쿠데타를 주도한 군부에 의해 용공 혐의로 초토화된 뒤
교육계에는 학생이나 노동운동과 달리 조직적 저항이 거의 없었다.
그곳에도 1980년대 초반부터 긴급조치와 5공 아래 학생 운동과 야학을 경험한 젊은 교사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교육
현장에서 새로운 운동의 토대를 구축하고자 했다. 흐름은 두 갈래로 나타났다. 합법적 사회단체 아래 공개조직 형태로 꾸며진 모임과 지역을 중심으로
비공개로 무수히 조직된 교사들의 소모임이 그것이었다.
YMCA 중등교육자협의회(82년 2월 창립), YWCA 사우회(83년 6월),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83년 8월), 흥사단
교육문화연구회(84년 1월) 등이 전자에 해당한다. 이들은 총회, 지역 연수, 회보 발행, 교사와 학생을 대상으로 한 민속 강습 및 연극 공연을
통해 의식 전환을 꾀했다. 또 교사와 학생의 문화적 주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비공개 소모임은 지역·교과·집단별로 모여 학교에서 일어난 학생지도 사례나 학내문제를 놓고 토론하면서 연대의식을 다져나갔다. 이들의
연구 활동이 일정하게 축적되면, 합법적 간행물로 공개돼 현장 교사들의 지침서 역할을 했다. ‘삶을 위한 문학 교육’ ‘글쓰기 교육의 이론과
실제’ ‘지도교사를 위한 민속놀이 지침서’ ‘교육현장’을 비롯한 무수한 자료집과 회지들이 그것이다. ‘아람회’ ‘오송회’ ‘부림’ 사건은 이런
독서와 연구 중심의 소모임 운동을 공안 당국이 터무니없이 용공으로 조작해 일반 교사와 학생들로부터 고립시키려 한 대표적 탄압 사례다.
젊은 교사들은 기존 학자나 외국의 교육이론만으로는 한국의 교육현실을 분석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그들은 새로운 교육운동의
방향을 정립하고, 교사들에게 전파하기 위한 매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84년부터 김진경과 윤재철 등은 ‘오월시’와 ‘삶의 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는 문인 출신 교사들과 오랜 논의 끝에 새 매체 기획안을 만들었다. 매체 형태는 교육전문 무크지로 하되, 출판사는 실천문학사로 정하고
섭외에 나섰다. 실천문학사 편집주간 송기원은 이미 이름난 시인이자 소설가로 재야 운동의 핵심에 있었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85년 5월20일, ‘민중교육’ 창간호가 발간됐다. ‘교육의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함축하듯 ‘민중교육’은 이전의 여느 교육
잡지와도 비교할 수 없는 새롭고 강력한 메시지를 내뿜었다. 권두 대담 ‘분단 상황과 교육의 비인간화’의 교육 현실에 대한 진단도 그러했다.
특집으로 묶은 ‘해방후 지배 집단의 성격과 학교 교육’(김진경), ‘교육 현장, 그 민주적 행방’(윤재철), ‘야학 운동의 반성과
전망’(심임섭), ‘한국 교육 운동의 실천적 고찰’(이철국) 등의 글은 당시 검열에 준하는 납본필증을 받아 합법적으로 서점에서 팔려나가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직설적 비판으로 일관했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교육 정책이 미국식 보편주의에 기초한 문화주의와 인도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이는 개발과 능률만을 최우선시하는
당시 독재 정권의 지배이념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진단했다. 이들은 친일 관료와 친미 엘리트 집단에 의해 교육 정책이 독점됨으로써 교사와 학생들이
관료적 명령 체계의 최말단에 놓이게 됐다고 판단했다. 나아가 이같이 암담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교육 현장의 민주화를 주창했다.
새마을 청소, 애국 조회, 교련 사열 등 일제 말 황국신민화 교육정책의 잔재, 교과서를 비롯한 각종 교수 내용을 관류하는 반공 냉전
및 국가주의 이념, 전국의 모든 학생들을 일률적으로 내몰고 있는 ‘입시 지옥의 사다리’, 급속한 교권의 실추, 전 교과 과정에 걸친 획일적 발전
이데올로기, 매일 하향식 지시를 전달 주입하는 매개자로서의 학교.
교육을 철저히 통치체제의 시녀로 전락시킨 이같은 현실을 해결하려면 피상적인 논의나 구호가 아닌, 보다 구체적인 행동과 개혁에 대한
검토가 절실했다.
‘민중교육’이 발간된 지 한달여가 지난 뒤 몇몇 경찰서가 여기에 기고한 교사들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KBS와 MBC는 문교부의 보도
의뢰에 따라 음산한 배경음악까지 깔아 ‘민중교육, 당신의 자녀를 노린다’는 식의 선정적 프로그램을 잇따라 방영했다. 결국 7월 말,
‘민중교육’에 기고한 모든 교사들에게 파면 등 중징계가 내려졌다.
85년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제적과 구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급증하고 있는 학생운동 참여자를 막겠다는 심산으로, 5공 당국은
번거롭고 시끄러운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과거 삼청교육대처럼 문제 학생들을 일거에 격리할 수 있도록 ‘학원안정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민주화운동단체들은 기독교회관을 비롯한 여러 곳으로 나누어 농성 중이었다.
8월6일, 서울 성동고 교사 윤재철은 보충수업을 받느라 뒤늦게 방학에 들어가는 담임반 학생들을 상대로 마지막 종례에 들어갔다. 목이
메어 자주 말이 끊겼다. 낌새를 챈 제자들이 웅성거리는 듯하더니 집단행동에 나설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말로 종례를 서둘러 끝냈다. 9일 새벽, 그는 아파트 베란다를 타고 집에 급습한 안기부
요원들에게 체포당해 남산의 지하 취조실로 끌려갔다.
사흘 뒤 송기원 역시 똑같은 일을 당했다. 그는 이날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이 안기부원들임을 확인한 순간, 80년 여름 안기부
지하실에서 겪은 소름끼치는 공포의 기억을 되살려야 했다. 이미 그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엮여 듬뿍 징역을 살고 나온
터였다. 그래도 송기원은 ‘민중교육’의 필자들이 대부분 교사들이었으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자신이 이 일을 주도했다고 극구 주장했다.
사건은 곧 검찰로 넘어갔다. 검찰은 송기원에게 ‘민중교육’에 게재된 글들이 ‘북괴의 선전 선동활동에 동조하거나 북괴를 이롭게 할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 땅의 비인간적 교육 현실에 가슴아파하는 젊은 교사들을 왜곡하는
것도 모자라 어쩌자고 거기다 북괴를 끌어다 붙인단 말인가. 그는 버텼다. 그가 검찰의 요구를 인정하는 순간 그 착하고 여린 교사들은 국가보안법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허사였다. 자신은 물론 윤재철과 김진경에게도 국가보안법이 적용됐다. 두 교사는 사실 송기원과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문단에 등단한 시인이기도 했다.
윤재철은 신혼의 아내가 낳은 첫 딸을 유치장 창살을 통해 세상에서 처음으로 만나야 했다. 또 그의 부친은 그가 1심에서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은 데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지병이 악화돼 운명했다. 그는 직접 가르친 제자 둘을 구치소에서 조우했다. 고려대와 성균관대의
삼민투 위원장으로 시위를 주도하다가 구속된 박능출과 고진화였다. 감격적인 만남이었다.
송기원은 법정에서 담당 검사와 국가보안법을 두고 희화적인 문답을 나누었다. “피고인은 북괴가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조직된 반국가단체라는 사실을 알지요?” 국가보안법 위반 피고인에게 붕어빵처럼 똑같이 따라붙는 거였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모릅니다”라고 크게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전두환도 ‘김일성 주석’이라고 부르는 걸 들었는데, 그럼 전두환부터 국가보안법 딱지를 붙이라”고 요구했다.
한승헌·이돈명 등 변호인단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 공방을 즐겼다.
한편 김진경은 ‘민중교육’에 몇 년 뒤 전교조의 출범을 예고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허술한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줄기 하나가
600리를 흘러 낙동강을 이루듯이 ‘민중교육’은 오늘의 전교조를 형성한 작은 물줄기였던 셈이다.
“사태가 더욱 악화될수록 관료적인 명령 체계의 말단에 놓인 교사들은 자신의 비판자적 역사성을 깊이 성찰하면서 극단적인 경우 노동자
계층과 동일한 선상에서 출발하는 교사 운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는 학생과 교사가 함께 어우러지는 참다운 교육의 장으로 가고자 하는 뜨거운
몸부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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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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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11월 0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