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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민주화운동] 81. 전대협 출정가

*미카엘* 2005. 3. 2. 18:49

전대협 출정가

 


1986년 10월 건국대 사태로 1,200여명의 대학생들이 대량 구속된 이후 학생운동 내부가 가장 집중적으로 고민한 문제는 ‘국민과 함께하는 투쟁’이었다. 그들은 극심한 패배감과 무력감을 떨치고 재기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아내는 데 몰두했다. 전두환의 탄압을 뚫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로지 대중의 사랑과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87년 3월에 들어 대부분의 대학이 총학생회 선거에 돌입했는데, 우선 선거 양상이 이전과 크게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학우들의 관심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치 현안을 떠나 학내 문제를 주요 이슈로 내걸거나 익살맞은 춤과 노래로 ‘문화유세’를 펼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후보들이 내건 주요 이슈는 대학마다 조금 달랐지만 대체로 대학신문 언론자유 보장, 부당징계 철회, 시국선언 교수에 대한 승진 누락 반대, 학생복지 확대, 부정입학 반대, 총장 퇴진, 학사경고 완화 등이었다. 고려대 이인영(현 열린우리당 의원)은 서창캠퍼스 유세에서 준비된 의전적인 원고를 찢어버리고 손가락을 깨물어 ‘서창의 고통과 함께하겠다’는 혈서를 써 지방 캠퍼스의 소외감과 불만을 해소하는 데 적극적 입장을 보임으로써 학우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연세대 선거에서 선보인 안치환(가수)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는 숙연하면서도 서정적인 노래로 급속히 대학가에 확산됐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어머님의 눈물이/ 가슴속에 사무쳐 우는/ 갈라진 이 세상에’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참여 학생 수를 늘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이 노래는 6월항쟁 내내 시위참여자들의 애창곡이 됐고, 오늘까지도 명곡으로 불리고 있다.


규모가 작고 학생운동 역사도 일천한 서울시립대 총학생회 출범식에는 처음으로 서울시내 대학 학생회장 12명이 참석해 경험과 정보를 소통하는 교류의 장을 열었으며, 시립대생 2,000여명은 단과대학별로 토론회를 끝낸 후 단과대 깃발 아래 질서있게 출범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협동의 멋을 과시했다.


서강대는 학생총회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자 학우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간의 관행을 깨고 스스로 유회를 선언함으로써 운영의 원칙을 준수했다. 소식을 들은 학생들은 이후 동원령에 의하지 않고서도 몇배로 많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서울대는 86년 ‘구국학생연맹’ 사건으로 84학번과 85학번 중심의 주력군 중 절반이 구속되거나 수배되는 치명적인 탄압을 받은 터라, 87년에는 총학생회 간부진을 세우기도 어려울 정도로 초토화가 된 상태였다. 그 척박한 동토에 박종철은 봄날을 예비하는 한 톨 씨앗이 돼 산화한 것이다. 서울대는 다시 전열을 정비하면서 철저히 대중노선을 견지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4·19와 5·18 행사 역시 이전의 정치투쟁 대신 학술 세미나, 풍자 마당놀이, 개사곡 경연대회, 마라톤대회, 판화 사진전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 중심으로 변화를 꾀했다.


철저히 학생들의 요구에 부응한 학생회 운영은 지방대학에서도 그 호응이 뜨거웠다. 문교부에 따르면 87년 3·4월 두 달 동안 전국 73개 대학에서 451회의 집회·시위가 일어났는데, 이 중 45개대 242회가 학내 민주화와 관련한 것이었다. 운동권만의 힘겨운 선도적 정치투쟁에서 일반 학우 중심의 학내문제 투쟁으로 대거 전환한 이후 학생들의 참여 열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주변에서 집회 모습을 소극적으로 지켜보던 관찰자들이 슬금슬금 집회장 앞으로 이동하는 변화가 일어나면서 집회의 적극 참여자와 소극적 관찰자의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4·19기념일을 앞둔 4월 17·18일 양일간 전국 대학에서는 대규모 학내 시위가 일어났는데, 참여자는 47개대 2만7천여명에 달했다. 이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군사독재정부가 알 리 만무한 가운데 학생들은 이를 새기고 또 새겼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세상을 바꾸고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가장 뜨거운 동력이 될 수 있음을.


이 흐름을 연결해 마침내 5월6일 연세대에서 서울지역 23개 대학 대표가 모여 ‘서울지역 대학생 대표자협의회’(서대협)를 결성하고 8일에는 발족식을 갖는다. 그리고 그들은 이 대중투쟁 노선이 불러온 성과를 곧이어 확인하게 된다.


5월23일은 광주항쟁 7주년 기념행사의 마지막 날이었다. 학생들은 민통련의 ‘민주영령 추모제’에 참석하기 위해 종로 3가 탑골공원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박종철의 고문살해범이 은폐조작됐다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로 민심이 들끓었지만 경찰의 봉쇄망은 철통처럼 더욱 견고해졌다. 오후 2시, 네거리의 신호등이 바뀌면서 차량이 줄어드는 것과 동시에 어디선가 호각소리가 들렸다.


차도의 행인들 속에 섞여 있던 학생들은 일제히 6차선 차도로 뛰어들었다. 곧바로 차도는 차량과 학생들로 뒤엉키며 교통 흐름이 막혔다. 중무장한 전경들이 방패를 앞세우고 로마 병정처럼 열을 지어 접근해 왔다. 순식간에 탑골공원 앞 네거리는 3,000여명의 학생과 시민들로 채워졌다. 전경들이 연행을 시작할 즈음, 누군가가 외쳤다.


“여러분, 우리 모두 팔을 끼고 누웁시다.”


자연스럽게 ‘광주 출정가’를 합창하면서 학생들은 옆 사람과 팔짱을 굳세게 끼었다. 도로에 드러누운 연후에야 이들은 비가 내리고 있음을 알았다. 어두운 잿빛 하늘로부터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내려 이들의 몸을 적셨다. 전경들은 사력을 다했으나 거대한 사슬로 뭉쳐 있는 학생들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학생들은 온 몸으로 비의 세례를 받으며 눈을 감은 채 ‘광주 출정가’를 계속 합창했다. 전경들은 방패로 학생들의 팔다리를 내려 찍기 시작했다. 사슬을 풀고 한 사람씩 연행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연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시민들이 일제히 “우우” 하는 야유와 함께 전경들에게 거칠게 항의하고 나섰다.


“왜 학생들을 내려 찍느냐. 화염병을 가졌느냐, 돌멩이를 던졌느냐. 이 학생들은 맨몸이지 않으냐.”


항의는 이어졌고 전경들은 주춤거렸다. 그 사이에 차도 가장자리에 있다가 이미 연행됐던 학생들이 다시 풀려나와 대열의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 들었다. 몇몇 행인은 전경들과의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비를 맞으며 누군지도 모르는 옆 사람과 단단하게 팔을 꽉 낀 채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종철이를 살려내라.”


학생들의 눈에서 감격의 눈물이 흘렀지만 이내 빗물과 섞여버렸다. 아, 마침내 시민들이 우리를 보호해 주는구나. 수배자를 밀고해 잡히게 하고, 더러 빨갱이라 비난하던 사람들이 연행되려는 자신들을 보호해 주고 있다는 감격이 목울대를 울컥거리게 했다. 쇠파이프와 꽃병(화염병)을 들고도 늘상 경찰에 쫓기던 이들이 아니던가.


이들 가운데 절반 가까운 1,200여명이 이날 연행됐지만 곧 모두 풀려났다. 행인들의 말처럼 화염병도 돌멩이도 가지지 않았던 학생들을 처벌할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이튿날 학교로 돌아간 이들은 전날의 다짐을 다시 새겼다.


“돌아오지 못할 각오로 거리로 나갑시다. 단, 우리의 무기는 각목이나 화염병이 아니라 오직 순결한 도덕심과 뜨거운 결의뿐임을 잊지 맙시다.”


이날의 투쟁 이후 학생들은 5월27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의 출범을 감격적인 모습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국본이 결의한 6·10대회 총궐기를 준비하며 ‘호헌철폐 민주개헌쟁취 서울지역 학생협의회’를 구성한다. 6월6일, 5·23투쟁의 주력군들은 고려대에 모여 6월 민주항쟁의 전위로서 결의를 다진다.


87년 이들이 집중한 일대 개혁적 화두는 서울의 일부 대학 중심으로 전개됐던 학생운동을 대중화하고 전국화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목표를 성취한 결과 6월항쟁의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6월항쟁의 가장 큰 특징은 4·19 때처럼 대학이 소재하는 도시를 중심으로 투쟁이 일어나고 진행됐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수도권과 지방에서 대학을 거점으로 항쟁의 전위와 근간을 장악했던 것이다.


6월항쟁 직후 이들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전국의 대학생들을 대표하는 조직인 ‘전국 대학생 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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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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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12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