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민주화운동] 83. 명동성당 농성
명동성당 농성
1987년 6월10일 서울 명동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경찰과 밀고 밀리는 시위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대치선은 명동 입구
유네스코 건물 앞이었다. 이곳에서 학생과 시민 500여명이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다가 최루탄에 쫓겨 차츰 로얄호텔까지 밀렸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성당 안마당으로 들어갔다.
밤 11시쯤부터 근처 퇴계로·을지로·종로 일대에서 접전을 벌이던 시위대 일부가 성당 구내로 들어와 합류하기 시작했다. 잠시 숨을
돌린 이들은 모인 김에 내쳐 밖으로 진출해 마지막 시위를 감행했다. 이들 중에는 귀가하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경찰이 뜻밖에도 외부로 빠져나갈 수 있는 모든 길을 차단하고 최루탄을 난사했다. 밤중이라 최루탄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위대는 자구책으로 중앙극장과 로얄호텔 앞에 차량 차단기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3개조로 나누어 이튿날 새벽 3시까지 야간
투석전으로 맞섰다. 아무도 잠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전 계획된 투쟁이 아니었으므로 지도부가 있을 리 만무했다. 이들은 새벽 전투가 끝난 뒤 인원을 점검했다. 대학생 500명, 노동자 26명, 도시빈민 농성자 80명, 일반 시민 150명으로 집계됐다. 대학생 4명을 포함한 부문별 대표 7명으로 임시지도부를 구성했다.
그리고 곧바로 농성 지속 여부를 놓고 토론에 들어갔다. ‘투쟁 열기를 명동으로 한정지을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 국민과 함께할
방법을 찾자’는 해산론과 ‘6·10 국민대회 이후의 지속투쟁본부로 명동성당을 거점화해야 한다’는 계속투쟁론이 팽팽히 맞섰다. 두 그룹은 해산이든
지속투쟁이든, 일단 12일 정오까지는 농성을 계속한다는 데 합의했다. 서울지역 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의 일부 간부들이 농성장에 있었지만
강경투쟁을 주장하는 시민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농성대는 성당측의 항의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측의 해산 종용에 부딪혔다. 이제 12일 정오 해산은
기정사실화됐다. 11일 정오, 하는 수 없이 농성대는 임시지도부를 중심으로 해산 절차와 방법을 논의했다. 성당측은 오후 2시를 기해 농성자들이
철수하는 것으로 경찰에 이미 통보한 상태였다. 그런데 토론이 한창 진행 중인데 경찰이 성당 입구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무지막지하게 성당
안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부상자가 속출했다.
회의 중 급보를 접한 지도부가 밖으로 뛰쳐나왔다.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린 최루가스로 인해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때
명동성당 주임신부 김병도가 학생들이 쓰는 핸드마이크를 들고 경찰에게 다가가 격렬히 항의했다. 경찰이 일단 정문 밖으로 철수하자 농성대는 피흘리며
쓰러진 부상자를 구조하는 일부터 서둘렀다. 문화관 화장실 앞에 자리를 깔고 간호대 출신들을 중심으로 응급처치조를 구성했다. 이들은 광목 완장에
붉은 색 테이프로 십자가를 만들어 붙인 뒤 팔에 둘렀다. 그러나 의료품이 없었다. 응급처치조는 정문밖 경찰을 향해 “전쟁 중에도 적국의 부상자를
치료해주는 법인데, 의약품을 주어야 할 것 아닌가”라고 외쳤다.
해산 예정 시각이 다가오면서 농성대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러나 그 해법은 오히려 밖에서 제공해 주었다. 12일 새벽, 성당의
주인인 서울교구청 신부 40여명이 ‘도덕성과 정통성을 잃은 현 정권에 대한 투쟁은 정당하며 사제의 양심으로 농성대를 끝까지 보호할 것’을
성명으로 밝히고 나섰다. 백만 원군이었다. 더군다나 그날 저녁에는 서울지역의 사제와 수녀들이 참가하는 대규모 구국 미사가 예정된 터였다. 그런
가운데 이날 아침, 서울시경국장은 명동성당 농성자들이 성당을 좌경공산혁명의 ‘해방구’처럼 만들었다고 비난하면서 이들을 ‘체제전복적인 국기문란
행위자’로 엄벌하겠다고 특별담화로 경고했다.
낮 12시가 시시각각 다가오는데 성당 밖으로부터 격려금과 지원물품이 산더미처럼 들이닥쳤다. 정부의 ‘용공 타령’이 오히려 국민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한 결과였다. 계속되는 시위로 평소에도 많은 피해를 보았을 근처 가게 주인들과 성당 옆 계성여고 학생들의 눈물겨운 사연이 성금
봉투 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계성여고생들은 점심 도시락을 걷어 농성대에 전했다.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고 있는 농성대에게는 여간 큰 힘이
아니었다.
언론의 집중 보도가 이어지면서 수천명의 전경에 에워싸인 명동 일대는 적막에 싸인 채 전 국민이 숨죽여 주시하는 지역으로 급부상했다.
자연스레 12일 낮 12시는 아무런 일도 없이 지나갔고 농성은 계속 이어졌다.
이날 자정 무렵, 기동경찰 1,000여명이 배치되면서 잠시 비상계엄설과 강제진압설로 긴장감이 돌았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농성대는 해산 여부를 놓고 다시 토론에 들어갔다. 그러나 새벽에 성당 후문에 공수부대가 집결했다는 소문과 함께 계엄설이 다시 흘러나왔다.
‘비밀통로를 알고 있으니 살고 싶은 사람은 모두 빠져나가라’는 한 시민의 애원에도 움직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농성대는 이를 프락치를 이용한
경찰의 심리전으로 판단하고 이후부터 비표를 배포해 출입 통제에 나섰다.
해산 여부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토요일인 13일 아침이 밝았다. 농성대는 최루탄 파편과 돌멩이로 뒤덮인 성당 구내를 말끔히
청소하고 시민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바리케이드도 치웠다.
이날부터 근처 사무실의 회사원들과 시민들의 반응이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농성대가 그을린 얼굴과 남루한 행색으로 대오를 지어 명동성당
언덕에 올라서면 근처 사무실의 창문이 열리면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그들이 지지의 의미로 던지는 두루마리 휴지가 하얀 곡선을 그리며 무수히
낙하했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넥타이 부대’는 정문 앞에서 같이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5공이 그토록 주장하던 ‘침묵하는 다수’가
정치적 입장을 확연히 드러낸 것이다. 이 넥타이 부대는 이날 이후 6월항쟁을 이끄는 중심세력의 하나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농성이 4일째를 넘기면서 농성대는 극도로 지쳐갔다. 농성장 상황도 극히 열악했다. 숙소인 성당 내 문화관의 정원이
200여명에 불과해 남자들 중에는 외부 잔디밭 등에서 자는 둥 마는 둥 하는 이가 많았다. 지도부는 조를 짜서 경계조가 구호를 외치거나 시위에
나서면 다른 조는 쉬게 하는 등 세심하게 배려했지만, 서서히 체력의 한계를 드러냈다. 나태와 일체의 개인주의를 배격하고, 공공기물을 소중히
쓰며, 시민들이 제공하는 음식을 감사히 먹고, 기필코 민주화를 쟁취한다는 신념으로 투쟁에 임한다는 등의 7가지 행동수칙을 지키면서
‘주투야토’(낮에는 싸우고 밤에는 토론함)를 해온 결과였다.
14일은 일요일이었으므로 신도와 시민들이 자유롭게 성당을 출입할 수 있었다. 적지 않은 부모들이 자식을 데리러 성당으로 찾아왔으나
돌아가는 사람은 없었다. 부모와 자식 간에 말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경우도 있었다. 성당 입구 광장은 시민대토론회장으로 변했다. 오후 6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시민들은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신부 함세웅은 추기경 김수환의 지시에 따라 안기부 등 당국자들과 물밑 대화를 계속했다. 그는 일찍이 서울교구 신부들의 지지 선언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경찰의 강경진압 움직임을 잠재운 터였다. 그는 평화적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15일까지는 안전을
보장받았으나 농성을 해산하지 않으면 강경진압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전두환의 뜻을 안기부 차장으로부터 전해들었다.
농성대 내부의 견해도 팽팽하게 맞섰다. 이때 이미 국본은 18일 ‘최루탄 추방대회’를 열어 또 한번의 대규모 반격을 펴기로 발표해
놓은 상태였다. 15일 새벽 2시부터 철야 마라톤 회의를 한 끝에 결국 거수 표결로 결론을 내기로 했다. 3차에 걸친 투표 결과 119대 94로
해산이 결정됐다. 강경투쟁을 고수한 응급처치조와 부상자들이 통곡하며 울분을 토하는 가운데 김수환이 들어왔다. 김수환은 농성대와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15일 오전 10시, 농성대는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문화관을 나섰다. 구속된 이 한명도 없이 5박6일의 투쟁을 마감한 것이다.
6·10 대투쟁의 불씨를 껴안고 엿새동안 벌인 이 농성투쟁은 이후의 6·18과 6·26 대폭발로 가는 징검다리이자, 민주주의의 폭풍을 일으킨
진앙의 구실을 했다. 한 시민이 성당에 떨어뜨리고 간, 비닐 봉투에 성금과 함께 들어 있었던 쪽지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온 국민의 마음을 이렇게
대변했다.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나는 자신있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진정 우리의 희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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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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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12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