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민주화운동] 85. 6·29선언과 이한열 백만 장례행렬
6·29선언과 이한열 백만 장례행렬
6월항쟁이 절정을 향해 질주하던 1987년 6월20일을 전후해 미국 행정부의 행보는 전두환 정권의 계엄령 불발과 맞물려 있었다.
이미 미 국무장관 슐츠와 주한 미대사 릴리가 극렬 시위의 전국적 확산으로 군이 출동하는 비상사태가 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을 피력한 가운데
6월23일 한국에 온 국무성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 개스턴 시거는 여야 대화를 촉구하면서 한국 군부가 시위 사태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표시했다.
6·26 국민평화대행진 이후 전국의 시위는 대체로 잦아들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군산·옥구지부가 ‘군산시민
민주화실천기간’을 선포하고 26일 이후에도 매일 오후 6시를 기해 군산시청 사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고, 27일 부산에서 최루탄에 숨진 이태춘의
장례를 ‘국민운동본부장’으로 치르고 침묵시위를 한 게 눈에 띌 정도였다.
그런데 미 상원이 한국 민주화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슐츠가 “한국 정부는 정치적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미국의 제안을 수용할 것”이라고
장담한 바로 다음날인 29일, 돌연 민정당 대표 노태우가 TV 화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사태 수습을 위한 6개항의 제안을 내놓고 이를
전두환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표직에서 사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6·29선언이었다. 직선제의 즉각 수용, 김대중의 사면·복권, 양심수 전원
석방, 언론자유 보장, 지방자치제 실시, 대학자율화 등을 담고 있는 6개항의 선언 내용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전두환은 30일 담화를 통해 모든 것을 수용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미국은 이를 적극 환영하고, 하원의원 솔라즈는 “시거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어야 한다”고 격찬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미국이 전두환의 계엄령 발동 의지를 꺾는데 적극 관여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으로 하여금 전두환의 강경대처 방침을 누르도록 만든 것은 한국 국민들이 보여준 거대한 민주화 의지였다. 만약 80년
5월처럼 어느 한 지역 도시에 국한해 항쟁이 일어났다면, 또는 전국 동시발생이라 하더라도 그 힘이 경찰력이나 향토사단 병력으로 진압할 수 있는
수준이었더라면 그들은 이전과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사실 5공정권은 더 이상 옴짝달짝도 할 수 없을 만큼 시위대에 이미 포위된 상태였다.
벼랑으로 내몰린 그들이 선택한 6·29선언을 두고 훗날 전두환과 노태우가 서로 공을 다툰 적도 있지만, 그날 선언 이후 양 진영에서 아무런
갈등이나 동요가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면 상호 협의와 각본에 의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권 내부의 사정이야 어떻든 6·29선언 해석 문제를 두고 국본은 심각한 갈등에 빠져들었다. 분출된 국민의 힘 앞에 절대권력이 백기
항복을 한 것이냐, 아니면 뭔가 음흉한 술수를 비장해 놓은 함정이냐를 놓고 관점이 양분된 것이다. 재야 원로와 야당측 인사들은 6·29선언을
전두환의 항복으로 받아들이고 이후 민주화 일정에 전력투구해야 한다는 편이 다수였다. 그러나 유신의 긴급조치와 80년 5월을 끔찍하게 직접 체험한
젊은 실무자들은 함정에 빠지는 경우를 더 염려하는 편이었다.
그들은 박정희가 총탄에 숨진 10·26사태에서 80년 전두환 신군부가 출현할 때까지 격동기에 야당이 통합지도력으로 서지 못한 채
5공 출범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기억에서 헤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김영삼·김대중 양김이 대통합을 이룬다는 약속을 몇 번이고 확인한 이후에야 국본 지도부는 6·29선언이 결코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일단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이로써 6월항쟁의 불길은 급속히 가라앉았다. 국민들의 관심과 기대는 이제 직선제 개헌 이후의 정치일정으로 쏠렸다.
항쟁 참여자 누구도 민주세력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한편 항쟁기간 내내 최루탄 파편을 머리에 박은 채 죽음과 사투를 계속하던 연세대생 이한열은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는 듯이,
7월5일 새벽 2시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뒀다. 21세의 짧은 생이었다. 이 기간 동안 연세대생들은 지치지 않는 열정과 용기로 빈소를
지키면서 밤낮으로 가두투쟁을 지속했다. 국민들의 가슴에도 목이 툭 부러져 낙하하는 동백꽃처럼 최루탄을 맞고 피를 흘리며 머리를 옆으로 떨어뜨린
이한열의 사진 한장이 선연하게 남아 있었다.
7월9일 오전 8시, 연세대 교정에서 이한열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그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지 꼭 한달이 지난 뒤였다. 수많은
인파가 교정을 메웠으며, 만장은 거대한 숲을 이루었다. 6·29선언 덕에 바로 전날 감옥 문을 나선 문익환이 단상에 올라 목멘 소리로 열사들의
이름을 차례차례 불렀다. 오열과 통곡의 바다를 뒤로 하고 선두의 운구차가 교문 앞에 이르자,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이애주(서울대 교수)가 한풀이 춤으로 그의 영혼을 달랬다.
장례 행렬은 우리 현대사 최대 집회로 기록될 만큼 실로 장대한 규모였다. 행렬의 선두가 서울시청 앞 노제 장소에 이르렀을 때에도
후미는 아직 연세대 교정을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였다. 연세대에서 신촌을 거쳐 아현 고가도로와 서울시청에 이르는 길 양 옆에는 수백만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길가의 시민들은 물론 건물 안의 회사원들, 그리고 교통정리 경찰들까지 모두 이 행렬을 지켜보며 경건하게 조의를 표했다. 이한열의
장례 행렬은 6월항쟁이라는 현대사의 분수령,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일대 의식이었다.
‘그대 뒤를 따르리’ ‘열사의 죽음을 민주화의 불꽃으로’ ‘산자여 따르라’. 색색가지의 만장을 앞세우고 각계 각층의 백만 인파가
시청 쪽으로 집결한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그 선두에 선 장례위원회가 노제를 지내는 동안 광장 곳곳에서는 구호가 터졌다.
“살인정권과 타협없다 끝까지 투쟁하자.” “독재지원 내정간섭 미국놈들 물러가라.” “6·29는 속이구다.”
6월항쟁의 불씨를 퍼뜨린 박종철이 얼어붙은 임진강의 찬바람에 한 줌 재로 날아간 것과 달리, 이한열은 항쟁의 대미를 맺으며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광주로 떠났다.
운구차가 일정에 맞춰 서둘러 떠나간 뒤 서울시청 광장에 남은 백만인파는 흩어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앉아 연좌집회에
들어갔다. 여름의 태양이 작열하는 한낮 오후였다. 군중들 속에서 ‘전두환 퇴진’ ‘청와대 진격’ 구호가 터져나왔다. 6·29선언에 주저앉지 말고
군사정권이 퇴진할 때까지 항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곳에서 제기됐다. 군중들은 먼저 시청 앞의 태극기를 조기로 게양할 것을 시청측에
요구했고 이는 곧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장례위원회도, 국본 지도부도, 서울지역 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도 백만인파가 모이리라고 예측하지 못한 까닭으로 사기충천한
군중을 지휘할 집행부는 없었다. 마이크 등과 같은, 집회를 위한 최소한의 준비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광장에 앉아 있던 시민들은 어느새 광화문 네거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네거리 주위를 철통같이 겹겹으로 방어하던 경찰이
다연발탄을 마구 발사했다. 자욱한 최루탄 연무 속에 시민들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항쟁기간과는 달리, 더 이상 모여들지 않았다.
준비된 지휘부가 없던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시민들이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다는 승리감과 이후의 민주화 일정에 대해 어느 정도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날 만약 백만인파가 6·29선언에 만족하지 않고 명동성당 농성과 같은 투쟁이나 시내 행진을 계속했더라면 역사의 전개는 사뭇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6월항쟁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6월항쟁이 제기한 전국민적 요구는 결코 특정 계급이나 계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민족공동체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결정하는 중대한 시험대였다. 이후 반독재민주화를 넘어 반외세자주화로 발전한 항쟁의 이념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화두로 작용하고
있다. 역사의 주체는 일부 소수의 천재나 영웅이 아니라 바로 민중 자신들임을 6월항쟁은 극명하게 입증했다. 6월항쟁은 우리 민주화 역사의
결정적인 성장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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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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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5년 01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