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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바로보기] 06.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실상

*미카엘* 2005. 3. 3. 12:24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실상

 

 

한국전쟁은 국지전쟁이었고, 약 3년쯤 전개되었으니 단기전에 속할 것이다. 그런데도 세계전사에서 손꼽을 정도로 민간인 피해자(학살자·보통 1백만명 추산)가 많았다. 처절한 동족상잔(同族相殘)이었다. 무고한 민간인을 죽인 가해자는 남쪽의 경우 국군과 경찰을 비롯하여 좌우익의 청년단원이었으며 미군과 인민군, 인민군 유격대들이 가세했다. 그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옥석구분(玉石俱焚·옥인지 돌인지를 구분치 않고 모조리 불태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남쪽의 일부 지역은 아비규환(阿鼻叫喚)을 연출했다.

 

학살은 당초 남북분단 구조에 따른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에서 시작되었다. 해방공간에서 미군정이 실시된 뒤 친일파들이 다시 득세하자 많은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은 반미 군정 활동을 벌였다. 1948년 친일파를 끌어안은 이승만 정권이 수립된 뒤에 이런 정서는 더욱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곳곳에서 반정부 활동이 전개되었다.

 

여순사건을 주도했던 14연대 군인들은 맨먼저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1949년 12월24일 벌어진 문경 석달마을의 학살 사정을 보자. 토벌대는 자신들을 환영하러 나오지 않는다는 구실로 마을 주민 86명을 학살했다. 이들 가운데는 갓난아이와 15세 미만의 어린이 32명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탄압을 견뎌내지 못해 정부에 귀순하거나 투항했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이들을 묶어 국민보도연맹(國民輔導聯盟)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가입시켰다. 이 단체의 맹원들은 때때로 정부시책에 협조하기도 하고, 선도교육을 받기도 하고 맹원 상호간에 친목을 도모하기도 했다. 이들 맹원은 전국적으로 수십만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한국전쟁 초기에 군경은 정부 지시에 따라 평택 아래의 각 지역에서 이들 맹원을 찾아내 모조리 학살했다.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반정부 활동이나 좌익혐의가 있는 인사들도 군경이 후퇴하면서 학살했다. 그 숫자는 대략 2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학살동기는 후방의 교란세력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형무소의 재소자를 끌어내 처형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제주 4·3 사건과 여순사건의 연루자들, 그리고 예비검속으로 끌려온 보도연맹 관련자 등이 수감되어 있었다. 국방군은 1950년 7월 초순 후퇴하면서 대전 산내면 골령골에서 이들을 총살시켰다. 그 죽은 숫자는 3,000여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 “환영않는다” 마을 전체 처형 -

 

양쪽 군대가 후퇴를 반복하면서 다시 학살이 자행됐다. 더욱이 1953년 정전협정 성립 이후의 양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후퇴로가 차단된 인민군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 빨치산은 산 속에 아지트를 만들고 곳곳에서 출몰했다.

 

이들은 식량이나 의류 등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민간인 마을에 나타난 것이다. 주로 야음(夜陰)을 이용해 활동을 벌였다. 마을 주민들은 ‘밤손님’에게 때로는 식량이나 이불을 빼앗기기도 하고, 짐꾼으로 불려가기도 했다. 주민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역자가 된 것이다.

 

정부 토벌대는 빨치산의 거점을 없애기 위해 주민들을 소개(疏開)시키면서 마을을 모조리 불태우기도 하고, 때로는 이른바 빨갱이가 많은 마을에는 주민들까지 불태워 죽여버렸다. 복수심에 불탄 군인과 경찰들은 이성이 마비되어 있었다. 토벌대들은 빨치산에 협조했다는 꼬투리를 잡아 어린이, 노인을 가리지 않고 집단처형을 자행했다.

 

심지어 자신들이 출동해도 환영해 주지 않았다는 구실을 붙여 집단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를 두고 적의 거점을 완전히 없애고 후방을 견고하게 하는 이른바 견벽청야(堅壁淸野)작전이라 불렀다.

 

북한지역에서 넘어온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한 청년단원들이 학살에 앞장섰다. 고양에서는 인민군이 점령해 있을 시기, 우익청년들이 태극단이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어 활동했다. 인민군이 후퇴하자 태극단원들은 치안대와 합동으로 경찰의 협력을 얻어 부역자를 색출하여 금정굴에 끌고가 학살했다.

 

근래에 금정굴에서 유골 153구를 발굴했으나 당시 500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군들도 가해자였다. 미군들은 “전선으로 넘어오려 하는 자는 누구든지 사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영동 노근리는 진격통로의 연로에 있었다. 후퇴하던 미군들은 1950년 7월 끝 무렵, 피란을 서두르는 노근리 주민 400여명을 철교 밑에 모아놓고 기총 소사를 퍼부어 몰살시켰다. 이리역에서는 주민과 통학생들을 향해 폭탄 수백 발을 투하해 20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일단 미군의 경우는 제쳐두고라도 군인, 경찰, 청년단의 학살은 당초에는 보도연맹의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정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이 누구보다도 먼저 학살의 선봉에 섰다. 그는 “공산당 한 명을 죽이기 위해서 양민 열 명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지시를 내려 민간인 학살을 방조했던 것이다.

 

- 반인간적 수법 일제보다 잔인 -

 

학살 방법에도 여러 가지 유형이 있었다. 총살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으나 갖가지 유형을 동원했다. 산 채로 손발을 묶어 매장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총알을 아낄 수 있었다. 여러 사람을 한 곳에 모아놓거나 집안에 가두어 놓고 불을 지르는 방법…. 이를 초토화작전이라 했다. 수장의 방법도 자행되었다. 손발을 묶어 강물이나 바다에 처넣는 수법이었다.

 

이런 방법은 주로 부산이나 통영 같은 연해의 도시에서 자행되었다. 일본군이 중국 난징(南京)에서 써먹던 일본도로 목을 내리치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일본군 장교였던 김종원 같은 지휘관들이 주로 사용했다.

 

그밖에 굶어 죽이기, 몽둥이로 때려죽이기, 배를 갈라 죽이기, 팔 다리를 잘라 죽이기, 음부와 젖가슴을 도려내고 돌을 매달아 물 속에 넣어 서서히 목숨을 끊게 하는 등 온갖 반인간적 수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처녀·총각을 골라내 성교를 하게 하거나, 시숙과 제수를 찾아내 성교를 하게 하는 등 도저히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광란의 시대였다.

 

동학농민전쟁 시기보다 훨씬 잔악했던 것은 일본군의 수법을 배워 써 먹은 탓이었다. 이 글에서는 인민군 또는 좌익청년들이 죽인 실상은 일단 제외했다. 인민군과 좌익청년들이 죽인 숫자는 13만여명이라 한다. 여기에서는 남쪽 지배세력의 잔인한 국가폭력과 가해자의 비인도적 행위를 추적하고 그 진실을 규명하는 데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런 반인간적 행위가 연출된 것은 무엇보다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친일파들이 등장해 민족 정기를 짓밟는 현실에서 친일파들이 지닌 복수심이 얽혀 유발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우리는 이제 그 진실을 규명하여 잘못된 과거사를 청산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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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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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6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