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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바로보기] 07. 國祖 단군은 실존인물인가

*미카엘* 2005. 3. 3. 12:28
國祖 단군은 실존인물인가
 

평양을 찾는 방문객들은 어김없이 단군릉을 참배한다. 방문객들의 관심이 단군릉에 쏠려 있기도 하나 북한 당국의 요청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 북한은 단군릉에 외래 방문객의 관심을 유도할까?

 

애초에 북한 역사학자들은 옛 조선이 요동에서 나라를 세웠다가 지금의 대동강가인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보아왔다. 대체로 그 시대를 청동기로 보았으며 단군은 이 시대의 군장(君長)이었다고 해석했다. 남쪽에서 정통 역사학계의 견해는 청동기시대, 단군은 성읍국가(城邑國家) 단계에서 여러 군장의 하나이며, 그중 가장 강력한 지배자였을 것이라는 추론이었다.

 

그런데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기슭의 무덤을 대대적으로 발굴한 북한 사회과학원은 1993년 깜짝 놀랄 만한 발표를 했다. 곧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에서 단군과 왕비의 유골을 발견했다. 탄소 측정 결과 유골의 연대는 5,000년 전의 것이라고 단정했다. 출토유물은 금동왕관과 나무판을 고정하는 데 쓰인 쇠못 6개 등 86점이었다.

 

이 발굴로 단군은 5,000년 전에 실존한 인물이요, 고조선이 초기부터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 것이다. 북한은 단군릉 복원에 화강암 1,600개를 사용하고 거대한 부속 건물을 지어 꾸몄다. 이에 따르면 옛 조선은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역사시대를 열었고 중국·유럽보다 앞선 고대문화를 이룩한 것이 된다. 물론 남쪽의 학자들은 단군릉 발굴의 허구성을 비판했다. 발굴의 저의가 바로 북한체제의 정통성 확립에 있다는 것이다.

 

곧 단군을 고구려와 고려가 계승하여 마침내 조선인민공화국이 그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일련의 국가정통론으로 연결한 것이다. 역사 사실을 국가 이미지 조작과 정통성 확립에 이용했다는 것이다.

 

단군은 물론 신화 속의 인물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평양성에서 도읍을 삼고 건국했다. 단군은 1,500년 동안 다스리다가 중국에서 기자(箕子)가 오자 임금자리를 물려주고 신선이 되었다고 했다.

 

신화는 허구만이 아니라 일정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화는 원시공동체에서 계급사회의 시작과 함께 형성된 관념형태이기 때문에 생명력이 질기다. 또 일정하게 국가의식과 계급의식이 반영되어 있어 역사를 캐는 보고가 되고 있다. 신화에서는 등장 인물을 신성하고 초월적인 존재로 보면서 역사시대의 인물과 엄격하게 구별하고 있다.

 

단군신화의 의미를 캐보자.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설정한 것은 천명(天命) 사상과 관련이 있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인간을 다스리는 동양사상의 반영일 것이다. 이는 또 환웅은 이주민이고, 곰과 호랑이는 원주민으로 볼 수 있다.

 

곧 곰을 토템으로 한 종족과 범을 토템으로 한 종족이 있었는데, 결국 곰을 토템으로 한 종족과 타협하여 동맹관계를 성립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보편적 인류사 발전 단계로 보아 단군은 한 정치집단의 수장 또는 군장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곰족은 직접적 국가 구성원이고, 범족은 타협적 피지배 세력으로 각각 볼 수 있을 것이다. 범족을 도태시켰다는 대목은 없기 때문이다.

 

신석기 시대인 5,000년 전은 고대국가가 성립하기 이전의 단계이다. 이 시기에 원시공동체 사람들은 먹을거리와 안전한 곳을 찾아 이주를 거듭했다. 거주지는 주로 강을 배경으로 한 평야나 분지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단군은 대동강을 배경으로 한 부족장 또는 군장으로 군림한 지배자로 볼 수 있다.

 

환웅이 가져온 천부인 3개는 지배자의 결정권을 상징한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온 것은 지배체제를 갖추고 있음을 의미하고, 곡식·목숨·병·형벌을 주관한 것은 초기 성읍국가 단계의 지배권을 의미한다. 한반도에서 정착 농업을 통해 곡식을 생산한 때는 5,0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 농경사회가 이룩되었다는 뜻이다. 단군은 이런 조건에서 지배권을 행사했을 것이다.

 

또한 기자는 중국 고대의 실존인물이다. 중국 기록에는 은나라가 망하자 동방으로 가서 선위(禪位)의 형식으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쓰여 있다. 옛 조선이 교화를 받아 임금자리를 순순히 물려주었다는 설정은 신화에서 가장 황당한 대목이다. 적어도 기자가 무리를 거느리고 정복전쟁을 벌여 찬탈했다면 고대의 보편사적 관점으로 보아 기자조선이 성립될 수 있겠다. 이는 후대 중국 역사의 영향을 받은 탓일 것이다. 후기에도 유학자들은 기자를 높이고 단군을 아래 자리에 두는 의식을 보였다.

 

아무튼 단군은 나라에 위기가 있을 때마다 민족의 기원 또는 뿌리로 받들어졌다. 원나라 등 대륙의 침략세력이 위협을 가할 시기나, 조선 말기 일본의 침략위협이 있을 시기에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식민지 기간에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그리하여 국가의식을 고취하는 ‘제왕운기’(帝王韻記)가 출현하기도 했고 ‘규원사화’(揆園史話)와 같은 위서가 출현하게 되었다. 그런 속에서도 우리 민족은 단군을 받들면서 민족의 단결심으로 고취시키려 했던 것이다.

 

오늘날 단군은 민족공동체 의식의 상징이 되고 있으며 민족 주체의 한 표현으로 내세우고 있기도 하다. 그 단적인 보기가, 단기(檀紀)를 사용하여 독자적 연대 표시를 하는 것과, 해마다 개천절 행사를 하면서 느슨해진 국가관을 경각시키는 일 등이다. 또 홍익(弘益)을 보통명사로 사용하여 상생의 의미를 북돋고 있기도 하다.

 

우리 민족은 단군을 민족사의 출발점으로, 우리 역사의 유구성과 독자성을 시사 받아 민족통일의 정신적 지렛대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홍익인간(弘益人間)은 원시공동체 사회의 평등 이념을 나타낸다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 소유 분배를 공동으로 하여 인간의 삶을 꾸려나가는 이념이다. 이는 계급이나 독점을 위한 갈등과 투쟁이 없는 삶의 방식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홍익인간은 조화와 상생을 지향해야 하는 현대에도 여전히 한 제시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이를 통해 가장 오래된 역사로 분장할 필요가 없으며 고대에 대제국을 건설했다는 허황한 논리로 비약할 의미가 없다. 극단적 국수주의 또는 국가주의의 도구로 이용되는 것은 더욱 금물일 것이다.

 

그저 신화의 의미와 교훈을 얻어 현대의 갈등과 조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자족할 가치가 있을 뿐이다. 또 국조 단군을 원용하여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경쟁보다도 참다운 민주질서를 유지하면서 인간의 가치와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 더욱 소중할 것이다.

 

〈이이화/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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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 1909년 ‘단군교’ 창시

 

1909년 어느 겨울날, 서울 재동에 있는 취운정에 지사 수십명이 모여들었다. 나인영(羅寅永)·오혁(吳赫)·이기(李沂)·김윤식(金允植) 등이었다. 이들은 국조 단군을 받드는 단군교(뒤에 大倧敎로 바꿈)의 창시를 선포했다. 일제의 본격 침략을 앞두고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민족역량을 모을 구심체로 삼으려 한 것이다.

 

더욱이 일제는 한일병합의 공작을 꾸미면서 일본의 국조라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단군이 형제 사이라는 터무니없는 사실을 조작했다. 그들은 친일파 윤택영·이재극 등을 내세워 둘의 사당을 지어 받들게 했다. 나인영이 단군교의 교주로 추대되자 그 자리에서 이름을 나철(羅喆)로 바꾼다고 선언했다.

 

나철은 호남 벌교의 지주 아들로 태어나 중앙으로 진출하여 벼슬살이를 했다. 하지만 관료사회는 썩을 대로 썩었고 일제의 침략 마수가 곳곳에 뻗어 있음을 알고 벼슬을 버리고 동지의 규합에 나섰다.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20여명의 인사로 감사의용단(敢死義勇團)을 결성했다. 이들은 폭탄 상자를 우편으로 보내기도 하고 권총으로 저격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10년의 유배형을 받은 나철은 5개월 뒤 특사로 풀려난 뒤 단군교를 창시한 것이다. 나철과 단군교는 일제 당국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그는 이름을 대종교로 바꾸었다. 종(倧)은 “사람을 마루로 삼는다”는 뜻이다.

 

그는 1916년 단군이 은거했다는 구월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끝까지 나라를 찾을 것과 활동무대를 백두산 언저리로 옮기라는 유언을 남기고 선술(仙術)의 단전 호흡법으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유언대로 교도들은 맹렬한 독립항쟁에 나섰다.

 

먼저 만주에서는 대종교 회원 중심으로 북로군정서가 탄생되어 군사를 기르고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대종교 지도자 서일·여준 등은 1918년 만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어 1920년 대종교도인 김좌진이 홍범도와 합동으로 청산리와 어랑촌 전투를 벌여 일본 토벌대를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대종교의 민족정신은 상해로도 파급되었다. 초기에는 신규식·박은식·이시영·신채호, 후기에는 김구·조소앙·박찬익 등으로 계승되었다.

 

해방 뒤 대종교는 단군정신을 받드는 홍익대 등을 설립했으나 이승만의 정권 아래에서 갖은 핍박을 받았다. 아직도 그의 시신은 백두산 가는 길가(북간도 화룡현 청파호 언덕)에 초라한 모습으로 묻혀 있다. 고국으로 돌아올 날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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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6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