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바로보기] 08. 우리 역사 속의 천도(上)
고구려 시조 주몽은 서기전 57년에 졸본성을 왕도로 삼았다. 졸본(지금의 환런시)은 압록강 상류인 비류수(혼강)가의 분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졸본은 오지여서 외부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차츰 국력을 키워 나갔다. 졸본에서 도읍을 정한 뒤 40여년이 되어서는 더 넓은 곳을 왕조로 삼아 대제국 건설의 꿈을 실현시킬 조건을 갖추게 된다. 유리왕은 압록강가에 있는 국내성 주변이 “땅도 기름져서 오곡이 잘 자라고 사슴과 물고기도 지천으로 널려 있다”며 서기 3년 국내성(지금의 지안시)으로 왕도를 옮겼다.
국내성은 바로 백두산 아래, 압록강변에 위치해 있다. 위로 압록강 연안에서는 드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서쪽으로는 압록강을 타고 내려가 황해에 닿아 수로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
이어 유리왕은 국내성에서 북쪽으로 10여리 떨어진 곳에 환도산성(산성자산성)을 쌓았다. 방어성인 환도산성은 고구려 산성의 석축기술을 잘 보여주는 석성이다.
요동 등지에 웅거하고 있는 세력들이 연달아 고구려를 공격해 오자, 209년 왕도를 일시 환도성으로 옮겼다. 그런데 환도성은 요동에서 넘어온 관구검의 노략질을 받아 쑥대밭이 되었다. 또 연나라의 침입을 받아 미천왕의 무덤까지 파헤쳐지는 치욕을 당했다. 그리하여 장기 대비책으로 대동강가에 평양성을 쌓기 시작했다.
광개토대왕은 끝없는 정복전쟁을 벌여 대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북쪽의 여러 적과 맞설 때 배후를 공격하는 후방의 적에 대한 방비도 세워야 했다. 또 산악을 중심으로 영역을 확보한 고구려였기에 대동강과 한강을 중심으로 한 들판을 차지하여 농업생산력을 키울 필요성도 있었다. 그는 백제를 연달아 공격하여 한강 일대를 석권했고 낙동강 하류까지 정복, 왜구를 물리쳤다.
마침내 평양의 대성산성이 공사를 시작한 지 100여년 만에 완성을 보았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뜻을 받들고 강력한 남진정책을 추진하면서 427년 왕도를 대성산성으로 옮겼다. 대성산은 북쪽으로는 산줄기를 따라 압록강과 국내성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대동강을 넘어 묘향산 줄기로 이어진다. 산의 높이는 274m이지만 대동강 주변에서는 가장 높아서 들판이 모두 한 눈에 들어온다.
대동강 일대는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 더욱이 평양은 대동강을 통하여 황해로 넘나들 수 있는 수운과 해운의 요지였다. 도읍지가 중국과 멀어 안전지대 역할을 할 수 있었고, 남쪽으로 진출하기 좋은 지리적 이점도 지니고 있었다. 고구려는 멸망할 때까지 평양을 떠나지 않았다. 도읍관이 들판을 중시한 쪽으로 바뀐 것이다.
한편 북쪽에서 내려온 온조는 서기전 18년 백제를 건국하고 위례성을 왕도로 삼았다. 서해로 흘러드는 한강유역은 오래 전부터 선주민들이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한강유역은 충적토가 깔려 농업생산에 알맞았고 물고기가 풍부하게 서식해 사람 살기에 적합했다. 백제는 이곳에 왕도를 정하고 국력을 키워 나갔다. 하지만 고구려 장수왕은 남진정책에 따라 한강 유역을 정복했다. 마침내 475년 장수왕은 위례성을 공격하고 아차산 밑에서 개로왕을 죽였다. 이에 백제는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했다. 웅진은 삼면이 산악으로 둘러싸이고 한 면이 금강에 닿아 있어서 방어의 요충지였다. 고구려와는 달리 평야지대를 버리고 좁은 요새를 택한 것이다. 백제는 천연의 요새인 웅진에서도 계속 신라의 압박을 받았다.
그리하여 웅진에 도읍을 정한 지 60여년 만인 538년에 부여로 왕도를 옮겼다. 궁궐이 있는 부여의 부소산은 서쪽으로 백마강, 동쪽으로는 낮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웅진보다 방어의 요새가 되지 못한 듯 보였으나 백마강 쪽으로 수운이 원활하게 트여 있는 이점이 있었다. 또 백마강의 강변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어서 농업생산을 높일 수 있었다. 하지만 백제는 끝내 왕도를 지키지 못했다.
신라는 끝까지 경주를 떠나지 않았다. 왜구가 자주 노략질했으나 지배세력은 왕도를 옮기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신라는 쪼가리 통일을 이룩한 뒤 발해와의 경계를 대동강과 원산만으로 정했다. 또 경계를 표시하는 순수비(巡狩碑)를 멀리 북쪽의 황초령과 마운령에도 세우면서 경주를 벗어날 줄 몰랐다. 왜 그랬을까?
첫째는 왕족과 귀족들이 수도를 옮기려 하지 않은 것 같다. 이들은 경주 주변에 거대한 조상의 무덤을 받들고,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경주를 떠나면 조상 무덤의 권위와 재부(財富)에 대한 기득권을 상실한다고 보았을 것이다. 신라의 지배구조는 귀족중심사회였다. 둘째는 신라의 귀족들은 현실 안존적이어서 북방 진출의 의지가 없었다. 공한지나 다름없는 압록강과 대동강 사이의 지역으로 진출할 뜻이 없었으며, 동해를 통한 발해와도 교역을 활발하게 벌이지 않았다.
왕건은 처음으로 중앙집권적 통일국가인 고려를 건설하고 919년 철원에서 송악으로 왕도를 옮겼다. 상업세력의 후예인 왕건이 그의 기반이 있는 송악으로 왕도를 옮기는 것은 나무나 당연하다 할 것이다. 모든 길은 개경으로 통했다.
압록강을 기준으로 놓고 볼 때 한반도의 중심부는 북위 37도 선상이다. 개경은 이 선상에 자리잡고 있으며 한반도 지형의 특징인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은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개경은 사방이 낮은 산으로 둘러 있어 병풍을 둘러친 모습이다. 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으나 오래 버틸 입지조건은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런데 도성 가까운 곳에 큰 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송악산에서 내려오는 개울과 서쪽에서 흘러드는 시내가 있으나 도성 사람들의 용수로는 너무 부족하다. 두 시내의 물을 합쳐도 서울 청계천의 수량보다 적다. 이런 결점을 보완키 위해 도성 안 곳곳에 많은 우물을 팠고, 주변 산의 나무를 보호하는 금산(禁山)정책을 폈다. 하지만 교통이나 상업적 측면의 입지조건은 뛰어난 편이었다. 예성강 입구에 있는 천연의 항구 벽란도와는 30리 거리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임진강 하류를 통해 한강과 연결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고려시대 개경을 중심으로 상업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왕건은 동시에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지정하여 제2의 수도로 삼았다. 임금이 틈틈이 서경으로 행차하여 과거를 보이기도 하고 동명왕릉에 제향을 올리기도 했다. 서희는 거란이 침입하자 담판하면서 고려가 고구려의 후예임을 증거댈 때 “서경에 수도를 정했다”는 논거를 들이대기도 했던 것이다. 이는 고려의 북방진출 의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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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와 진훤, 王都 철원·전주서 푸대접
패군지장(敗軍之將)은 할 말이 없다지만 쫓겨난 임금은 후세에 유물 유적마저 보존할 수 없었다. 궁예(弓裔)와 진훤(甄萱·성으로 사용할 때는 견을 진으로 발음)이 바로 그렇다.
궁예는 신라에 맞서 나라를 세우고 오지인 철원에 도읍을 정했다. 궁예는 후고구려를 표방하면서 고구려 옛 영토의 회복 의지를 강렬하게 보인 것이다.
진훤은 처음에는 신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반기를 들었으나 나라를 세울 무렵에는 백제의 고토를 회복한다고
표방하고 나라 이름을 후백제라 했다.
그는 전주에 도읍을 정했다. 백제의 은의를 입은 것도 아니었으나 백제 유민의 복수심을 자극하여 지배력을 키우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나라를 세운 철원과 전주에는 두 사람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왜일까.
고려는 왕건을 영웅으로 받들면서 사정없이 궁예를 폭군으로 만들었다. 진실의 여부를 누구도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철원은 13년간 왕도 구실을 했다. 송악으로 천도한 뒤에 철원은 왕도가 있었던 곳으로 대접을 받지 못해 버려진 곳이나 다름없었다. 궁예를 기리는 사당 같은 것도 세워주지 않았다. 다만 방어를 위해 쌓은 산성(궁예성)이나 궁궐이 있었던 궁성지, 궁예가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御水井) 따위가 퇴락한 채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민중의 입으로 전해지는 구비(口碑) 전설들이 많이 남아 있다. 안산(案山)을 고암산으로 잘못 정해 300년 버틸 왕조를 30년도 못 가게 되었다든지, 궁예가 망할 적에 남은 군사를 이끌고 통곡했다는 울음산 전설, 궁예의 한탄이 서려 있다는 한탄강 전설 따위가 아련하게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진훤은 상대적으로 궁예보다 나은 평가를 받았다. 말년에 아들 신검과 갈등을 빚어 개경으로 도망쳐서, 오히려 적이었던 왕건을 도와 상보(尙父)로 대우를 받은 덕분인지는 모르겠다. 그의 묘가 지금도 황산(현재의 논산)에 전해지고 있다.
진훤은 전주를 도읍지로 34년 동안 버텼다. 하지만 전주에서는 그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전주의 군사 요새지로 꼽히는 남고산에 진훤이 처음 쌓았다는 산성이 그나마 흔적을 알려줄 뿐이다. 또 그가 유폐되었던 금산사에 성문이 남아 있다. 후손들조차 영락하여 조상을 기리는 일을 벌이지 못하고 있다. 두 임금은 쫓겨난 탓으로 이렇게 푸대접을 받았고, 그 행적조차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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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7월 0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