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바로보기] 09. 우리 역사 속의 천도(遷都)
이성계는 고려의 찌꺼기를 씻어내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가장 중요시한 것이 천도였다. 당시 개경에는
50여만명이 살고 있었다. 주민 대부분은 고려 왕조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성계는 즉위한 다음해 계룡산으로 길을 떠났다. 이때 “천도는 대대로 벼슬해온 사람들과 세력가들 모두가 싫어하여 구실을 붙여 옮기지 못하게
방해한다. 재상들은 송도에서 오래 살았으니 도읍 옮기는 일이 어찌 그들의 마음에 들겠는가? 내 손으로 새 도읍을 정하려고 계룡산으로 가는
길이다”(태조실록 2년)라고 말했다.
그런 뒤 이성계는 직접 옛 고려 남경의 이궁터(한양)를 돌아보고 “여기가 도읍지가 될 만한 곳이다. 더구나 뱃길이 통하고 나라 안의 거리도
알맞으니 편리하다”고 소리쳤다. 무학대사는 단지 조언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성계의 강력한 의지, 정도전의 적극적 협조, 무학과 풍수가들의
조언으로 결정이 난 것이다.
1394년 8월이었다. 정도전 등은 궁궐과 종묘, 관아거리를 지정하고 주거지역으로는 고위 벼슬아치는 중심 궁궐과 종묘 사이의 뒤편(북촌
일대), 낮은 벼슬아치는 남산 아래 낮은 지대, 상인은 청계 냇가로 지정했다. 도성의 길이는 60여리에 달했다.
한양의 궁궐과 관아, 방리(坊里)와 길과 개인 주택은 산과 평지를 자연스럽게 이용한 탓으로 도시 규모가 정연한 모양은 아니었다. 한 가지
보기로 중심거리인 광화문에서 경운궁까지 황토재(지금 시청 옆 태평로)의 오솔길을 그대로 두고 직선 길을 뚫지 않았다. 다만 서대문~종로,
종로~남대문의 도로를 직선으로 뚫어 상가지역으로 지정했을 뿐이다.
그러나 사대문 안은 주민 10만여명이 살도록 만든 계획도시였다. 한양은 중세 국가의 도읍지로 손색이 없는 도시였다. 조선 중기 이후 도성
안에는 대체로 20여만명이 살았으나 좁은 줄을 몰랐다.
수도 한성의 ‘적’은 정씨 왕조설의 유행이었다. 변혁 세력들은 정씨 왕조설을 퍼뜨리고 그 왕도로 계룡산 신도안을 들먹였다. 이를 적어 놓은
비기인 ‘정감록’을 금서로 지정했으나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조선에서 처음 천도를 계획한 이는 광해군이었다. 조일전쟁(임진왜란)으로 서울의
궁궐은 물론 관아 건물과 벼슬아치들의 집도 거의 불에 타버렸다.
광해군은 이 참에 개혁의 일환으로 천도를 도모했다. 세도가들은 규정을 어기고 서울에 대궐 같은 큰 집을 짓고 살면서 지방에는 장원을 두어
대지주로 군림했다. 이들은 때때로 개혁정치를 방해했으며, 권력을 잡으려 당쟁에만 열중했다. 민심은 이반되어 정씨 왕조설이 계속 퍼지고 있었다.
광해군은 전쟁 시기 분조(分朝·왕권을 행사하는 특별 임무)의 일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누구보다 민심의 동향을 살폈다. 기득권 세력을 누르고 새
기풍을 불어넣어 민심을 되돌리는 방법은 도읍을 옮기는 것뿐이었다.
광해군은 1612년 천도 일을 논의해보라고 지시했다. 술사 이의신이 상소문을 냈다. 그는 “임진년의 병란과 역적의 변이 잇달아 일어난
것과, 조정 신하들이 당파로 갈라진 것, 서울 주변의 산들이 벌겋게 벗어진 것 모두가 한양의 지기(地氣)가 쇠잔한 소치라고 적고
교하(交河·임진강 입구)로 옮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을 폈다.
많은 조정 신하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지만 광해군은 교하에 토목공사를 벌이게 했다. 하지만 기초공사가 진행될 때 명나라가 후금을 공격하면서
지원군을 요청해 와서 중지하고 말았다. 1만5천여명의 지원군 경비를 마련하느라 재정을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의 천도의지는 이렇게
좌절됐다.
정조는 성 쌓기에 일반 백성이나 예전처럼 승군(僧軍)을 불러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인부와 장인을 모집해 노임을 주고 거처를 제공했다.
그리하여 2년7개월 만에 성 쌓기 공사가 완성을 보았다.
화성은 팔달산을 끼고 낮은 구릉을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성 중간에 작은 냇물이 흐르며 평지에는 방어호를 둘렀다. 총 둘레는
5,520m이다. 화성의 특징은 자연석을 다듬어 쌓은 전통적 형태가 아니라 벽돌을 섞어 사용하면서 돌의 규격을 맞추어 축조했다는 점이다. 주민이
거주하는 읍성의 기능을 하면서 방어성으로서의 역할도 겸하게 한 것이다.
정조는 왜 막대한 물량을 들이면서 이 성을 쌓았을까?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을까. 옷도 기워 입을 정도로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한 정조가 단순히 효도하려 이런 역사를 벌였겠는가? 아니다.
정조는 “호위를 엄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요, 변란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 장차 내 뜻이 성취되는 날이
올 것이다”(정조실록 15년)라고 말했다. 또 윤행임이 쓴 비문에는 “화성을 쌓은 데에는 은근한 의도가 있어서 초당을 노래당(老來堂), 정자를
미로한정(未老閑亭)이라 이름 붙였다. 하지만 끝내 몇 년 뒤에 세상을 떠나 천고의 제왕들에게 없던 훌륭한 사적들이 당대에 나타나지 않았다”라고
했다.
노래당은 늙어서 살집, 미로한정은 늙지 않아서 한가롭게 지낼 정자라는 뜻이다. 그 자신이 와서 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말이다. 바로 왕도를
옮기겠다는 표현일 것이다. 서울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세력들은 이 의도를 엿보고 몸을 떨었다. 화성으로 천도하는 날, 기득권이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내놓을 지경으로 빠질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정조의 독살설과 천도문제가 관련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
오늘날 서울은 교통 혼란이 보여주듯 모든 것이 만원이다. 이를 해결한 방법은 무엇일까? 행정수도를 옮기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예전
기득권 세력을 누르기 위해 천도하는 것과 전혀 다를 것이다. 오늘날은 교통 통신이 발달되어 지역개념이 사라졌다. 또 강력한 신무기가 발달되어
있다. 이런 조건에서 수도가 꼭 나라의 중심부에 자리잡을 까닭이 없다. 서울은 상업·무역·금융·문화도시로 육성하면서 인구를 분산시켜 좀더 쾌적한
생활조건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 정조가 화성 쌓은 뜻은 -
더욱이 백성들이 임금의 행차를 보고 격쟁(擊錚·징을 두드림)케 하여 억울함을 들어주었다. 또 화성 언저리의 소나무를 보호키 위해 솔잎을
갉아먹는 송충이를 잡아 입으로 씹어 죽이기도 했다.
화성은 본디 외적의 침입 루트가 아니었다. 또 상업지역에는 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곳에 거대한 성을 쌓은 의도는 바로 천도를 위한
공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의 죽음을 두고 말들이 많았다. 그는 49세에 들어 악성 종기를 앓았다. 온갖 처방에도 낫지 않자, 마지막으로 수은을 태운 연기로
종기를 치료하는 연훈방(煙熏方)을 쓰기로 했다. 그래도 차도가 없었다. 어의들은 날마다 정조의 병세를 정순대비 김씨에게 보고했다. 어느날
정순대비는 손수 탕약을 들고 들어가 어의를 내보냈다.
잠시 뒤 정순대비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 어의들이 황급하게 뛰어들어가자 정조는 중태에 빠져 있었다. 정조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수정전(壽靜殿)이라 중얼거렸다. 행장을 쓴 이시수는 “할 말이 있다”는 뜻이라고 했지만 이 말은 곧 정순대비가 거처하는 곳을 가리킨 것이다.
죽음을 두고 정순대비에게 혐의를 두기도 했다. 정순대비의 친정붙이는 정조를 반대한 벽파였으며 오빠인 김귀주는 유배지에서 죽었으니 그녀의 복수심이
결국 정조를 죽게 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정조는 종기가 처음 번질 적에 울화병 또는 심화병 탓이라 했다. 종기는 바람을 쏘여서는 안된다고 하여 한 여름에도 문을 꼭꼭 닫아걸고
뜨거운 탕약을 수없이 마셨으며 수은 치료까지 받았다. 게다가 마지막 일주일은 억지로 미음 몇 모금을 넘길 정도였다. 울화병, 더위와 탈진,
그리고 영양실조가 목숨을 재촉했을 것일까. 아니면 정순대비가 먹인 탕약 탓일까.
정조가 죽고 난 뒤 정순대비는 어린 순조를 끼고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조의 개혁정치를 모조리 뒤집어 놓았다. 정조의 세력인 시파를 몰아내려는
공작의 하나로 천주교도를 탄압하여 무수한 살육을 저질렀다. 정조가 천도를 하고 진정한 개혁정치를 폈다면 조선 말기의 역사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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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그는 계룡산 일대를 돌아보고 곧바로 천도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쳐 있고
배산역수(背山逆水)여서 패망할 지세라는 반대여론이 일었다. 그리하여 1년쯤 진행된 공사를 중지시켰다.
정조는 1792년 초여름 정약용을 조용히 불렀다. 정조는 수원에 새 성을 쌓겠다는 뜻을 밝히고 좋은 방책을
강구해보라고 이르고 관련 도서를 내려주었다. 정약용은 고심 끝에 기중가(起重架)의 설계도면을 바쳤다.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도구였다. 정조는
1794년부터 화성(華城) 쌓기 공사에 착수했다.
화성(수원)에는 정조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수원은 곧 정조의 도시였다. 정조는 양주에 있던
아버지의 무덤을 화성군 태안으로 옮기고 현륭원(뒤에 융릉으로 고침)이라 했다. 그가 화성 나들이를 할 때 한강에 수백척의 배들을 모아 배다리를
놓게 했으며 많은 신하와 군사를 거느리고 위의를 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