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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바로보기] 15. 황도유학파의 친일행각

*미카엘* 2005. 3. 3. 13:12

황도유학파의 친일행각

 


35년간 식민지 지배를 받은 동안, 나라를 팔아먹은 데에 앞장선 매국노도 있었고, 식민지 정책수행의 총지휘부인 통감부 또는 총독부에 적극 협력한 부역배도 있었다. 그들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이른바 일본 천황으로부터 작위와 은사금 등 많은 특혜를 받아 떵떵거리면서 살았다.

 

총독부의 관리가 되거나 끄나풀이 된 직업적 친일분자들이 있었다. 대개 양반 출신 또는 지방의 유지들이었으나 고등고시 등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발탁된 자들도 있었다. 하급직으로는 헌병과 경찰의 보조원, 그리고 밀정 따위가 있었다. 이들은 통감부 시절부터 의병 토벌 때 정보를 제공했으며, 독립투사들의 동정을 살피기도 했다.

 

이와 달리 1930년대 전시체제 아래에서 지원병으로 동원된 청년들이 있었다. 농촌경제가 파탄이 난 시대상황에 따라 목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군대에 지원했던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생계형 친일파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이른바 황도유학파의 친일행각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일제는 친일파를 만드는 과정에서 지난날 온갖 특권을 누리며 지배세력으로 군림했던 전통 유림들을 특별히 주목했다. 그리하여 전통유림들을 회유하거나 이권을 주어 총독부 정책에 협조하는 방향으로 유도했다. 많은 유림들은 초기 단계에서는 의병봉기에 나서거나 군 자금을 대는 등 항일운동에 가담했다. 완전 식민지 상태로 빠져들어 양반이나 유생의 특권이 배제되자 복벽파(復벽派)로 자임하면서 왕의 추대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삼일운동 뒤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고토(齋藤實)는 유생의 친일화 공작을 서둘렀다. 총독부에 등을 돌린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유생들을 이용하려는 공작이었다. 이에 대해 강동진은 “유생은 지방의 중소지주일 뿐만 아니라 명망가이자 유식층이며 또 합방후 관리로 취직도 못한 계층이기 때문에 배일감정도 세고 더구나 근대교육을 받은 많은 유생의 자제들은 반일운동의 핵심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른바 황도유학(皇道儒學)이 대두되었다. 황도유학을 주도한 자들은 위유(僞儒)·부유(腐儒)들이었다. 황도유학의 출발은 성균관의 개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8년 한국통감부에서는 성균관 학칙을 제정하여 고등보통교육기관으로 개편했다.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특수성을 배제하려는 의도였다.

 

그런 뒤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경학원 규정을 제정하여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개편했다. 경학원이 성균관을 승계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대제학, 부제학, 좨주(祭酒) 따위의 조선시대 관직명을 사용했을 뿐 일개의 교화기관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종래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인 대사성을 대제학으로 승격시키는 제스처를 썼으나 완전한 허울이었다.

 

개편 당시 일본 천황의 은사금 25만원과 조선총독부의 보조금으로 운영케 했다. 경학원 규정에는 “경학원 대제학은 조선총독의 지휘감독을 받들어 경학원의 사무를 총리한다”고 돼 있었다. 총독부 교화기관으로 지정한 것이다.

 

그 뒤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해 13도에 강사를 두었다. 1913년 경학원 잡지를 창간했고 1930년 명륜학원을 경학원 부설로 개교했다. 경학원 잡지에는 일본인이 고문으로 참여했으며 명륜학원의 초대 학감은 일본인이 임명되었다. 향교의 재산은 부와 군에서 관리하게 했다.

 

또 지방 향교를 거점으로 지방의 유림동태를 사찰했으며, 사상적 이탈이 없게 유림단체를 조직화하는 일을 병행해 나갔다. 따라서 경학원과 그 소속의 향교와 부설기관은 황국신민의 교화와 조선총독부 통치에 순응하는 사상선도에 앞장섰다.

 

경학원은 세포조직으로 조선유도연합회를 조직했다. 1935년 평양에서 전선유림대회를 개최하고 1939년 경학원 주최로 전조선유림대회를 열고 중앙에 조선유도연합회, 도에 유도연합회, 부군도(府郡島)에 유도회를 두었다. 전시체제의 시기였던 1939년에는 총독부 정무총감을 총재에 추대했다. 조선유도연합회와 그 산하 조직은 완전한 유림의 통합조직이면서 친일조직이 되었다.

 

그밖에 친일유교단체가 총독부의 지원에 힘입어 경쟁적으로 결성되었다. 그 주요 단체는 공자교, 대동사문회, 유도진흥회, 조선유교회, 대동유림회, 대성학회, 명륜회, 모성회, 유림단, 태극교회, 황도회(皇道會) 등 손으로 뽑을 수 없을 정도로 난립했다. 모두 사문(斯文·유교의 글)이니, 명륜(明倫·인륜을 밝힘)이니, 대성(大成·공자를 뜻함)이니 따위의 그럴 듯한 이름을 내걸었다.

 

이들 단체가 벌이는 천장절(天長節·일본 천황의 생일)의 축하식 따위에 조선총독이나 정무총감이 참석하여 축사나 격려사를 했다. 식장에는 순사들이 파견되어 경비를 맡아주었다. 이런 친일행각의 대가로 총독부에서 일정한 보조금을 지원 받았으며 여러 가지 부역의 면제 등 특혜를 받았다.

그러면 여기에 참여한 군상을 보자. 경학원의 대제학에는 박제순·김윤식·정만조·윤덕영 등, 부제학에는 이용직·박기양 등, 사성으로는 이인직·안인식 등, 강사로는 성낙현·여규형·송병순 등이었다. 명륜학원 평의원으로는 어윤적(경성)·신창휴(충북)·성낙현(충남)·이강원(전북) 등이었다.

 

공자교의 발기인은 여규형·김학진·정만조·윤덕영·이인직·정병조 등이요, 회장에는 이용직·김학진·전우 등이 역임했다. 대동사문회의 발기인은 어윤적·정만조·현채·홍희 등, 회장에는 윤용구, 부회장에는 어윤적이 역임했다. 조선유교회의 대표자로는 김경중·민건식·안익식 등, 조직을 이끄는 종도정에는 윤용구, 이론을 밝히는 명리원에는 지석영·정병조 등이었다. 지방의 의정으로는 송복헌(충북)·김철수(충남)·현준호(전남)·성낙문(경남) 등이었다. 조선유림연합회의 고문으로는 박영효·민병석·윤덕영·이윤용·어담·한상룡·박중양·현준호·김갑순·김성수·김연수 등이며 회장은 현영운, 부회장에는 민건식이 추대되었다.

 

이들은 새삼스레 신분을 설명한 것도 없이 당색으로는 조선시대 지배권력을 잡았던 노론계열, 관료로는 구한말 고위의 벼슬을 지낸 인물, 그리고 나라를 팔아먹는 데에 앞장섰던 매국노들, 문벌로는 여흥 민씨와 동래 정씨, 해평 윤씨, 전주 이씨, 반남 박씨, 정치적 계보로는 개화파들이었다. 더욱이 지방의 유력 지주인 김갑순·김경중·현준호 등과 명망가인 성낙현·성낙문 등도 끼어 있었다.

 

게다가 반일에 누구보다 철저했던 흥선대원군의 손자들, 일제의 손에 죽은 민비의 친정붙이들, 순종의 왕비 일가들, 부패한 나라를 바로 세우려 질타했던 박지원의 손자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음에 역사의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든, 뱃심이 두둑치 못해 강요를 거절할 수 없었든 치졸한 친일행각을 벌였던 것이다.

 

- 전통유림과 파리장서 사건-

 

1919년 조선독립선언을 선포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는 어찌된 일인지 유림대표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세 가지로 추리할 수 있다. 하나는 너무 촉박하게 준비하면서 지방에 거주하는 유림의 거두에게 연락을 할 수 없었다는 것, 둘째는 유림에게 참여할 것을 종용했으나 유림들이 사도(邪道)라고 본 천도교·기독교도들과 이름을 나란히 적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는 것, 셋째는 유림들이 거절할 것을 미리 알고 아예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어쨌든 유림의 거두들로서는 체면이 서지 않았다. 이런 사정에서 파리장서사건이 일어났다.

 

유림들은 당시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여기에 조선독립을 청원하는 글을 보내자는 논의가 두 갈래에서 일어났다. 먼저 호서지방인 홍성에서 의병활동에 가담했던 김복한·안병찬 등이 중심이 되어 유림의 이름으로 청원서를 작성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영남 산청에 사는 곽종석 등이 중심이 되어 호서유림의 청원서와 같은 취지의 청원서를 작성했다. 두 계열의 유림들은 두 청원서의 내용을 절충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성주의 유림 김창숙이 망명을 결심하고 급박하게 상해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자 김창숙에게 유림 137명의 서명을 받고 곽종석을 대표 명의로 한 영남본을 들고 가게 했다. 이 영남본이 파리에 체재하고 있는 김규식에게 송달되었고 국내의 향교에도 배포되었다. 그런 뒤 성주의 유림인 송회근이 만세시위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사건의 전모가 탄로 났다. 송회근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 사실을 고백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관련자 500여명이 체포되었다. 총독부 당국은 삼일운동 뒤 이들을 회유하려는 공작을 꾸미고 있을 때여서 더욱 놀랐다.

 

곽종석은 74세의 고령으로 2년의 형기를 사는 동안 병을 얻어 보석되었으나 곧 사망했다. 김복한도 60여세의 고령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했다. 이를 두고 청원서의 내용이 긴 글이라 하여 ‘파리장서사건’이라 불렀고, 또 ‘제1차 전국유림단사건’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들 계열은 주로 향리에서 자제를 가르치며 살았다. 신사참배와 창씨 개명을 거부하는 등 비타협의 노선을 걸었다. 하지만 너무나 무기력했다는 비난을 면할 수는 없었다. 이들과 달리 국외로 망명한 유인석·이명룡·이승희 등 유림들은 간도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며 모진 고생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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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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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8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