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자료/여행 이야기
폐륜 군주를 끝까지 버리지 않은 신씨 부인을 생각하다...
*미카엘*
2006. 7. 23. 02:25
폐륜 군주를 끝까지 버리지 않은 신씨 부인을 생각하다...
[여행]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묘'에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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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동에서 우이동으로 가는 길의 도중에 조선의 제10대 임금인 연산군의 묘지(사적 362호)로 가는 길을 안내해 주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으면 근처에 왕릉이 있을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주택가를 향하고 있는 화살표가 매일 출퇴근하는 나에게 가끔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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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학동에서 우이동으로 넘어가다 보면 [연산군묘]에 대한 안내판을 볼 수 있습니다. |
ⓒ 이인배 |
언젠가 한번은 찾아가 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매번 그냥 지나쳐가던 내가 작심하고 사진기를 들고 연산군의 묘를 찾아가게 된 것은 지난 금요일(21일)이었습니다. 점심시간에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서 창동에 있는 세무서를 갔다가 오는 도중에 잠깐 둘러보고 가기로 하고 안내 표지판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연산군묘는 주택가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주택가 골목에 차를 주차해 놓고 연산군묘 앞에 가보니 관리사무소 바로 앞에 사적 362호임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관리사무소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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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묘 앞에 서 있는 비석... 사적 362라고 적혀 있습니다. |
ⓒ 이인배 |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연산군묘가 그동안 비공개로 관리되다가 7월 11일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기 시작했고, 두 달간의 시범 공개 후에 입장료 징수 여부를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연산군 묘, 11일 부터 시민에게 공개”, 오마이뉴스 7월 12일, 이정근 기자)
2006년은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난지 5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올해 연산군의 묘를 일반에게 공개하게 된 것입니다.
특별하게 입장료는 없이 앞에 비치된 방명록에 싸인을 하고 들어가라는 관리인의 말을 듣고서 방명록에 싸인을 하고 연산군묘로 향하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다지 넓지 않은 길이 언덕을 향해 있었고 그 길을 돌아서자 자그마한 묘 다섯 개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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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연산군묘를 만나게 됩니다. |
ⓒ 이인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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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개의 묘가 있습니다. |
ⓒ 이인배 |
다섯 개의 묘 중에 맨 위의 두 개는 연산군과 연산군의 아내 거창군 신씨, 그 아래에 의정궁주 조씨가, 그리고 맨 아래에 연산군의 사위 구문경과 딸이 나란히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폐주 연산군의 묘는 다른 조선의 왕릉과는 그 규모와 관리 상태가 형편이 없었습니다. 비석은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가야만 글자를 식별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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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륜군주 연산군의 묘... 비석의 글씨도 가까이 다가가야만 읽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
ⓒ 이인배 |
연산군은 1506년 31세의 나이로 왕위에서 쫓겨난 이후 두어달 만에 강화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연산군의 부인 신씨의 간청으로 7년 후인 1513년에 방학동에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는 연산군을 임금으로 대우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연산군일기’는 그에게 낙제의 점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연산군, 휘(諱) 융은 성종 강정 대왕(成宗康靖大王)의 맏아들이며, 어머니 폐비(廢妃) 윤씨(尹氏),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의 딸이 성화(成化) 병신년 11월 7일(정미)에 낳았다. 계묘년 2월 6일(기사)에 세자(世子)로 책봉(冊封)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명회(韓明澮) 등을 북경(北京)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5월 6일(정유)에 황제가 태감(太監) 정동(鄭同) 등을 보내어 칙봉(勅封)을 내렸다. 소시(少時)에,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동궁(東宮)에 딸린 벼슬아치로서 공부하기를 권계(勸戒)하는 이가 있으매,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즉위하여서는, 궁안에서의 행실이 흔히 좋지 못했으나, 외정(外庭)에서는 오히려 몰랐다. 만년(晩年)에는,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학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대신(大臣)·대간(臺諫)·시종(侍從)을 거의 다 주살(誅殺)하되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있었다. 드디어 폐위하고 교동(喬桐) 에 옮기고 연산군으로 봉하였는데, 두어 달 살다가 병으로 죽으니, 나이 31세이며, 재위 12년이었다”(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군일기 총서).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http://sillok.history.go.kr 참조)
연산군을 폐륜 군주, 폭군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한쪽 편에서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에는 연산군에 대한 동정적인 해석도 있다고 합니다.
연산군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폐륜적인 폭군이라는 평가를 내려서는 안되는 것처럼, 연산군에게 무조건적 동정적인 입장을 가져서도 안 될 것입니다.
현명한 군주로 인정받던 성종에게는 12명의 부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종은 군주가 제일로 생각해야 할 덕목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중에서 ‘제가’에 실패한 군주였습니다. 여자의 질투를 악으로 여겼던 조선의 높으신 양반들은 당시의 중전인 연산군의 생모를 폐비로 강등시키고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연산군이 왕이 된 이후 자신의 생모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그는 폭군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엄한 할머니(인수대비) 밑에서 자라난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죽음의 진실을 알게 된 이후에 올바른 이성을 요구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무리였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연산군은 19세에 조선의 최고 통치자가 된 이후, 31세에 왕위에서 쫓겨날 때까지 왕실과 조정에 무시무시한 폭군으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폐비 윤씨에 대한 감정 때문에 폭군이 되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폭군의 기질을 타고 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연산군의 묘를 둘러보면서 한때 역사가를 꿈꾸었던 중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그 당시에는 선생님으로부터 연산군은 폭군이라는 설명을 들으면서 머릿속으로는 폭군이라기보다는 개성이 강한 군주였고 그 시대가 소화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연산군을 그 시대가 소화하지 못하였는지, 연산군 자신이 그 시대를 이해하지 못했는지는 앞으로 다양한 자료와 평가를 통해서 조명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연산군의 묘를 둘러보면서 한가지 떠오르는 생각은 비록 조선의 신하들에게는 패륜 군주였지만 그의 아내인 신씨에게는 꽤 인정받는 남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폐주임에도 불구하고 강화도에 있는 시신을 옮겨달라고 간청한 신씨에 대한 기록과 함께 나란히 안치되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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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륜군주 연산군과 그의 부인 신씨의 묘가 나란히 있습니다... |
ⓒ 이인배 |
천하를 호령할 때에는 주색잡기에 빠져 다른 여자들과 놀아난 연산군이었지만, 폐위 된 이후 두달여만에 죽은 그를 끝까지 버리지
않은 사람은 조강지처인 신씨부인이었습니다. 그녀는 7년 후인 1513년에 중종에게 간청하여 지금의 연산군묘로 연산군의 시신을 옮겨왔으며, 자신도
죽어서 연산군의 옆에 묻힌 것입니다.
나란히 안치되어 있는 연산군과 신씨부인의 묘는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조금 새롭게
보였습니다.
한번 둘러보는 데 20분도 안되는 자그마한 연산군의 묘는 규모가 큰 다른 왕릉에 비해서 초라했지만, 나름대로 나에게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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