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이야기 41] 축구 변방의 희망으로 떠오른 북한
[제8회 월드컵] 1966년 제8회 월드컵 지역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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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제8회 월드컵

1966년 제8회 월드컵은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가 개최하기로 되었다. 개최국 잉글랜드와 전 대회 우승국인 브라질이 본선에 자동 진출하였고, 나머지 14장의 본선 티켓을 놓고 열띤 지역예선이 거행되었다.

14장의 본선 티켓은 유럽에게 9장, 남미에게 3장, 북중미에게 1장, 그리고 나머지 한 장의 티켓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의 최종 승자가 차지하기로 되어 있었다. 여전히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FIFA에 의해서 푸대접을 받고 있었는데, 아프리카의 팀들은 모든 경기를 포기하며 항의의 뜻을 표시했다.

# 유럽의 지역예선

유럽의 치열한 예선을 통과한 나라는 불가리아, 서독, 프랑스, 포르투갈, 스위스, 헝가리, 소련, 이탈리아, 스페인이었다.

이들 중에 2년 전 유럽축구선수권대회 3위이자 올림픽 챔피언인 헝가리와, 유럽축구선수권대회 우승국인 스페인, 그리고 준우승국인 소련이 예상대로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 4강에 올랐던 덴마크는 본선 진출이 좌절되었다. 덴마크는 유럽 지역예선 7조에서 소련, 웨일즈, 그리스에 이어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유럽 지역예선에서 행운을 얻은 팀은 불가리아였다. 그들은 유럽 지역예선 1조에 속했는데 벨기에와 3승 1패로 동률을 이루었다. 벨기에(+8)는 골득실에서 불가리아(+3)보다 앞서 있었다. 그러나 승점이 같은 경우 플레이오르를 치러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양 팀은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고, 결국 제3국인 이탈리아에서 불가리아가 벨기에를 2-1로 누르고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다른 어떤 팀보다 감격적인 순간을 경험한 팀은 포르투갈이었다. 그들은 한 번도 본선에 오른 적이 없는 팀이었는데, 유럽 지역예선 4조에서 강자들(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터키)과 만나게 되었다. 특별히 체코슬로바키아는 4년 전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하였고, 2년 전 올림픽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강국이었다. 그러나 에우제비오를 내세운 포르투갈은 4승 1무 1패로 체코슬로바키아(3승 1무 2패)를 따돌리며 첫 본선진출의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하였다.

예선 8조의 이탈리아는 마지막까지 본선 진출을 장담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와의 마지막 경기를 남겨놓은 시점에서 양 팀은 3승 1무 1패로 동률을 이루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스코틀랜드에게 패한 적이 있었지만 마지막 경기가 홈경기라는 이점이 있었다. 결국 마지막 경기에서 스코틀랜드를 3-0으로 꺾으며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다.

예선 5조의 스위스는 알바니아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5조의 마지막 경기는 북아일랜드와 알바니아의 경기였다. 당시에 북아일랜드는 3승 1무 1패로 스위스(4승 1무 1패)를 뒤쫓고 있었다. 알바니아가 5전 전패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아일랜드가 알바니아를 이길 경우 스위스는 북아일랜드와 플레이오르를 치를 수 밖에 없었다. 북아일랜드는 알바니아를 당연히 이길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지만 결과는 1-1 무승부였다. 알바니아의 무승부는 결국 스위스의 본선 진출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결과가 되었다.

잉글랜드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영국에 속한 나머지 세 팀은 지역예선을 통하여 결국 본선 진출에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다. 스코틀랜드는 이탈리아의 벽을 넘지 못했고, 웨일즈는 선전했지만 소련의 벽을 넘지 못하고 말았다. 북아일랜드는 알바니아에게 충격의 무승부를 기록하며 본선 진출에 성공하지 못했다.

# 남미와 북중미의 지역예선

제1조에서 우루과이는 페루와 베네주엘라와 한 조가 되었다. 우루과이는 과거보다 전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평가를 받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썩어도 준치’라는 평가를 받으며 4승으로 1위를 차지하고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제2조의 칠레는 에콰도르, 콜롬비아와 한조가 되었다. 칠레는 비록 지역예선을 통과하기는 했지만 에콰도르와 플레이오프까지 가는 접전을 벌이며 힘겹게 본선 티켓을 확보했다. 4년 전 월드컵 3위인 칠레는 하마터면 본선에도 오르지 못하는 수모를 당할 뻔했다.

3조에서는 아르헨티나가 3승 1무로 파라과이, 볼리비아를 제치고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다. 아르헨티나는 최근의 국제대회에서 형편없는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여전히 남미에서는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브라질과 함께 남미 축구의 선두 주자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총 10개 팀이 참가한 북중미의 예선에서는 최종 라운드에 세 팀이 진출하였는데, 그 중에 멕시코가 자메이카와 코스타리카를 제압하며 북중미의 절대 강자의 이미지를 굳건히 하며 본선 티켓을 확보하였다.

# 축구 변방의 희망, 북한

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다른 지역은 여전히 축구의 불모지, 변방으로 인식당하고 있었다. 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는 단 두장의 본선 티켓이 할당되었다. 북중미는 그나마 한 장의 티켓을 배정받았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 오세아니아는 세 지역이 한 장의 티켓을 배정받는 차별 대우를 계속 받아야 했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지역에 속한 아프리카 팀들은 홈앤드어웨이 방식의 지역예선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본선 진출권을 유럽과 남미가 독점하면서 자신들의 지역에 한장도 배정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아프리카 팀들은 지역예선 참가를 모두 포기하여,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의 승자가 본선 진출을 위한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시아의 대표는 북한이었고, 오세아니아의 대표는 호주였는데, 북한이 호주를 6-1, 3-1로 꺾으며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최종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오세아니아의 대표가 된 북한으로서는 첫 번째로 참가한 월드컵 본선인 동시에 축구 변방의 자존심을 대변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졸지에 축구 변방의 희망으로 떠오른 북한은 1947년 국제 시합에 처음으로 데뷔하였고, 1950년대 말부터 월드컵을 겨냥하고 대표팀을 단련시켜왔다. 그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라이벌 한국을 뛰어넘는 것이었는데,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조직력에서는 뛰어난 팀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본선 진출은 세계 축구팬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저 월드컵에 어쩔수 없이 한 자리가 할당된 약체들의 모임에서 어쩌다가 승자가 되어 본선에 합류한 팀으로 인식되었다.

1966년 제8회 월드컵 본선 조편성

1966년 제8회 잉글랜드 월드컵 본선

제1조 : 잉글랜드, 우루과이, 멕시코, 프랑스
제2조 : 서독, 아르헨티나, 스페인, 스위스
제3조 : 포르투갈, 헝가리, 브라질, 불가리아
제4조 : 소련, 북한, 이탈리아, 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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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입니다.

[월드컵 이야기 37] 유럽과 남미, 자존심의 대결
[제7회 1962년 칠레 월드컵] 지역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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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미에서 열린 월드컵

두 번이나 유럽에서 월드컵이 열렸기 때문에 다음번 대회 경쟁에서는 남미가 유리했다. 서독이 제7회 월드컵을 개최하겠다고 나섰지만,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제7회 월드컵이 남미에서 열려야 한다는 남미 국가들의 주장에 대체로 동의하였다.

제7회 월드컵의 개최권을 놓고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경합을 벌였는데, 뜻밖에도 칠레가 개최권을 획득하였다. 아르헨티나는 계속적인 개최권 경쟁에서 실패하면서 그동안 FIFA의 결정에 반발했던 행동들이 다른 회원들에게 좋지 못한 모습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칠레 축구협회장 카를로스 디트본의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월드컵을 유치해야 한다”는 연설은 FIFA 위원들을 감동시키며 아르헨티나와의 유치 경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비록 개최지로 선정되었지만 칠레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지진과 화산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칠레는 경기장 확충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월드컵이 열리기 2년 전에 칠레를 강타한 지진은 국가의 존폐마저 위협하는 커다란 자연재해였다. 그러나 칠레 축구협회장 디트본과 칠레 국민들의 의지는 결국 월드컵 개최를 위한 준비를 마쳤다.

칠레 축구협회장 디트본은 사재까지 털어가면서 칠레가 월드컵을 유치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최선을 다했지만, 정작 월드컵이 열리기 32일 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면서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보지 못했다.

# 치열한 지역예선, 대륙 이기주의

제7회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는 노골적으로 축구의 변방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개최국인 칠레와 전 대회 우승국인 브라질이 중남미 국가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본선 티켓이 줄어들 것을 예상한 유럽의 입김이 작용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에게 한 장씩 할당된 본선 진출권을 놓고 유럽의 국가와 플레이오프를 치르도록 결정하였다. 그리고 북중미의 실력 또한 FIFA에 의해서 무시되기 시작하면서 북중미의 승자는 남미의 파라과이와 플레이오프를 치르도록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월드컵의 수준을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숭고한 의미와 함께, 자기들 대륙에 할당된 본선 진출권을 한 장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대륙 이기주의가 작동한 결과였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이러한 부당한 결정으로 어려운 지역예선을 치르게 되었다.

# 유럽의 지역예선

유럽의 지역예선에서는 전 대회 준우승 스웨덴이 스위스에게 플레이오프 끝에 패하고 탈락하고 말았다. 만약 골득실이 순위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면 스웨덴이 본선에 오를 수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승점이 같으면 플레이오프를 치르도록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스웨덴은 끝내 본선 진출에 실패하게 되었다.

2조의 프랑스 역시 골득실에서는 불가리아보다 높았지만 승점이 같았기 때문에 불가리아와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고, 제3국(이탈리아)에서 열린 플레이오프에서 0-1로 패하면서 본선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8조의 체코슬로바키아는 스코틀랜드와 3승 1패로 동률을 이루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스웨덴과 프랑스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 그들은 골득실에서 스코틀랜드보다 앞섰지만 규정상 플레이오프를 치렀는데, 연장승부 끝에 4-2로 승리하며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다.

전통의 강호 헝가리는 4조에서 네덜란드와 동독을 제압하며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다. 오늘날 정상권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 네덜란드는 아직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이류권 국가로 추락해 있었다. 동독은 서독의 화려한 모습 덕분에 더욱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2년 전인 1960년 유럽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5조의 소련은 터키와 노르웨이를 제압하며 무패의 전적으로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축구 종주국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선봉장인 잉글랜드는 포르투갈과 룩셈부르크를 제치고 6조에서 1위를 기록하여 본선 진출에 합류하였다.

# 남미의 지역예선

개최국과 전 대회 우승국이 자동으로 본선에 진출하고 3장이 할당된 남미의 지역예선에는 7개 팀이 참가했는데, 그중에 파라과이가 북중미 승자와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어 6개 팀이 3장의 티켓을 놓고 격돌했다.

아르헨티나는 약체로 지목된 에콰도르에게 2승을 거두고 본선에 무난히 합류했다. 우루과이는 홈경기에 유난히 강한 볼리비아의 홈에서 1-1로 비기며 고전했지만 홈에서 2-1로 승리하며 본선 티켓을 획득했다. 고만고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콜롬비아와 페루의 경기에서는 홈경기에서 1-0으로 승리한 콜롬비아가 1승 1무로 본선 티켓을 확보하였다.

# 축구의 변방, 어려운 조건의 지역예선을 치르다

유럽의 제7조는 복잡한 구성원으로 지역예선을 치렀다. 지역적으로는 아시아에 속했지만 정치적, 종교적인 이유로 아시아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이스라엘이 첫 번째 라운드에서 키프로스를 제압하고 두 번째 라운드에서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를 2승으로 누르고 결승 라운드에 진출하였다. 이스라엘의 결승 라운드 상대는 루마니아의 기권으로 결승 라운드에 무혈입성한 이탈리아였다. 결승 라운드에 오르기까지 두 번의 라운드를 통과한 이스라엘은 현격한 실력의 차이를 느끼며 이탈리아에게 두 번 패하고 월드컵 본선 진출이 좌절되었다.

아프리카에 할당된 티켓을 위해서 우선 아프리카 팀들이 격돌한 지역예선에서 모로코가 튀니지와 가나를 제치고 승자가 되었는데, 그들로서는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서 또 하나의 험한 산을 넘어야 했다. 그들의 상대는 웨일즈를 1승 1무로 꺾고 올라온 9조의 스페인이었다. 모로코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두 번 다 패하며(0-1, 2-3) 아프리카에 배정된 한 장의 티켓을 유럽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아시아에 할당된 티켓을 위해서는 한국이 일본을 제압하고(2-1, 2-0) 최종 승자가 되었지만, 유럽의 제10조에서 폴란드를 꺾고 올라온 유고슬라비아에게 5-1, 3-1로 패하며 아시아에 배정된 한 장의 티켓을 유럽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북중미 역시 FIFA에 의해서 그 지역의 최종 승자와 남미의 파라과이가 플레이오프를 치르는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북중미의 승자인 멕시코는 홈에서 1-0으로 승리하고, 어웨이 경기에서 0-0으로 비기며 1승 1무로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다.

# 유럽과 남미, 자존심의 대결

본선에 오른 16개의 팀이 4개조로 나뉘어 상위 2팀이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방식이 완전히 정착했는데, 남미의 4개 나라(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와 약체로 알려진 4개 나라(멕시코, 콜롬비아, 스위스, 불가리아)에게 시드를 배정하여 각기 다른 조에 편성하고 나머지 유럽의 8개국을 무작위로 추첨하여 조를 편성하였다.

1조 : 소련, 유고슬라비아, 우루과이, 콜롬비아
2조 : 서독, 칠레, 이탈리아, 스위스
3조 : 브라질, 체코슬로바키아, 멕시코, 스페인
4조 : 헝가리, 잉글랜드, 아르헨티나, 불가리아

남미축구의 기술에 밀리기 시작한다고 느끼기 시작한 유럽은 1960년 유럽선수권대회를 통해서 실전감각을 익혔고, 강력한 파워축구를 바탕으로 적지(남미)에서 월드컵을 탈환하려고 하였다. 이에 비하여 남미는 남미대로 유럽을 제압하고 확실한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화려한 기술을 바탕으로 대회 2연패를 노리는 브라질을 선두로, 남미 축구에서 명예회복을 노리는 아르헨티나, 과거의 명성을 되찾으려는 우루과이, 그리고 개최국 칠레가 남미 축구를 이끌고 있었다면, 유럽의 축구는 유럽선수권 우승자 소련, 올림픽 챔피언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하여, 축구 종주국의 명예를 찾기 위해 참가한 잉글랜드, 전통의 강호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우승의 경험이 있는 이탈리아와 서독이 정상을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자존심의 대결은 자연스럽게 거친 경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충분했으며, 역사적으로 가장 거친 대회가 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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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입니다.

[올림픽 축구 14] 남미축구의 자존심을 회복하라!
1960년 로마 올림픽 축구 지역예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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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로마 올림픽 축구대회

1960년 로마 올림픽은 개최국 이탈리아를 포함하여 지역예선을 통과한 15개 팀이 본선에 합류했다. 유럽에서 7개국(덴마크, 폴란드,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영국, 프랑스, 헝가리), 아메리카 대륙에서 3개국(아르헨티나, 페루, 브라질), 아프리카에서 2개국(이집트, 튀니지), 아시아에서 2개국(인도, 대만), 그리고 근동에서 1개국(터키)이 참가했다.

# 유럽 대륙의 지역예선

유럽의 지역은 총 7개의 티켓이 걸려 있었는데 대부분 강자로 인정받은 팀들이 지역예선을 통과했다.

덴마크는 아이슬란드와 노르웨이를 제압하며 본선에 합류하여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힘찬 출발을 했다. 세 번 연속으로 올림픽에서 준우승에 머물렀던 유고슬라비아는 네 번째 도전을 위해 이스라엘과 그리스를 따돌렸는데, 이스라엘로서는 2승 1무 1패로 유고슬라비아와 동률을 이루었으나 골득실에서 밀려 탈락하고 말았다.

영국은 아일랜드와 네덜란드를 제압하며 본선에 올랐는데, 네덜란드로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내세울만한 성적을 내지 못하며 고국의 축구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프랑스는 룩셈부르크와 스위스를 제압하며 여전히 강자의 면모를 유지했다.

유럽의 치열한 지역예선을 통과한 팀들 중에 두각을 나타내는 나라도 있었다. 그 중에 동유럽의 폴란드는 전승(4승)으로 서독(1승 3패)과 핀란드(1승 3패)를 꺾으며 자신들이 강함을 증명했다. 그 밖에 헝가리는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와 한조가 되었지만 4승으로 체코슬로바키아(1승 1무 2패), 오스트리아(1무 3패)를 제치고 본선에 올라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올랐다.

지역예선 이변의 주인공은 불가리아가 차지했다. 불가리아는 2승 1무 1패를 기록하며 디팬딩 챔피언 소련(1승 2무 1패)과 루마니아(1승 1무 2패)을 따돌리며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다.

# 아시아, 아프리카, 근동의 지역예선

아프리카에서는 첫 번째 라운드에서 튀니지가 모로코와 몰타를 따돌리고 최종 라운드에 진출했고, 이집트는 가나와 나이지리아를 제압하며 최종 라운드에 진출했다. 수단은 이디오피아와 우간다를 제치며 최종 라운드에 진출했으나 이집트(3승 1무), 튀니지(1승 1무 2패)에 이어 1승 3패로 3위를 차지하여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그 밖에 아시아에서는 대만과 인도가 일본, 한국 등을 따돌리고 본선에 합류하였고, 근동 지역에서는 터키가 이라크와 레바논을 제치고 마지막 남은 본선 티켓을 획득하였다.

# 아메리카 대륙의 지역예선

1960년 지역예선에서 아메리카 대륙이 하나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3장의 본선 티켓을 놓고 격돌하였다. 북미에서는 멕시코와 수리남이 최종 라운드에 진출했고, 남미에서는 칠레를 누른 아르헨티나, 콜롬비아를 제친 브라질, 우루과이를 꺾은 페루가 최종 라운드에 진출했다. 총 다섯 개 나라가 3장의 본선 티켓을 놓고 격돌한 최종 라운드에서 아르헨티나가 4승으로 1위를 차지했고, 2위는 브라질을 2-0으로 격파한 페루가 차지하였다. 브라질로서는 아르헨티나와 페루에게 패했지만 나머지 북미의 멕시코와 수리남을 격파하며 간신히 본선 티켓을 확보할 수 있었다.

# 남미 축구의 자존심을 회복하라!

프로의 참여가 허용된 월드컵에 비해서 올림픽의 무대에서 남미의 위치는 그다지 확고하지 않았다. 1924년과 1928년 올림픽에서 우루과이가 돌풍을 일으키며 우승한 이후, 남미의 축구는 네 번의 올림픽 무대에서 단 한차례도 4강 진출을 이루지 못했다. 유능한 선수들이 일찍 프로의 무대에 뛰어들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남미 축구로서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지역예선을 통과한 남미의 세 나라는 나름대로 남미 축구의 자존심을 회복해야 할 사명이 있었다. 월드컵(프로)의 무대에서는 축구의 양대산맥을 형성하고 있지만, 올림픽에서의 부진함을 털어버리기 위해서 우선 아르헨티나가 주목을 받았다. 그들은 탄탄한 실력으로 지역예선에서 6전 전승(25득점, 6실점)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에 반드시 본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되었다.

다음으로는 비록 지역예선에서는 페루와 아르헨티나에게 패했지만, 2년 전 월드컵을 기억하는 세계의 축구팬들에게 브라질은 강력하고 화려한 팀으로 확실히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브라질 또한 지역예선과 본선은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본선에서 지역예선에서의 부진을 씻으려고 벼르고 있었다.

페루는 지역예선에서 브라질을 2-0으로 격파하며 2위로 본선행을 확정지었지만, 세계의 무대에는 낯선 팀이었다. 그러나 남미의 축구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증명해 보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1960년 로마 올림픽을 기다리는 세계의 축구팬들은 남미 축구가 아마추어의 무대에서도 그들의 뛰어남을 증명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 새로운 경기 방식의 도입

1960년 로마 올림픽 축구 대회에서는 과거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본선 대회를 진행하였다. 한번의 경기로 초반에 탈락하는 토너먼트 방식에서 4개 팀이 한 조가 되어 조별리그를 벌이고, 그들의 승자가 준결승에 진출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본선에 참가한 팀들에게는 각자 3번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그 기회를 잘 살려서 각 조의 최종 승자가 되는 것이 첫번째 목표가 되었다.

 

# 1960년 로마 올림픽 축구 본선 조편성

 

1조 : 유고, 불가리아, 이집트, 터키
2조 : 이탈리아, 브라질, 영국, 대만
3조 : 덴마크, 아르헨티나, 폴란드, 튀니지
4조 : 헝가리, 프랑스, 페루,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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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도 올립니다.

[월드컵 이야기 30] 치열한 지역예선, 제6회 스웨덴 월드컵
[제6회 월드컵] 지역예선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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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변으로 본선 진출이 좌절된 나라들


제6회 스웨덴 월드컵의 지역예선은 치열했다. 그 중에는 충분히 본선에 오를 수 있는 실력을 갖고 있었지만 좌절한 국가들이 많았다. 그들 중에 월드컵을 2번이나 거머쥐었던 이탈리아와 우루과이의 지역예선 탈락은 더 이상 축구에는 절대강자가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다섯 번의 월드컵 중에 이탈리아와 우루과이가 두 번씩 우승컵을 차지하였고, 서독이 한번 우승컵을 차지하였다. 서독은 전 대회 우승국 자격으로 본선에 무혈 입성했고, 이탈리아와 우루과이는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지역예선을 치러야 했다.

이탈리아와 우루과이는 무난히 본선에 오를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란히 사이좋게 지역예선에서 탈락하는 이변을 낳았다.

이탈리아는 북아일랜드, 포르투갈과 한조가 되었는데 홈경기에서는 두 번 다 이겼지만, 어웨이 경기에서 두 번 다 패하면서 북아일랜드에게 본선 진출을 허용하고 말았다. 특히 북아일랜드와의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는 비기기만 해도 본선에 오를 수 있었던 경기였는데, 1-2로 패하며 탈락하고 말았다.

우루과이는 파라과이, 콜롬비아와 한조를 이루었는데, 약체로 꼽히던 콜롬비아와 비기는 바람에 파라과이가 1위를 차지하며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콜롬비아는 1무 3패로 최하위를 기록했지만 월드컵 2회 우승국인 우루과이를 잡으면서 파라과이의 진출을 도왔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네 경기에서 4골밖에 얻지 못한 우루과이의 공격력이 문제였다.

# 뛰는 자 위의 나는 자

헝가리는 불가리아, 노르웨이와 한조가 되었다. 4년 전까지만 해도 헝가리의 상대가 되지 않았던 불가리아와 노르웨이는 헝가리와 대등한 경기를 펼치며 선전했다. 헝가리로서는 전설적인 푸스카스와 콕시스의 공백으로 더 이상 무적의 팀이 아니었다. 비록 무적은 아니지만 여전히 헝가리는 강했다. 헝가리는 1954년 맴버(Jozsef Bozsik, Nandor Hidegkuti, Laszlo Budai, Gyula Grosics) 이외에 Lajos Tichy라는 젊은 피를 수혈하여 3승 1패의 성적으로 불가리아(2승 2패)와 노르웨이(1승 3패)를 따돌리고 본선에 합류하였다.

1958년 제6회 스웨덴 월드컵 본선 진출국

1958년 월드컵에는 개최국 스웨덴과 전 대회 챔피언 서독이 자동 진출하였고, 지역예선을 거쳐 14개 팀이 합류했다. 이들은 4개의 조로 나뉘어 각 조의 상위 2팀이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하게 된다.

1조 : 서독, 북아일랜드, 체코슬로바키아, 아르헨티나
2조 :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파라과이, 스코틀랜드
3조 : 스웨덴, 웨일즈, 헝가리, 멕시코
4조 : 브라질, 소련, 잉글랜드, 오스트리아
1930년대 이탈리아와 대등한 실력을 보이며 세계 최강의 실력을 자랑하던 오스트리아는 그 힘이 많이 소진되었지만, 네덜란드를 따돌리고 3승 1무의 성적을 거두며 화려한 부활을 꿈꿨다. 네덜란드는 1950년과 1954년 대회에 불참했기 때문에 월드컵에 대한 감각을 찾지 못하고 2승 1무 1패로 좌절해야 했다.

1956년 올림픽 챔피언 소련이 1958년 스웨덴 월드컵 본선에 오르기 위해서는 험난한 과정을 겪어야 했다. 소련을 마지막까지 괴롭힌 상대는 동유럽의 폴란드였다. 소련은 폴란드와 플레이오프까지 치르는 시련을 겪었지만 최고의 골키퍼 야신이 골문을 지키며 2-0으로 승리하여 월드컵에 처음 출전하는 감격을 누렸다.

남미에서는 브라질과 파라과이, 그리고 아르헨티나가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브라질은 쉬운 상대인 페루와 경기를 치렀는데 의외로 고전하며 1승 1무, 2득점 1실점이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이들에 비해 아르헨티나와 파라과이는 나란히 3승 1패의 성적으로 본선에서의 기대감을 한층 높였다.

한편 북중미의 멕시코는 미국과 캐나다를 제압하며 최종 라운드에 올랐고, 코스타리카를 1승 1무로 제압하며 본선 진출권을 획득하였다.

# 나는 자 아래의 뛰는 자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다는 옛말처럼 충분히 본선에 오를 수 있는 실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더 강한 상대를 만나서 본선 진출을 이루지 못한 나라들도 있었다.

아일랜드는 4년 전 스위스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프랑스의 벽을 넘지 못하고 본선 진출에 실패했는데, 4년 후 스웨덴 월드컵 지역예선에서는 잉글랜드의 벽을 넘지 못하고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벨기에는 4경기에서 16득점을 하는 놀라운 득점력을 선보이며 선전했지만 더 강한 상대인 프랑스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때 프랑스는 4경기에서 19득점을 하며 지역예선에 참가한 다른 모든 나라들보다 뛰어난 공격력을 선보였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프랑스의 탁월한 스트라이커로 본선에서 13골을 넣는 쥬스 폰테인(Just Fontaine)은 지역예선에서는 후보 선수에 불과했다.

그 밖에 루마니아는 유고슬라비아의 벽을 넘지 못했고, 포르투갈은 이탈리아를 잡으며 기대를 모았지만 결과적으로 북아일랜드의 진출을 도와주는 역할에 멈추고 말았다. 스페인은 스위스와 비기는 바람에 스코틀랜드에게 본선 진출을 허용하고 말았다.

남미의 볼리비아는 지금까지도 도깨비팀으로 불리고 있다. 그들은 홈에서는 무적에 가까운 성적을 올리고 있다. 고산지대인 그들의 홈에서 상대편은 제기량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번 지역예선에서도 볼리비아는 홈에서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이겼지만 어웨이에서 두 번 다 패하는 바람에 2위에 머물고 말았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그들의 최종 승자인 이스라엘이 유럽의 웨일즈와 플레이오프를 치르는 혹독한 과정을 거치며 탈락하여, 단 한 개의 본선 티켓을 유럽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 꼴찌들의 합창

화려한 성적으로 본선에 진출하는 팀이 있는 가 하면 아쉽게 탈락하는 팀이 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동네북이 되어 다른 팀의 승수 챙기기 위한 스파링 파트너로 전락하는 팀이 있다.

초창기 축구 역사에서 영국과 대등한 실력을 선보였던 1조의 덴마크는 지역예선에서 잉글랜드와 북아일랜드에게 두 번씩 패하며 동네북 신세로 전락하였다. 2조의 아이슬란드 역시 4패로 벨기에와 프랑스의 제물이 되었다. 3조의 노르웨이는 비록 최하위는 기록했지만 헝가리를 꺾는 이변을 일으켰다. 4조의 동독은 체코와 웨일즈에 이어 1승 3패를 기록하여 최하위를 기록하며 서독의 성공에 비해 비교되었다. 5조의 룩셈부르크는 4패(3득점, 19실점)로 자타가 공인하는 유럽의 최약체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6조의 핀란드 역시 전패의 대열에 동참하며 약체임을 증명했다. 7조의 그리스는 강호 유고슬라비아와 한차례 비기며 선전했지만 내리 3패를 기록하며 높은 세계의 벽을 실감해야 했다. 8조의 포르투갈은 이탈리아를 이기며 다른 꼴찌들과는 차원이 다름을 증명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9조의 스위스는 스페인과 비기면서 스코틀랜드의 1위를 도왔다.

남미 지역예선에서는 1조의 페루가 브라질과 접전을 벌이며 선전했다. 2조의 칠레는 볼리비아와 조 2위를 놓고 자존심 대결을 펼쳤으나 볼리비아가 홈에서 아르헨티나를 꺾는 바람에 3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3조의 콜롬비아는 예상대로 조 3위를 기록하며 탈락했지만 물귀신처럼 우루과이의 발목을 잡으며 파라과이의 진출을 도왔다.

북중미의 미국은 멕시코와 캐나다를 상대로 4패를 기록하며 스포츠 선진국이지만 축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편 과테말라는 3패를 기록하며 꼴찌의 대열에 동참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경기 전에 포기하는 경우가 속출하여 특별히 꼴찌를 정할 수도 없었는데, 그들의 최종 승자가 유럽의 웨일즈에게 패하며 그들 전체가 꼴찌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버렸다.

[월드컵 25] 제5회 월드컵의 지역 예선과 본선 경기 방식
점차 세계적인 대회로 성장하고 있는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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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탄생 50주년을 맞이하여 1946년에 일찌감치 개최가 확정된 1954년 제5회 스위스 월드컵에는 총 45개 나라가 참가를 희망했다. 이 중에 개최국 스위스와 디팬딩 챔피언 우루과이는 지역예선을 거치지 않고 자동으로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고, 여섯 개의 나라(아이슬란드, 볼리비아, 코스타리카, 쿠바, 베트남, 인도)가 피파에 의해서 거절되어 총 37개 나라가 14장의 본선 진출 티켓을 놓고 지역예선을 치르게 되었다.

1954년 제5회 월드컵에는 당시에 축구 강국으로 분류된 나라들이 거의 다 참가하였는데(아르헨티나 제외), 명실상부 피파 월드컵이 세계 축구의 정상을 결정하는 독보적인 대회가 되는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 무패로 지역예선을 통과한 나라들

지역예선에서 전승으로 본선에 진출한 나라들은 3조의 잉글랜드, 4조의 프랑스, 9조의 이탈리아, 10조의 유고슬라비아, 11조의 브라질, 12조의 멕시코였다.

제3조는 피파에 의해서 혜택이 주어졌는데 네 개의 팀 중에 1위와 2위가 본선에 진출하는 자격이 주어졌다. 이것은 축구 종주국인 영국에 대한 피파의 배려였다. 영국에 속한 네 나라(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는 한 조가 되어 겨루었는데 잉글랜드가 3승을 차지하고, 스코틀랜드가 웨일즈와 비기면서 위기를 맞았으나(3-3), 북아일랜드가 웨일즈를 이기는 바람에(2-1) 최종 2위가 확정되어 본선에 진출하는 행운을 얻었다.

제4조의 프랑스는 아일랜드와 룩셈부르크와 한조가 되었는데 4승으로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고, 아일랜드는 2승 2패, 그리고 룩셈부르크는 4패를 기록하였다. 아일랜드로서는 프랑스의 벽을 넘지 못했고, 룩셈부르크는 아일랜드의 벽도 넘지 못했다.

제9조 이탈리아는 유일한 아프리카 팀인 이집트와 한조가 되었는데, 두 번 다 승리를 거두고 2승(2-1, 5-1)으로 가볍게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제10조의 유고슬라비아는 비교적 약체인 그리스와 이스라엘과 한 조가 되어 전승을 거두었지만 기록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그들이 거둔 4승은 모두 1-0의 승리였고, 4경기에서 4골이라는 골 결정력 부족이라는 숙제를 안고 본선을 기다려야 했다.

제11조는 남미의 국가들로 구성되었다. 우루과이가 자동으로 본선에 진출한 이후 브라질의 유일한 라이벌은 아르헨티나였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가 불참을 통보했으므로 브라질은 나머지 파라과이, 칠레, 페루를 상대로 전승을 거두며 본선에 합류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다. 이들 가운데 페루가 기권하는 바람에 브라질, 파라과이, 칠레가 두 번씩 경기를 치렀는데 브라질리 당연히 4승으로 본선에 진출하였다.

제12조는 북중미의 멕시코, 미국, 아이티가 한조를 이루었는데, 본선에는 힘을 거의 쓰지 못하는 멕시코는 지역예선에서는 상당히 강한 면모를 보였다. 한편 본선에서는 가끔 사고를 치며 좋은 성적을 거둔 바 있는 미국은 지역예선에서 멕시코만 만나면 힘을 쓰지 못했다. 결국 멕시코가 전승(4승)으로 1위를 차지하고 본선에 합류하였다.

그 밖에 2조의 벨기에가 3승 1무, 8조의 체코슬로바키아가 3승 1무, 5조의 오스트리아가 1승 1무로 지역예선을 통과하였고, 7조의 헝가리는 상대팀인 폴란드가 기권하는 바람에 본선에 무혈입성하는 혜택을 받았다.

제13조에 배정된 한국 역시 무패로 본선에 합류하였다. 원래 아시아에 배정된 한 장의 본선 티켓은 대한민국, 일본, 대만의 승자가 차지하기로 되어 있었다. 한국전쟁의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한국은 1948년 올림픽 출전 선수들을 중심으로 지역예선에 참가하였다. 대만이 기권하고 일본과 두 번의 경기를 홈앤드어웨이로 치러야 했는데, 한국 정부는 민족적인 감정으로 일본을 자국에 불러들이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그래서 결국 두 번의 경기는 모두 다 일본에서 치러졌고, 어웨이 경기라는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1승 1무를 기록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에 오르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하였다.

# 본선에 진출하지 못하고 탈락한 아쉬운 국가들

스웨덴은 벨기에와 핀란드와 함께 제2조에 속했다. 1950년 브라질 대회의 3위, 1952년 올림픽 동메달의 주인공인 스웨덴은 벨기에에게 연속으로 패하며 1승 1무 2패를 기록하였는데, 약체로 지목된 핀란드에게 한 번 비길 정도로 실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벨기에는 스웨덴을 누르고 3승 1무를 기록하며 본선에 진출하여 한층 기대를 받았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역시 본선 도전에 실패했다. 양 팀은 매번 지역예선에서 서로 만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주장하여 이번 지역예선에서는 서로 다른 팀과 본선 진출을 다투게 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로서는 오스트리아를 만나 1무 1패로 맥없이 탈락하고 말았다.

스페인은 어쩌면 당시 피파 규정이 낳은 최대의 피해자였다. 스페인은 터키와 1승(4-1), 1패(0-1)를 기록하였다. 오늘날로 따지면 골득실로 스페인이 본선에 진출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당시로서는 그러한 규정이 없어서 제3국인 이탈리아에서 재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이 재경기에서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양 팀은 다시 2-2로 비겼다. 결국 피파는 제비뽑기로 본선진출국을 결정하였는데 본선 진출의 행운을 얻은 주인공은 터키가 되었다.

터키로서는 당시 규정의 최대 혜택을 입고 골득실에서 뒤지고도 본선에 올랐지만, 이후 본선에서 당시 규정의 최대 피해자로 둔갑해 버렸다. 본선에서 서독과 같이 1승 1패를 기록했는데, 서독에게 골득실에서는 앞섰지만 승점이 같아서 플레이오프를 치렀고, 플레이오프에서 패하고 8강 진출이 좌절된다.

# 그 밖에

이 지역예선에 참가한 여러 나라 중에 자틀란드(Saarland, ‘자르’라고도 함)라는 팀이 있었다. 이 팀은 오늘날 독일의 한 주에 속해 있는 데 역사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프랑스에게 점령되어 정치적으로 자치권이 인정된 상황이었다(역사적으로 자틀란트는 1950년 서독의 수상 K.아데나워가 자를란트의 반환을 프랑스에 제안하였고, 1957년에 서독의 한 주로 편입되었다).

자틀란트는 노르웨이와 서독과 함께 유럽의 1조에 속해 있었는데, 1무 3패의 성적으로 지역예선에 참가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한편 서독은 주장인 F.Walter가 팀을 이끌고 Morlock, Rahn을 중심으로 고른 득점을 선보이며 3승 1무를 기록하여 1승 2무 1패의 노르웨이를 제치고 본선 티켓을 확보하였다.

# 독특한 경기 운영 방식

본선에 진출한 16개 팀은 이전과는 다른 시스템으로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이전 대회(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선보인 네 개 조로 나뉘는 방식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조금 특별한 시스템이 추가 적용되었다.

우선 참가 자격을 획득한 16개 팀 중에서 피파는 세계 랭킹에 입각해서 시드를 배정받은 두 팀과 나머지 두 팀을 한 조로 구성하여 총 4개조로 첫 번째 조별리그를 진행했다(피파에 의해서 시드에 배정된 국가는 오스트리아, 브라질, 잉글랜드, 프랑스, 헝가리, 이탈리아, 터키 그리고 우루과이였다).

원래 라운드로빈 방식으로 하자면 각 팀은 각자 세 번씩 경기를 치르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번 대회는 시드 배정 국가와 비시드 배정 국가들은 서로 경기를 할 수 없도록 했다. 그래서 각 팀은 두 경기씩 치러 순위를 결정해야 했고, 상위 두 팀이 8강 토너먼트에 진출할 수 있었다.

8강 토너먼트 역시 조금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대부분 각 조의 1위 팀은 다른 조의 2위나 3위 팀과 상대하는 것이 일반적인 조별리그-토너먼트의 진행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대회에서는 그러한 상식과는 다르게 조별리그를 통과한 팀들 중에서 1위 팀은 1위 팀끼리 준준결승에서 만났고, 2위 팀은 2위 팀끼리 준준결승에서 만나게 되었다. 조별리그에서는 죽음의 조가 없었지만 8강 토너먼트가 죽음의 토너먼트로 바뀌어 버렸다. 결국 이 죽음의 토너먼트의 희생자들은 각 조에서 1위를 차지한 나라들(헝가리, 브라질, 우루과이, 잉글랜드)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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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입니다. 

[월드컵 20] 제4회 월드컵 : 불참과 포기가 속출한 지역예선
제4회 월드컵 개최 배경과 지역예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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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이후 첫 번째 월드컵

제2차 세계대전은 올림픽뿐만 아니라 월드컵에도 영향을 끼쳤다. 1938년 프랑스 월드컵 이후 1942년 월드컵은 독일과 아르헨티나, 브라질이 개최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독일은 그들은 1938년 월드컵을 프랑스에게 양보한 것을 이유로 다음번 개최를 강력하게 희망하고 있었다. 반면 남미는 2회와 3회 대회가 유럽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차기 대회는 남미에서 개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1938년 파리 총회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 FIFA는 2년 뒤인 1940년 룩셈부르크 총회에서 최종적으로 개최지를 선정하기로 결정했다. 그 동안 줄리메 회장은 남미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와 타협을 시도하였고, 차기 대회는 거의 아르헨티나로 결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전 유럽이 전쟁에 휩싸이면서 1940년 룩셈부르크 총회도 무산되고 1942년 월드컵 역시 무산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1946년에 룩셈부르크에서 모인 FIFA 총회는 제4회 대회를 브라질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특별히 이 총회에서는 참가국과 개최국에게 준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해서 제5회 대회(스위스)와 제6회 대회(스웨덴) 개최지도 확정해 버렸다.

#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

전쟁의 기간 동안 축구는 세계적으로 빠르게 보급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의 공백기간 동안 어느 나라가 축구의 강국으로 성장해 있는지를 평가하는 대회에서 이전 대회의 기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세계적인 축구 대회가 열렸지만 남미 소속의 국가들이 참가하지 못하는 바람에 ‘세계적’이라는 이름에 흠집이 생겼다.

그러나 축구 대회는 축구 자체의 실력 이외에 주변의 부수적인 다양한 여건이 작용하기 때문에 조금 넓은 마음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축구 자체의 실력과 아울러 국제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상황도 축구 실력에 포함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8년 올림픽 축구 경기는 남미 소속 국가들이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이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그렇기 때문에 1950년 브라질에서 열리는 제4회 월드컵은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지역예선을 거치면서 전쟁 이후의 혼란한 상황이 그대로 반영되었고, 불참과 포기가 속출하여 다시금 초라한 국제대회가 되어 버렸다.

당시 FIFA의 가맹국은 73개국으로 늘어나 있었지만, 전쟁 후의 상황으로 34개 나라가 참가를 희망하였고 디팬딩 챔피언 이탈리아와 개최국 브라질이 지역예선을 거치지 않고 본선에 자동진출하였다.

# 불참과 포기가 속출한 지역예선

제4회 대회의 지역예선은 총 10개의 그룹으로 나뉘었다. 특별히 이번 대회에서 처음으로 영국이 참가를 결정하였다. 영국은 2년 전 올림픽에서 단일팀으로 참가하여 4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영국으로서는 단일팀이고, 아마추어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실력을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즈의 네 개의 나라가 지역예선에 참가하였다. 예선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각각 1, 2위를 차지하며 본선 진출권을 획득하였으나, 스코틀랜드가 민족적인 감정으로 본선 참가를 돌연 포기함으로 FIFA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FIFA는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3조에서 아깝게 기회를 놓친 프랑스에게 대신 참가할 것을 권유했다. 프랑스는 이스라엘을 이기고 올라온 유고슬라비아와 두 번 무승부를 기록하고 제3국에서 세 번째 대결을 하여 연장전에서 2-3으로 패하고 탈락한 상황이었다. 프랑스는 처음에 참가를 결정했지만 뒤에 포기했다.

이처럼 제4회 월드컵을 위한 지역예선은 오늘날과는 달리 그다지 치열하지 않았다. 참가 포기가 속출하는 가운데 어부지리로 경기를 치르지 않고 본선에 진출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룩셈부르크를 두 번 누른 스위스는 벨기에와 겨루기로 되어 있었는데 벨기에가 기권하는 바람에 본선에 진출하였다.

올림픽 금메달 스웨덴은 아일랜드와 핀란드와 한조가 되었는데, 아일랜드를 두 번 격파한 시점(3-1, 3-1)에서 핀란드가 포기하는 바람에 그때까지의 성적으로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와 터키, 시리아가 한 조가 되어 한 장의 티켓을 놓고 겨룬 2조에서는 오스트리아가 시드를 배정받아 부전승으로 결승 라운드에 진출하였고, 터키와 시리아의 승자와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첫 번째 라운드에서 시리아는 터키와의 첫 경기에서 0-7로 패하는 바람에 두 번째 경기를 포기했고, 터키가 결승 라운드에 진출해서 오스트리아와 경기를 치르기로 되어 있었는데, 오스트리아가 참가를 포기하는 가운데 터키가 본선 진출을 확정했다. 그러나 터키 역시 이후에 참가를 포기하게 되어, FIFA는 6조에서 스페인에게 패하고 탈락한 포르투갈에게 대신 참가할 것을 권유했으나, 포르투갈 역시 참가를 포기했다.

유럽에서의 불참이 속출하는 가운데 남미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7개 나라(칠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페루, 에콰도르)가 지역예선에 그 명단을 올렸는데, 아르헨티나(개최국 쟁탈전에서 밀려나 불만이 많았음), 페루, 에콰도르가 참가를 포기하는 바람에 한 경기도 치르지 않고 나머지 나라들(칠레, 볼리비아, 우루과이, 파라과이)이 본선에 진출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본선 진출이 오늘날처럼 국가적인 영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한 상황은 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시아에서는 인도, 버마(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가 한 장 할당된 본선 티켓을 놓고 겨루게 되었지만, 버마(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가 포기하여 인도가 티켓을 확보했다. 그러나 인도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맨발로 경기할 수 없다는 FIFA의 입장에 대해서 출전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나마 예선을 제대로 치른 조는 북중비의 멕시코, 미국, 쿠바가 한 장의 티켓을 놓고 제대로 예선을 치러 멕시코가 전승(4승)으로 월드컵 참가자격을 획득하였고, 미국이 2위를 차지하여 본선에 참가하게 되었다.

물론 이들 외에 지역예선을 일정대로 마무리한 그룹이 있다. 1그룹의 영연방의 4개국은 지역예선을 무사히 끝냈지만 참가자격을 얻은 스코틀랜드가 불참을 선언하는 바람에 완전함에 차질이 생겼다. 6그룹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일정대로 지역예선을 끝내고 스페인이 1승 1무로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런데 다른 조에서 터키가 참가를 포기하는 바람에 참가를 대신 권유받은 포르투갈이 참가를 포기하는 바람에 역시 완전함에 무리가 생겼다.

# 새로운 방식

제4회 월드컵은 종전과는 달리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였다. 토너먼트로 진행하는 것은 경기 수가 적고 수입 또한 적다고 판단한 브라질은 대회를 4개 조로 나누어 조별리그를 통해 각 조의 승자가 다시금 결승 리그를 치러 성적이 좋은 팀이 우승하는 방식을 도입하였다. 처음에 FIFA는 그러한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결국 브라질의 요구대로 경기 방식을 수정하였다.

불참과 포기가 속출하면서 제4회 브라질 월드컵 본선은 13개 나라로 확정되었다. 본선 진출에 성공한 스코틀랜드, 터키, 인도가 참가를 포기하였고, 그들을 대신할 나라를 FIFA에서는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13개 나라가 아래와 같이 4개조로 나뉘어 조별리그를 진행하여 각 조의 1위 팀이 결승 리그를 진행하고 최종 우승을 결정하게 되었다.

[Group 1] 브라질, 유고슬라비아, 스위스, 멕시코
[Group 2] 스페인, 잉글랜드, 칠레, 미국
[Group 3] 스웨덴, 이탈리아, 파라과이
[Group 4] 우루과이, 볼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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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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