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기독교, 선교할 자격이 있을까?
한국의 기독교가 통계상으로 천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나아가 국민의 4분의 1이 기독교인이라고 자랑한다. 건물 위로 우뚝 솟은 십자가는 밤이 되면 빨갛게 도시를 뒤덮어 버린다. 가장 짧은 기간에 이렇게 성장한 것을 놓고 해외의 기독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고, 심지어는 연구 대상으로까지 삼고 있다.
물론 한국의 기독교의 성장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최근의 상황을 돌아보면 과연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도대체 어떤 긍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을까? 한국의 기독교가 수많은 교회와 신도 수를 자랑하고 있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입각하여 제대로 서 있는 교회가 과연 몇이나 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오늘날의 한국 교회를 예수님은 어떻게 바라보실까를 생각해보면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 얼굴이 화끈거린다. 십자가보다 편안함을 바라고, 가끔씩은 대형집회를 통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이 진리 그 자체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주장에 반하는 행동은 무조건 사탄이라고 도매급으로 넘겨버리는 기독교의 모습을 예수님이 어떻게 보실까?
인도의 기독교인구가 2%라고 한다. 비율로 따지면 엄청나게 적은 숫자로 보이지만 실제로 따지면 10억 인구 중에서 2천만이 기독교인구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지역으로도 잘난 우리나라는 선교사를 파송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시시각각 들려오는 선교적 업적에 우쭐해하고 한국이야말로 하나님에게 새롭게 선택받는 나라임을 자부한다.
동남아시아의 자연재앙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일어난 재앙이라고 버젓이 설교에서 이야기하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다. 정치적으로 자신의 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특별 금식기도를 부르짖는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형교회의 목사다.
교회는 국내에서 국가와 정부조차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과감하게 거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물론 교회가 사회 속에서 국가와 정부를 향해서 침묵을 지킬 필요는 없다. 아니 적극적으로 사회가 올바른 모습을 갖도록 예언자적인 모습과 행동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의 모습은 예언자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밥그릇을 위한 투쟁, 아니 밥그릇을 더 갖기 위한 투쟁으로 보인다.
이러한 국내의 기독교가 해외로 선교사를 보내면서 선교 영역을 확장하려고 하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흔히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다. 아프간 피랍과 살해라는 충격 속에서 오늘날 기독교의 해외 선교는 반드시 진단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요즘 가짜 학위와 학력 위조가 한국 사회의 하나의 이슈가 되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자격 없는 자’에 대한 경고이다. 학위나 학력도 중요하겠지만 정작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사회적으로 여러 분야에 걸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해외 선교 측면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오늘날 전체 한국 사회를 위하기보다는 자신들만을 위한 행동을 하는 기독교가 과연 해외 선교의 자격이 있을까? 물론 지금도 해외나 오지에서 남모르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면서 순수한 목적으로 진정 하나님이 원하는 선교를 하고 있는 교회가 많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에 기독교의 해외 선교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배타적이고 위험하고 오히려 해외에서 기독교와 한국의 이미지를 깎아먹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 무엇이 선교인가?
오늘날 기독교는 ‘선교’라는 단어를 남발하고 있는 것 같다. 다는 아니지만 선교를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는 차원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되라’는 명령에 순종한다며 땅 끝으로 가고 있지만 정작 그들이 가지고 가는 것은 ‘복음’일까 아니면 자신들이 그들보다 뛰어나다는 우월감과 자만심일까?
상대편인 이슬람이 먼저 ‘칼이냐 코란이냐’를 주장했다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방식으로 칼을 들어버린 서양교회의 십자군의 신앙적 전통을 받아들여서 땅 끝까지 기독교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외형적으로 기독교인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만드는 것이 선교의 목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아닐까?
생각해보면 해외로 열정을 가지고 나가는 젊은 선교사들에 대한 책임은 그들을 내보낸 성직자(교회)에게 있다. 그들에게 해외 선교의 열정을 갖게 한 것은 교회이고 성직자들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성직자들이 진정으로 선교의 의미를 알고 올바르게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시켰을까? 기독교 이외의 종교는 거짓 종교이기 때문에 그들을 개종시켜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것이 선교의 목적이라고 철두철미하게 믿는 것 까지는 좋지만,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해당 지역으로 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고 있을까?
이번 아프간 피랍 사건을 보면서 왜 이들이 이렇게 어렵고 위험한 곳으로 봉사활동을 갔을까를 생각해 보고 싶다. 단순히 해외의 위험한 지역에서 봉사(선교)하고 돌아오면 ‘우리는 이런 위험한 지역에까지 나가서 선교할 정도로 열정적인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는 자랑거리로 삼는 것은 아닌가?
선교는 자신들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선교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너무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졌다. 남모르게 행하는 자선 행위나 봉사 행위는 기독교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교회의 이름으로 기독교 단체의 이름으로 자선과 봉사 행위를 기획하고 구상하며 실천하고 있다. 선교사로 파송받은 사람들이 물론 해당 선교지에서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것이 불리하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들을 후원하는 한국으로 돌아왔을 경우에는 해당 선교지에서의 활동 상황은 그대로 후원하는 교회의 업적으로 쌓이는 것이 상식이다.
# 이제는 해외 선교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기독교의 선교, 해외 선교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과거 서양 열강이 앞을 다투어 식민지를 확장하던 시대에 행해졌던 선교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선교에 대해서 일가견이 있는 신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신학자들의 의견에 대해서 교회가 무시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뜻이 최고이고, 오로지 정답이라는 개교회주의가 한국 교회를 버려놓은 것 같다. 정부가 교회의 해외 선교를 통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현실이 되었다. 심지어 교회가 소속한 교단조차도 개교회의 선교 활동에 지침만을 제공할 뿐, 이래라 저래라 통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피랍과 살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한국 교회와 사회는 어느 정도 제어 장치를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교회는 교회 나름대로 현재의 해외 선교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고, 교단은 교단 나름대로 개교회의 해외 선교에 보다 현명한 방식들을 제공해 주어야 할 것이고, 국가는 국가 나름대로 기독교의 해외 활동이 도를 넘지 않도록 권면과 협력관계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기독교의 진리를 전파하는 행위는 중단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교회의 존재 이유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복음 전파의 과정에서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식민지 쟁탈전 방식의 선교는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으며, 현지인을 통한 선교로 방향이 전환되고 있다.
일단 현재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피랍되어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무사 귀환이다. 그러나 이와 병행하여 현재 기독교가 추진하고 있는 선교의 방법과 모습에 대해서 기독교 자체적으로 진단하고 검증해야 할 것이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해외로 나가서 활동하는 사항이기 때문에 향후에 선교사들과 국가간의 협력에 대한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어렵고 위험한 곳으로 복음을 들고 가는 것은 개인의 의지라고 하겠지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은 대중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해당 지역이 위험하다고 정부에서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모하게 현지행을 강행한 단체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사고는 누가 치고 수습은 누가 하나’ 라는 비판도 있다. 물론 기독교는 그러한 비판을 달게 받아야 한다.
국내에서의 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던 교회는 국가가 교회를 향하여 의견을 제시할 경우에도 자신들의 행동을 국가에 의해서 간섭받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세력을 통해서 국가를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생각은 교회가 해외에서의 활동에도 국가가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그렇기 때문에 해외에서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해서 국가는 간섭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만약 간섭한다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해외에서 선교사들은 교회에서 파송받았고 교회에서 추진하는 선교 활동의 일환으로 해외에 나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의 국민으로 해외에 나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정부)와 협력관계를 거부한다는 것은 한국의 국민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해외에서 활동하는 것에 의해서 기독교의 이미지는 물론 한국의 이미지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아프간에서 피랍된 봉사대원들은 해당 지역으로 가지 말라고 권고한 정부 기관의 권고를 무시하고 오히려 간섭한다고 생각하고 강행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물론 피랍된 지금의 상황에서는 해당 대원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서 국가가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만, 차후에 이런 행동은 근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기독교가 통계상으로 천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나아가 국민의 4분의 1이 기독교인이라고 자랑한다. 건물 위로 우뚝 솟은 십자가는 밤이 되면 빨갛게 도시를 뒤덮어 버린다. 가장 짧은 기간에 이렇게 성장한 것을 놓고 해외의 기독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고, 심지어는 연구 대상으로까지 삼고 있다.
물론 한국의 기독교의 성장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최근의 상황을 돌아보면 과연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도대체 어떤 긍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을까? 한국의 기독교가 수많은 교회와 신도 수를 자랑하고 있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입각하여 제대로 서 있는 교회가 과연 몇이나 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오늘날의 한국 교회를 예수님은 어떻게 바라보실까를 생각해보면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 얼굴이 화끈거린다. 십자가보다 편안함을 바라고, 가끔씩은 대형집회를 통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이 진리 그 자체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주장에 반하는 행동은 무조건 사탄이라고 도매급으로 넘겨버리는 기독교의 모습을 예수님이 어떻게 보실까?
인도의 기독교인구가 2%라고 한다. 비율로 따지면 엄청나게 적은 숫자로 보이지만 실제로 따지면 10억 인구 중에서 2천만이 기독교인구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지역으로도 잘난 우리나라는 선교사를 파송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시시각각 들려오는 선교적 업적에 우쭐해하고 한국이야말로 하나님에게 새롭게 선택받는 나라임을 자부한다.
동남아시아의 자연재앙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일어난 재앙이라고 버젓이 설교에서 이야기하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다. 정치적으로 자신의 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특별 금식기도를 부르짖는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형교회의 목사다.
교회는 국내에서 국가와 정부조차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과감하게 거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물론 교회가 사회 속에서 국가와 정부를 향해서 침묵을 지킬 필요는 없다. 아니 적극적으로 사회가 올바른 모습을 갖도록 예언자적인 모습과 행동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의 모습은 예언자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밥그릇을 위한 투쟁, 아니 밥그릇을 더 갖기 위한 투쟁으로 보인다.
이러한 국내의 기독교가 해외로 선교사를 보내면서 선교 영역을 확장하려고 하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흔히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다. 아프간 피랍과 살해라는 충격 속에서 오늘날 기독교의 해외 선교는 반드시 진단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요즘 가짜 학위와 학력 위조가 한국 사회의 하나의 이슈가 되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자격 없는 자’에 대한 경고이다. 학위나 학력도 중요하겠지만 정작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사회적으로 여러 분야에 걸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해외 선교 측면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오늘날 전체 한국 사회를 위하기보다는 자신들만을 위한 행동을 하는 기독교가 과연 해외 선교의 자격이 있을까? 물론 지금도 해외나 오지에서 남모르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면서 순수한 목적으로 진정 하나님이 원하는 선교를 하고 있는 교회가 많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에 기독교의 해외 선교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배타적이고 위험하고 오히려 해외에서 기독교와 한국의 이미지를 깎아먹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 무엇이 선교인가?
오늘날 기독교는 ‘선교’라는 단어를 남발하고 있는 것 같다. 다는 아니지만 선교를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는 차원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되라’는 명령에 순종한다며 땅 끝으로 가고 있지만 정작 그들이 가지고 가는 것은 ‘복음’일까 아니면 자신들이 그들보다 뛰어나다는 우월감과 자만심일까?
상대편인 이슬람이 먼저 ‘칼이냐 코란이냐’를 주장했다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방식으로 칼을 들어버린 서양교회의 십자군의 신앙적 전통을 받아들여서 땅 끝까지 기독교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외형적으로 기독교인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만드는 것이 선교의 목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아닐까?
생각해보면 해외로 열정을 가지고 나가는 젊은 선교사들에 대한 책임은 그들을 내보낸 성직자(교회)에게 있다. 그들에게 해외 선교의 열정을 갖게 한 것은 교회이고 성직자들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성직자들이 진정으로 선교의 의미를 알고 올바르게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시켰을까? 기독교 이외의 종교는 거짓 종교이기 때문에 그들을 개종시켜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것이 선교의 목적이라고 철두철미하게 믿는 것 까지는 좋지만,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해당 지역으로 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고 있을까?
이번 아프간 피랍 사건을 보면서 왜 이들이 이렇게 어렵고 위험한 곳으로 봉사활동을 갔을까를 생각해 보고 싶다. 단순히 해외의 위험한 지역에서 봉사(선교)하고 돌아오면 ‘우리는 이런 위험한 지역에까지 나가서 선교할 정도로 열정적인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는 자랑거리로 삼는 것은 아닌가?
선교는 자신들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선교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너무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졌다. 남모르게 행하는 자선 행위나 봉사 행위는 기독교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교회의 이름으로 기독교 단체의 이름으로 자선과 봉사 행위를 기획하고 구상하며 실천하고 있다. 선교사로 파송받은 사람들이 물론 해당 선교지에서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것이 불리하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들을 후원하는 한국으로 돌아왔을 경우에는 해당 선교지에서의 활동 상황은 그대로 후원하는 교회의 업적으로 쌓이는 것이 상식이다.
# 이제는 해외 선교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기독교의 선교, 해외 선교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과거 서양 열강이 앞을 다투어 식민지를 확장하던 시대에 행해졌던 선교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선교에 대해서 일가견이 있는 신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신학자들의 의견에 대해서 교회가 무시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뜻이 최고이고, 오로지 정답이라는 개교회주의가 한국 교회를 버려놓은 것 같다. 정부가 교회의 해외 선교를 통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현실이 되었다. 심지어 교회가 소속한 교단조차도 개교회의 선교 활동에 지침만을 제공할 뿐, 이래라 저래라 통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피랍과 살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한국 교회와 사회는 어느 정도 제어 장치를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교회는 교회 나름대로 현재의 해외 선교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고, 교단은 교단 나름대로 개교회의 해외 선교에 보다 현명한 방식들을 제공해 주어야 할 것이고, 국가는 국가 나름대로 기독교의 해외 활동이 도를 넘지 않도록 권면과 협력관계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기독교의 진리를 전파하는 행위는 중단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교회의 존재 이유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복음 전파의 과정에서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식민지 쟁탈전 방식의 선교는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으며, 현지인을 통한 선교로 방향이 전환되고 있다.
일단 현재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피랍되어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무사 귀환이다. 그러나 이와 병행하여 현재 기독교가 추진하고 있는 선교의 방법과 모습에 대해서 기독교 자체적으로 진단하고 검증해야 할 것이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해외로 나가서 활동하는 사항이기 때문에 향후에 선교사들과 국가간의 협력에 대한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어렵고 위험한 곳으로 복음을 들고 가는 것은 개인의 의지라고 하겠지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은 대중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해당 지역이 위험하다고 정부에서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모하게 현지행을 강행한 단체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사고는 누가 치고 수습은 누가 하나’ 라는 비판도 있다. 물론 기독교는 그러한 비판을 달게 받아야 한다.
국내에서의 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던 교회는 국가가 교회를 향하여 의견을 제시할 경우에도 자신들의 행동을 국가에 의해서 간섭받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세력을 통해서 국가를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생각은 교회가 해외에서의 활동에도 국가가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그렇기 때문에 해외에서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해서 국가는 간섭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만약 간섭한다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해외에서 선교사들은 교회에서 파송받았고 교회에서 추진하는 선교 활동의 일환으로 해외에 나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의 국민으로 해외에 나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정부)와 협력관계를 거부한다는 것은 한국의 국민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해외에서 활동하는 것에 의해서 기독교의 이미지는 물론 한국의 이미지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아프간에서 피랍된 봉사대원들은 해당 지역으로 가지 말라고 권고한 정부 기관의 권고를 무시하고 오히려 간섭한다고 생각하고 강행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물론 피랍된 지금의 상황에서는 해당 대원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서 국가가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만, 차후에 이런 행동은 근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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