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커피전문점을 나오니 갈데가 없었다. 가는 곳마다 돈이 드니... 이럴줄 알았으면 커피전문점에 계속 있을걸... 그러나 지금 와서 후회해봤자 마음만 더 아프다. “오랜만에 한강 고수부지나 가자.” “그러지뭐.” 나의 제안에 정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했다. 신사동 사거리에서 고수부지까지는 걸어서 약 20분 정도 걸렸다. 해는 어드덧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한강물에 비친 황혼은 낭만 그 자체였다. 이러한 낭만을 칙칙한 정수 녀석과 느끼다니... 아마 정수도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어느새 정수는 캔맥주 두 개를 사왔다. 4월의 저녁이라 약간 쌀쌀했지만, 태양빛의 흔적은 아직 우리를 따사롭게 감싸주고 있었다. “정수야, 저기 한남대교 보이지? 저기 아래가 내가 태어난 곳이야.” “형, 그 얘긴 수십번도 더 들었어.” “벌써 28년전 이야기다. 내가 70년생이니... 그래도 아직 이렇게 반백수 생활을 하니...” “형은 그래도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잖아.” “2002년 월드컵이 열릴 때, 보기좋게 멋진 사람이 되어 있을꺼야. 그때 여기에 다시 와야지. 성공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오지 않을꺼야.” “형, 지난주에도 여기에서 그런말 했잖아. 혹시 캔 하나 먹고 취한 건 아니지?” 그렇다. 취한게 아니라 취한척 하고 싶었다. 인생에서 마땅한 길이 안보이는 이 시점에서 엄청 취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취하는 것도 두려워서 고작 캔 하나 마시고 취한 척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느껴가며 들어간 대학과 대학원 생활... 거기에서 건진거라곤 부조리와 비인간적인 사회를 보는 눈과, 그러한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나의 나약함을 발견한 것뿐이다. 집에 돌아온 시간은 12시가 넘어서였다. 이러한 늦은 귀가에 면역이 되신 듯 어머니는 졸린 듯한 눈을 비비시며 문을 열어주었다. 이제 12시가 지났으니, 내일이면 혜선이를 만나는 구나. 왜 내가 일곱 살 어린 여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 긴장해야 되지? 어제 늦게 들어온 관계로 늦잠을 자버렸다. 상철이가 11시경에 전화를 해주었다. “세훈아 아직도 자는 거냐? 내가 모닝콜이 되었네...” “상철이구나.” “별일없으면 두시까지 올림픽공원으로 나와라.” “왜?” “오늘 하루 모델좀 되주라. 내가 사진기를 어디서 구했거든.” “모델료는?” “사발면 하나.” “관둬.” “그래, 인심썼다. 거하게 떡복기 1인분 내지.” “정문에서 두시다.” “늦지 마라.” 꼭 약속시간을 잡을 때, 늦지 말라고 당부한 녀석이 늦는다. 두시에 맞춰서 공원 정문에 도착했는데, 상철이는 20분이나 늦었다. 두어시간동안 사진도 찍고 돌아다니다가 다리가 아파서 벤취에 앉았다. “여기에서 쉬었다 가자.” “그건 그렇고 세훈아, 어제 누구랑 있었냐?” “정수랑 있었어.” “그녀석은 왜 너를 졸졸 따라다니는거냐?” “몰라, 아마 나를 좋아하나봐... 난 왜 이렇게 남자들에게만 인기가 있는지 모르겠다... 혹시 상철이 너도? 안돼! 우린 사랑하기에는 너무 힘든 난관이 있어. 난 도저히 못하니까 니가 수술해라. 요즘에는 공짜로 성전환수술 해주는 곳도 있데.” “아까 먹은 떡복기가 곤두선다.” 다른 일에 몰두했을 때는 까맣게 잊어먹고 있던 것들이 차분한 생각을 요구하는 시간에 되살아 나곤 한다. 혜선이와의 만남... “야, 상철아 너 알지?” “뭘?” “혜선이 말이야. 송혜선.” “아... 그애? 알지.” “혜선이가 또 삐삐쳤다.” “그래서 뭐래?” “한번 만나자고 했어.” “걔가 너랑 몇살차이더라? 너가 70이고, 걔가 77이니...” “그렇구나, 어제 삐삐의 번호가 7077 이었어. 그런 오묘한 뜻이 있었네... 내일 만나자고 했는데, 어떻게 하지?” “너무 나이차이가 난다. 너가 대학교 1학년때 6학년이었다는 거잖아.” “난 재수해서... 내가 대학교 1학년때 걔는 중1이야.” “이제, 걔는 잊어버리고 새로운 너의 삶을 찾아야지. 세상은 넓고 여자는 많다.” “내가 언제 걔를 못잊었다고 그래?” “넌 만날때마다 혜선이 얘기 안하고 지나가는 법이 없었어. 그건 못잊고 있다는 증거야.” “짜식, 갖다 붙이긴.” 그렇다. 혜선이와 헤어진지 6년이 흘렀건만 나는 아직도 6년전의 삶을 동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97년의 삶을 살아가는데 나는 아직도 92년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드디어 혜선이와의 만남의 날이다. 영풍문고 음반코너에서 2시에 만나기로 했다. 약속시간보다 1시간 먼저가서 책좀 보다가 음반코너로 향했다. ‘아직 안 왔네... 여자들은 꼭 약속시간보다 10분정도 늦는다니까...’ 2시가 조금 지나서 테이프를 구경하던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곤색 가방을 두 어깨에 매고 머리를 짧게 깎은 한 소녀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혜선이냐? 정말 머리를 짧게 깎았구나. 몰라보겠다.” “제가 늦었죠? 언제 오셨어요?” “응... 10분전에 왔지. 그건 그렇고, 점심은 먹었냐?” “예...” 순간, 괜히 만나자고 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예뻐진 혜선이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커피전문점에서 이야기 할 때,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 한동안 바라보고만 있었을 때도 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잘 지냈어. 너는 어떻게 지냈냐?” “그저 그래요.” 그 뒤로 우리는 지나온 6년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서 함께 지냈던 짧은 순간을 이야기하며 즐거워 했다. 어느덧 시간이 5시를 향하고 있었다. “여기에 계속 있다가는 카운터 아가씨한테 혼날 것 같다. 우리 나가자.” 을지로에서 종로 1가를 지나 광화문으로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광화문에서 그녀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우연하게 내가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사람은 때로는 자기의 감정에 솔직할 필요가 있어. 사람들은 그 때를 모르고 나중에 후회하기도 하지.” “그런가요?” 아마 이 말이 그날 헤어지는 마지막 인사가 된 것 같다. 그뒤로, 다시 혜선이에대한 생각을 머리속에서 정리하는데 오랜 시간이 흘렀다. 5월이 되어 이제 어느덧 여름을 향해서 치닫고 있던 어느날... 다시 혜선이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다시 혜선이를 만났고, 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저녁 7시가 되어 집으로 보내주려고 했다. 그때 혜선이가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은 꼭 저를 만나면 일찍 집에 보내려고 하시네요.” 94년초... 과외를 그만둔지 한달만에, 혜선이가 이별 선물을 주겠다고 해서 신사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때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집에는 도서관 간다고 하고 나왔다고 하면서 나왔을때도 일찍 집에 보내주었다. 그 뒤 6개월, 1년만에 만날때에도 일찍 보내주었던 것 같다. “그러면 이제 뭐하지?” “글쎄요. 미리미리 생각하고 나오셨어야죠. 선생님은 친구만나면 어디어디 가시나요?” “커피전문점, 그다음에는 호프집...” “그래요? 그럼 우리 맥주마시러 가요.” “호프집?” “저도 이제 어엿한 대학생이라고요. 우리 저기 가요.” 혜선이가 가리킨 곳은 ‘하이트광장’이었다. 술은 인간에게 남모를 용기를 불어넣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술기운을 빌려서 사랑을 고백하기도 한다. 한참 맥주를 마시며 다시 6년전의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문득, “선생님, 저 그때 선생님 좋아했던 거... 선생님은 아셨어요?” “뭐?” “왜그렇게 놀라세요? 모르셨나요? 괜찮아요, 지금은 마음이 정리되었으니까요.” 혜선이의 이 두마디 말이 나를 얼마나 혼란스럽게 했는지 모른다. 옛날에는 좋아했다가 지금은 아니란 얘긴가? 아니면 옛날에도 지금도 나를 좋아한다는 말인가? “선생님이 이런 얘기 하셨었죠? 좋아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눈빛으로 알아차린다고...” “그랬었지.” “그런데 제가 선생님 좋아하는거 못느끼셨나요?” 혜선이는 이제 자기와는 상관없는 먼 옛날의 과거를 이야기하듯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 지금은?” “지금은... 괜찮아요. 정리가 되었으니까...” 그녀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한때 사춘기 소녀시절 좋아하던 선생님으로 간직되고 있었다. 이제 사춘기를 지나 어엿한 성인이 되어가면서 그러한 사춘기의 기억을 추억으로 간직하려고 하는데, 나는 그 추억을 현실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꼴이 되었다.
그 뒤에 늦었지만 나는 혜선이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과거를 떠나 현실에서 살고 있었다. 나만 과거 속에서 혼자 헤매고 있었다. 내가 계속 과거에만 집착하게 되자, 어렵고 힘들어지는 건 현실의 혜선이었다. “저에게 선생님은 그냥 좋은 인생의 선생님으로 남아주셨으면 해요.” 이것이 혜선이가 나에게 바라는 나의 모습이었다. 내가 혜선이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한달 뒤 사당 지하철 역에서였다. 계속 만나자는 나의 연락을 피하다가 마지막으로 만나러 나온 것이다. 우리는 지하철 벤취에 앉아서 2시간동안 이야기를 했다. “정말... 안되겠니?” “......” “참 웃긴다, 우리들... 처음엔 너가 그렇게 나를 좋아했고... 지금은 내가 너를 그렇게 좋아하고... 너가 나를 좋아할 때, 모른척했던 벌을 받나?” “......” “나한테 좋아했었다고 말한거 후회는 안하냐?” “잘 모르겠어요. 전... 선생님이 저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도 없는 줄 알고 이야기 한건데...” 그리고는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혜선이가 침묵을 깨뜨렸다. “제가 걱정하는 건... 이후로 선생님을 못보게 되는 거예요. 그래도 선생님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되어주셨는데...” 이제, 혜선이의 마음은 어느정도 알수 있었다. 더 이상 매달리는 건 좋지 않은 모습이라고 판단이 되었다. “그래... 괜히 강요하는 것도 좋은 모습이 아니지. 난 별로 터프한 사람은 못되니까... 그만 일어나자... 너 약속있다고 했잖아.” 내가 일어나자, 혜선이는 따라 일어나면서 말했다. “선생님은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이미 내가 바라는 너의 모습을 이야기했는데... 그게 힘드니까... 할수 없다는 거지...” 그 이후로 나는 6개월동안 망가졌다. 친구들을 만나 하루가 멀다하고 술을 마셨고... 그러한 나를 보면서 어떤 친구들은 그녀의 얼굴도 보지 않고서 상사병(?)이 걸리기도 했다... “야~ 도대체 어떤 여자길래, 너를 그렇게 망가뜨렸냐?” “좋은 여자야. 나를 믿고 인정해준 유일한 여자니까...” 지금 내가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혜선아... 평범한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해준 것에 대해서 참 고맙게 생각한다. 너는 그래도 나를 좋아해준 처음 여자였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시작도 하지 못하고 끝나버린 것 같아... 내가 너의 손을 잡은 적이 한 번도 없었지... 그리고 내가 너의 어깨에 딱 한 번 손을 올렸었지... 아마 그때가 사진을 찍을 때, 어색하게 손을 어깨에 올렸던 것 같은데... 그리고 내 후배중에 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화이트 3집’을 나한테 사주었지... 거기에 ‘소녀’라는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의 가사가 참 우리들에게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하더라...” 소녀... 내가 너를 처음 봤을 때 넌 아주 작은 소녀. 난 너의 짝사랑을 받던 너보다 조금 어른. 너는 나를 좋아했지만 내눈엔 너무 어려 난 그냥 좋은 오빠로만 너를 대하곤 했어. 그후 왜인지 몰라도 너의 연락은 줄어가고 그렇게 긴, 아주 긴 시간을 지나며 난 너를 잊게 됐지만. 세상이 조금씩 변해가듯 내모습, 내생각도 바뀌어만 갔고 어디선가 너도 변해가는 걸 난 의식하지 못했던 거야. 다시 너를 만났을 때에 넌 아름다운 여인. 난 너무나 반가와 했고 떨리기 까지 했어. 너는 웃으며 얘길했지. 왜 나를 좋아했을까. 지금에와 생각해 보면 너무 어렸었다고. 잠시 뜻모를 침묵뒤에 애써 커다란 웃음짓고. 너의 생활, 너의 남자 얘길 들을땐 실망감까지 느꼈지만 그렇게 난 사랑에 빠졌지. 고백도 하지 못하는 힘든 사랑에 보고싶고 또 보고 싶어져도. 너에게 있어 난 그냥 추억... 그렇게 난 사랑에 빠졌지. 거리를 두어야 하는 그런 사랑에 지난날 넌 얼마나 속상했니. 내게 있어 넌 지금의 사랑. 내게 있어 넌 지금의 사랑... 너에게 있어 난 그냥 추억... 여러분은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망설이지 마세요... 사랑은 기다려주지 않는답니다... 여기의 이야기는... 95퍼센트 사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