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축구 20] 헝가리, 올림픽 3회 우승 달성
1968년 멕시코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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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올림픽 축구는 동유럽의 강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동유럽 국가들이 올림픽을 석권하면서 세계 축구의 흐름 역시 동유럽의 강세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계 축구를 양분하고 있던 유럽의 축구에서 철의 장막 너머 존재하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들은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프로의 출전이 금지되고 있었던 올림픽 축구에서 남미 축구는 여전히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고, 서유럽 국가들 역시 같은 처지에 놓여있었다. 올림픽에서만큼은 동유럽 국가들이 남미 축구나 서유럽의 축구를 능가하고 있었다.

#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는 헝가리

1950년대 이후부터 헝가리는 세계 축구의 중상위권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월드컵 정상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1950년대 중반 이후 브라질의 등장하기까지 세계의 정상은 ‘무관의 제왕’ 헝가리가 차지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월드컵에서는 그다지 뛰어난 성적을 올리지 못했지만 헝가리는 여전히 정상권에 속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1958년 월드컵에서 충분히 4강도 가능하다고 생각되었지만 아깝게 웨일즈에게 밀려 조별리그를 통과하지 못했고, 1962년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를 1위로 통과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에게 0-1로 패하며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1966년 월드컵에서는 최강 브라질을 격파하면서 조별리그를 통과했지만 소련에게 1-2로 패하며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헝가리가 비록 월드컵 4강에는 들지 못했지만, 충분히 4강에 들 수 있는 실력을 갖고 있었고, 순간의 고비에서 승리의 여신에게 외면당하면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월드컵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실력과 아울러 행운도 따라주어야 하는데, 헝가리는 그러한 행운과는 거리가 멀었다.

# 올림픽과는 인연이 많은 헝가리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었던 헝가리를 위로하기라도 하듯, 승리의 여신은 헝가리에게 올림픽에서만큼은 호의적으로 대해주었다. 헝가리는 1952년 올림픽에서 푸스카스와 콕시스를 앞세워 완벽한 우승을 차지했다. 그 이후 1956년 올림픽에서는 ‘헝가리 혁명’으로 참가할 수 없었고, 1960년 올림픽에서는 동메달을 획득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리고 1964년 올림픽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제압하며 우승을 차지하여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두 번의 금메달(1952년, 1964년)과 한 번의 동메달(1960년)을 획득한 헝가리는 이미 올림픽 성적에서 우루과이(2회 우승)의 기록을 넘어섰다. 그리고 1968년 올림픽에서 우승할 경우 올림픽 2회 우승은 물론, 올림픽에서 가장 많이 우승한 나라로 올림픽 축구의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디팬딩 챔피언의 자격으로 1968년 멕시코 올림픽을 맞이하는 헝가리는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고 있었다. 국제대회에서 헝가리에게 강한 모습을 보이던 소련이 본선에 참가하지 않은 것도 그들의 우승을 예상하는 데 좋은 참고가 되었다. 헝가리는 올림픽에서의 새로운 기록(3회 우승)이라는 목표를 이루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멕시코로 향했다.

# 헝가리, 결승을 향한 행진

헝가리는 올림픽 본선 조별리그에서 비교적 상대하기 쉬운 팀들과 한 조가 되었다. 이스라엘, 가나, 엘살바도르와 C조에 속한 헝가리는 2승 1무(득점 8, 실점 2)의 성적으로 당연히 조 1위를 차지하였고, 8강이 겨루는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하였다.

헝가리의 준준결승 상대는 조별리그에서 예상을 뒤엎고 체코슬로바키아를 따돌리고 D조 2위를 기록하며 올라온 과테말라였다. 10월 20일, 과테말라는 자신들의 실력 이상을 발휘하며 헝가리를 상대했지만 후반전에 한 골을 넣은 헝가리에게 0-1로 패하며 8강 진출에 만족해야 했다.

헝가리의 준결승 상대는 브라질과 프랑스를 따돌리고 올라온 복병 일본이었다. 일본은 이미 자신들의 실력 이상의 성적을 거두었다(4강 진출). 돌풍을 일으키며 올라온 일본은 4강 진출이라는 위대한 업적 이후에 스스로 만족하며 10월 22일 헝가리와의 경기에서는 그 이전의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승에 진출하겠다는 의지는 일본보다 헝가리가 강했다. 결국 헝가리가 5-0으로 승리하며 결승에 진출하였다.

# 헝가리, 올림픽 3회 우승을 달성하다.

헝가리의 결승 상대는 동유럽의 강호 불가리아였다. 불가리아는 조별리그에서 체코슬로바키아와 과테말라를 제치고 조 1위를 차지하며 준준결승에 진출하였고, 준준결승에서 이스라엘과 1-1 무승부를 기록하여 추첨으로 승자가 되는 행운을 얻으며 준결승에 올랐다. 준결승에서 개최국 멕시코를 3-2로 누르고 결승에 오른 팀이었다.

10월 26일 벌어진 불가리와의 결승전에서 헝가리는 전반을 2-1로 리드하며 마무리 했고, 후반에 들어서 두 골을 추가하며 4-1의 스코어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하였다. 헝가리로서는 올림픽 3회 우승과 2회 연속 우승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이다.

헝가리가 우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실력이 우승을 차지할 수 있는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 이외에 그들의 가상의 라이벌들이 돌풍이나 이변의 희생자로 일찌감치 탈락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과테말라가 체코슬로바키아를 탈락시켜주었고, 일본이 브라질과 프랑스를 탈락시켜주면서 상대적으로 헝가리의 우승을 향한 여정에 짐을 덜어준 것이다. 만약 체코슬로바키아와 브라질, 프랑스가 헝가리의 상대가 되었더라면 헝가리의 우승을 향한 행진에는 적지않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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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축구 19] 일본, 아시아에게 첫 동메달을 선사하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깊은 신뢰가 가져다 준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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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아시아의 대표로 멕시코를 밟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은 외국인 감독을 통해서 선진 축구를 도입하려고 하였다. 일본의 감독(엄밀히 말하면 기술 고문)으로 선정된 사람은 1954년 월드컵에서 헝가리를 꺾고 서독을 우승시킨 바 있는 독일의 제프 헬베르거의 수제자 중 한 명인 디트마르 크라머였다.

크라머는 이후 일본과 깊은 인연을 갖게 된다. 그는 비록 본선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1962년 칠레 월드컵 지역예선전에 일본팀을 이끌고 한국과 대결하기도 했으며,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는 남미의 아르헨티나를 꺾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일본 축구는 크라머를 통해서 한단계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고 있었다.

1967년 9월 27일부터 일본 도쿄에서 열린 지역예선 A조에는 일본, 한국, 베트남, 레바논, 대만(자유중국), 필리핀의 6개국이 한 장의 본선 티켓을 놓고 풀리그 전을 벌였다. 이들 중에서 한국과 일본이 1위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일 것이라는 예상 속에 양 팀은 약체로 지목된 팀들을 하나씩 격파해 나갔다.

일본이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15-0이라는 엄청난 스코어를 기록한 것은 크라머 감독의 결단력의 결과였다. 이미 5-0, 6-0의 스코어로 승리가 확실해진 상황에서 크라머 감독은 나중에 득실차를 다툴 때까지 생각하면서 선수들에게 계속 공격을 주문했다. 결국 일본과 한국은 4승 1무를 기록하여 골득실을 따지게 되었고, 크라머 감독의 예상대로 일본이 골득실에서 우세하여 멕시코 본선 진출을 확정짓게 되었다.

여하간 1968년 일본 축구 대표팀 사령탑을 맞은 크라머 감독은 일본팀을 이끌고 멕시코 본선 무대를 밟게 되었다. 지역예선에서 보여준 일본팀의 득점력은 물론 삼류 국가들과의 예선이라고 하더라도 4승 1무, 26득점 4실점(그중의 3실점이 한국과의 경기에서 나왔다)은 그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기에 충분했다.

# 조별리그, 브라질을 따돌리고 결승 토너먼트에 오르다

멕시코 올림픽 본선에서 일본은 강팀들과 한조가 되었다. 유럽 챔피언을 지낸 바 있는 스페인,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남미의 브라질, 그리고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가 그들의 상대였다. 일본으로서는 브라질은 올림픽과 인연이 없다는 징크스와 오늘과는 달리 나이지리아는 당시에는 만만한 팀이었다는 사실에 운명을 걸기로 작정한다.

일본의 첫 상대는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였다. 일본은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서 3-1로 승리를 거두며 귀중한 1승을 거두었다. 원하던 승리를 챙긴 일본의 다음번 상대는 남미의 강호 브라질이었다. 브라질은 첫 경기에서 스페인에게 0-1로 패하고 당황해하고 있었다. 일본은 크라머 감독의 용병술에 의하여 브라질과 1-1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는 2승으로 선두를 달리고 있는 스페인과의 경기였다. 일본으로서는 최소한 비기기만 해도 자력으로 8강이 겨루는 결승 토너먼트 진출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일본은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0-0으로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다른 한편에서 브라질은 나이지리아와 3-3으로 비기며 2무 1패로 1승 2무의 일본에게 밀리며 조 3위를 기록하고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 아시아 국가로서는 처음 획득한 값진 동메달

준준결승에서 일본은 유럽의 강호 프랑스를 만나게 되었다. 전반을 1-1로 비긴 일본은 후반에 두 골을 넣으며 3-1로 승리하고 준결승에 진출하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하였다. 일본은 이미 자신들의 목표를 초과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은 결승으로 가기 위해서 디팬딩 챔피언 헝가리와 맞붙었는데, 헝가리는 그동안 일본이 만났던 상대들과는 한 차원 높은 팀이었다. 결국 일본은 헝가리에게 0-5로 패하며 3-4위전(동메달 결정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동안 아시아의 국가 중에서는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인도가 4강에 진출해서 불가리아에게 0-3으로 패하며 4위를 차지한 것이 최고의 성적이었다. 아시아로서는 12년 전에 인도가 아깝게 놓친 동메달을 획득하기 위해서 일본이 나선 것이다.

일본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개최국 멕시코를 2-0으로 꺾으며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축구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다. 지역예선에서 접전을 벌이며 아깝게 탈락한 한국의 입장에서는 부럽기 그지없는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아시아로서는 1966년 월드컵에서 북한의 8강 신화에 이어 1968년 올림픽에서 일본이 동메달을 차지하며 더 이상 세계무대에서 들러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성적을 통해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 일본 축구의 아버지, 크라머 감독

크라머 감독은 일본 축구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그는 선수 개개인의 심리적인 상태를 체크하며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20여년 후, 한국의 올림픽 대표팀 총감독으로 부임한 크라머가 한국인 코칭스테프와 불화를 일으키며 중도에 하차하지 않았더라면, 한국 축구는 히딩크보다 10년 전에 세계를 놀라게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은 크라머 감독(엄밀히 말하면 기술 고문)의 지도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신뢰를 했고, 그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올림픽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크라머 감독은 1962년 칠레월드컵 지역예선에 이미 일본 대표팀을 맡아 한국과 대결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 한국 대표팀을 높게 평가하며 “언젠가는 한국 대표팀을 맡아보고 싶다”고 말했던 크라머 감독은 30년 만에 그 소원을 이루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당시 대표팀의 일원이었던 선수들이 기억하는 크라머 감독은 온화하고 선수들을 배려하는 감독이었다고 한다. 다른 코칭스테프들은 크라머 감독 때문에 우리나라 선수들이 훈련을 게을리 하다고 불평을 하였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한 나라의 대표로서 훈련을 게을리 하는 것은 감독의 책임보다는 선수 개개인의 책임이 큰 것이다. 결국 김삼락 감독을 대표하는 코칭스테프와의 불화는 올림픽 본선 이전에 크라머 감독이 해임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독일의 크라머 감독은 1992년 우리나라 대표팀 총감독으로서 선수들에게는 사랑받는 지도자였지만, 코칭스테프와 축구협회에게는 인정받지 못하는 지도자였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들 중에 히딩크와 아드보카트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감독들이 적응하지 못하고 아쉬움 속에 떠나갔다. 물론 그들 중에는 한국 대표팀과 맞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겠지만, 후에 돌이켜보면 성급한 판단과 깎아내리기의 결과가 아니었나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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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축구 18] 동유럽 축구의 강세와 그들의 한계
1968년 제19회 멕시코 올림픽 축구 지역예선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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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제19회 멕시코 올림픽

1968년 제19회 올림픽은 멕시코에서 개최되었다.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는 해발 2000m가 넘는 고지대였기 때문에 선수들이 경기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조건이었다. 멕시코는 올림픽 다음으로 1970년 제9회 월드컵 개최국으로 선정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세계적인 축구대회를 연속으로 개최하는 행운의 나라가 되었다.

멕시코 올림픽 축구 경기에는 총 16개 팀이 참가하였다. 개최국 멕시코와 전 대회 챔피언 헝가리가 자동으로 본선에 진출하였고, 유럽에서 4개국(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프랑스, 스페인), 남미에서 2개국(브라질과 콜롬비아), 북중미에서 2개국(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아프리카에서 3개국(기니, 나이지리아, 가나), 아시아에서 3개국(일본, 태국, 이스라엘)이 본선에 진출하였다.

# 지역예선 개관

유럽은 지역적으로 동 서로 나누어 4개의 조로 지역예선을 진행하였다. 공교롭게도 동쪽의 2개조는 동유럽을 대표하게 되었고, 서쪽의 2개조는 서유럽을 대표하게 되어 냉전의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동유럽에 할당된 두 장의 본선 티켓은 소련과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알바니아를 따돌린 체코슬로바키아와 동독과 루마니아, 그리스, 터키를 따돌린 불가리아가 차지하였다. 그리고 서유럽의 국가들 중에서는 프랑스가 네덜란드, 스위스, 핀란드, 오스트리아를 따돌리고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고, 스페인이 이탈리아, 서독, 영국, 아이슬란드를 따돌리고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다.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던 남미는 1970년 월드컵 개최 경쟁에서 고배를 마신 아르헨티나가 불참한 가운데 콜롬비아와 브라질이 2장의 본선 진출 티켓을 확보하였다. 첫 번째 라운드에서 파라과이에 이어 조 2위를 차지한 브라질은 결승 라운드에서 우루과이에게 1-2로 패하는 등 불안한 출발을 보였지만 최종적으로 2승 1패로 1위를 차지하여 2위인 콜롬비아와 함께 본선행을 확정하였다.

북중미의 멕시코가 개최국 자격으로 지역예선에는 참가하지 않게 된 북중미에서는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가 본선에 진출하는 감격을 누리게 되었다. 이들의 모습은 호랑이 없는 곳에 토끼가 왕이라는 속담을 떠올리게 하지만, 올림픽 축구는 월드컵 축구와는 달리 축구의 변방에 속한 팀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비장한 각오로 본선 무대를 밟은 팀들이었다.

아프리카에서는 기니, 나이지리아, 모로코가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본선 조편성에서 이스라엘과 같은 조가 된 모로코가 경기를 거부하며 불참을 선언하자 가나가 대신 출전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모로코의 모습은 순수 스포츠를 표방한 올림픽에서조차도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견해를 달리하는 국가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태국, 이스라엘이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한국 역시 지역예선에 참가했는데, 일본에 골득실로 뒤지는 바람에 본선 진출이 좌절되고 말았다. 일본은 필리핀에게 15-0으로 이긴 것이 골득실에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된 것이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축구 본선 조편성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축구 본선 조편성

A조 : 프랑스, 멕시코, 콜롬비아, 기니
B조 : 스페인, 일본, 브라질, 나이지리아
C조 : 헝가리, 이스라엘, 가나, 엘살바도르
D조 : 불가리아, 과테말라, 체코슬로바키아, 태국



# 월드컵에 비해서 밀리는 올림픽 축구

1960년대를 보내면서 올림픽 축구는 월드컵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인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순수 아마추어리즘을 고집하는 것과 아울러,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북중미 같은 축구의 변방 그룹에 상대적으로 많은 본선 티켓을 할당하면서 월드컵보다는 한 단계 낮은 수준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월드컵에 참가하기위해서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던 유럽의 강호들이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 집중하게 되면서 올림픽에 대한 비중이 경감되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의 존재가 사라진 올림픽 축구 무대에서 동유럽의 국가들이 단연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동유럽 국가들은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국가적인 스포츠 시스템에 의해서 훈련받고 단련되었기 때문에 조직력이 상당히 강한 팀들이었다. 이들은 올림픽에서 발군의 기량을 선보이며 앞서나갔다.

그러나 동유럽 국가들은 월드컵에서는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는데, 동유럽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조직력은 월드컵에서도 통할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경기에 임해서 경기의 흐름에 대처하는 창조력이 약간 부족하였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동유럽의 축구는 노력하는 자의 수준에는 도달한 것 같다. 그러나 브라질과 같이 축구를 즐기는 단계로까지는 도약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추어의 무대인 올림픽에서는 동유럽 국가들의 강세와 함께 축구 변방에게 많은 출전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있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은 둥글기 때문에 그들 중에서 어떤 팀이 이변을 몰고 올 것인지는 월드컵이 아닌 올림픽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매력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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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축구 17] 헝가리, 12년 전의 영광을 재현하다
1964년 동경 올림픽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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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별리그 : 헝가리, “12년 전의 영광을 재현하라!”

비록 4개월 전에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 3위에 그쳤지만 헝가리는 자신들이 유럽의 상위 그룹에 속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하였다. 그리고 나아가서 4개월 뒤에 열린 1964년 동경 올림픽에서 12년 전 ‘매직 마자르’의 신화를 재현하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물론 12년 전의 무패를 자랑하는 최강 군단은 아니었지만 헝가리로서는 ‘유럽축구선수권대회’를 통해서 실전 경험을 풍부하게 쌓은 셈이 되었다.

헝가리는 유고슬라비아, 모로코, 북한과 본선 C조에 속했다. 북한이 대표팀을 철수하는 바람에 3팀 중 상위 2팀이 준준결승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아프리카의 대표인 모로코는 헝가리나 유고슬라비아에 비하여 약체로 평가되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 중에서 누가 조 1위가 되는가에 쏠려 있었다.

헝가리는 조별리그 첫 번째 경기로 10월 11일 모로코를 상대로 6-0이라는 스코어로 승리하면서 기분 좋은 출발을 하였다. 이틀 뒤 유고슬라비아가 모로코를 3-1로 격파한 것을 보면 헝가리의 공격이 훨씬 날카롭다는 예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축구는 상황과 상대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헝가리는 방심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유고슬라비아는 4년 전 올림픽에서 우승을 한 팀으로 2년 전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르는 등,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팀이었다.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는 10월 15일에 열렸는데, 양 팀은 총 아홉 골을 넣으며 접전을 벌였다. 이 경기에서 헝가리가 5-4로 승리하고 조 1위를 차지하였고, 유고슬라비아는 조 2위로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하게 되었다.

# 결승 토너먼트 : 헝가리, “12년 전 영광을 재현하다!”

헝가리의 준준결승 상대는 동유럽의 루마니아였다. 루마니아는 A조에서 멕시코(3-1)와 이란(1-0)을 제압하고, 동독과 1-1로 무승부를 기록하여 2승 1패로 동독과 동률을 이루었으나 골득실에 의해서 동독에게 1위 자리를 내어주고 2위로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한 팀이었다.

10월 18일에 열린 루마니아와의 경기에서 헝가리는 2-0으로 승리하고 준결승에 진출하였다. 헝가리의 준결승 상대는 아프리카의 이집트였다. 이집트는 조별리그에서 한국의 도움으로 브라질에 골득실에서 앞서 2위로 본선에 진출하여 준준결승에서 D조 1위인 가나를 5-1로 대파하며 준결승에 합류한 팀이다.

10월 20일, 헝가리는 준결승에서 이집트를 6-0으로 가볍게 격파하고 결승에 올랐다. 헝가리의 결승 상대는 동유럽의 강호 체코슬로바키아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2년 전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강력한 팀으로 조별리그에서 브라질(1-0), 이집트(5-1), 한국(6-1)을 제압하며 조 1위를 차지하였고, 준준결승전에서 일본을 4-0으로 제압하고 준결승전에서는 동독에게 2-1로 역전승하고 결승에 진출한 팀이다.

10월 23일,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는 2년 전 월드컵 준준결승 이후 다시 한번 국제대회에서 만나게 되었다. 2년 전에는 체코슬로바키아가 1-0으로 승리하며 그 기세를 몰아 결승까지 진출하여 준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월드컵 준준결승에서 만났지만 이번에는 올림픽 결승전에서 만난 것이다.

헝가리는 2년 전의 패배를 기억하며 필승을 다짐했고, 결국 헝가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2-1로 제압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헝가리로서는 2년 전 월드컵에서 당한 패배에 대하여 설욕할 수 있었고, 나아가 12년 전 ‘매직 마자르’ 시절 달성했던 올림픽 챔피언에 오르게 되었다.

3-4위전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에게 패한 동독과 헝가리에게 패한 이집트가 대결을 펼쳤는데 동독이 3-1로 승리를 거두며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한편 4강 진출에 실패한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일본, 가나가 '패자부활전'으로 스스로를 위로하였는데, 루마니아가 유고슬라비아를 3-0으로 꺾으며 패자들의 승자가 되었다.

# 남미축구 탈락에 공헌한 일본과 한국

헝가리의 우승으로 끝난 이번 대회에서는 남미축구가 결승 토너먼트에도 오르지 못하고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D조의 아르헨티나는 가나, 일본에 이어 1무 1패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당시에 아르헨티나를 3-2로 제압한 일본은 스스로 자신들이 아르헨티나를 꺾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일본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스웨덴을 3-2로 꺾는 이변의 주인공이었는데, 이번에 아르헨티나도 꺾으며 세계를 다시 한번 놀라게 하였다.

일본이 아르헨티나를 꺾으며 남미의 아르헨티나를 조별리그에서 탈락시켰다면, 한국은 부끄럽게도 이집트에게 패하며 브라질의 탈락을 도와주게 되었다. 이집트와 브라질이 1승 1무 1패를 기록하며 승점이 같아졌는데, 한국을 10-0으로 제압한 이집트가 골득실에서 앞서는 바람에 브라질이 탈락하게 된 것이다.

남미축구는 올림픽에서는 유럽, 특히 동유럽의 국가들에게 맥을 못추며 다음번 대회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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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입니다

[올림픽 축구 16] 동유럽의 강세와 축구 변방에게 기회가 주어진 대회
[1964년 동경 올림픽] 올림픽 축구, 아마추어 축구의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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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추어 축구의 자존심, 올림픽 축구

월드컵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홀대하는 것에 비해 올림픽 축구는 상대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배려해 주었다. 1964년 일본에서 열린 동경 올림픽에서 올림픽 축구는 개최국 일본과 디팬딩 챔피언 유고슬라비아가 자동으로 본선 진출하였고, 유럽이 5장, 남미가 2장, 북중미가 1장, 그리고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각각 3장의 본선 진출 티켓을 할당받았다. 그만큼 아마추어에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배려해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마추어리즘을 선언한 올림픽 축구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올림픽 축구가 위축되는 계기 중의 하나로 1960년부터 시작된 유럽선수권대회를 꼽을 수 있는데, 이 대회가 올림픽과 같은 해에 치러지기 때문에 유럽의 국가들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유럽선수권대회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비록 프로의 참여가 금지되고 있었지만, 올림픽 축구의 수준은 점차 발전하고 있었고 프로 축구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예를 들어 1956년 올림픽 챔피언 소련과, 1960년 올림픽 챔피언 유고슬라비아가 월드컵에서 정상급 실력을 선보이며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올림픽 축구는 비록 월드컵과 같은 프로 선수가 참여하는 대회보다는 비중이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아마추어 축구의 챔피언을 결정하는 대회로 ‘아마추어 축구의 자존심’을 지키는 대회가 되었다.

# 지역예선 개관

1964년 올림픽 축구는 유럽과 남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본선 진출을 향한 과정이 쉬웠다.

다섯 장이 할당된 유럽의 지역예선에서는 루마니아, 헝가리, 동독,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가 본선 진출권을 획득하였다.

제1조에서 루마니아는 덴마크와 불가리아를 따돌리고 본선 진출에 성공했는데, 덴마크와는 플레이오프까지 가는 힘겨운 승부를 벌이기도 했다. 제2조의 헝가리는 스웨덴과 스페인을 따돌리고 본선에 합류했다.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나라는 제3조의 동독이었다. 동독은 서독, 네덜란드, 소련을 차례로 제압하면서 본선에 합류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제4조에서는 이탈리아가 터키와 폴란드를 누르고 본선 진출권을 획득했다. 마지막 남은 한 장의 티켓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영국과 프랑스, 그리스를 따돌리고 획득했다.

남미의 지역예선은 아르헨티나가 5승 무패(11득점 1실점)의 뛰어난 성적으로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고, 브라질은 페루와 플레이오프를 치르며 남은 한 장의 본선티켓을 확보했다.

북중미에서는 멕시코의 적수가 없었다. 멕시코는 수리남(6-0), 파나마(5-1), 미국(2-1)을 제압하고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아프리카 지역예선에서는 이집트가 우간다와 수단을 꺾고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으며, 가나는 라이베리아와 튀니지를 제압하고 본선 진출에 성공했고, 모로코는 나이지리아와 이디오피아를 제압하며 본선 진출에 합류했다.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대만을 꺾고, 이스라엘을 누르고 올라온 베트남을 1승(3-0) 1무(2-2)로 누르고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북한은 버마(미얀마)를 1승(1-0) 1무(0-0)로 누른 뒤에, 태국을 두 번 격파하며(2-0, 5-0) 본선에 합류했다. 중동지역에서는 이란이 파키스탄, 이라크, 인도를 차례로 격파하며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본선 진출에 성공한 나라들 중 이탈리아는 금메달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선언했지만 선수 중에 이미 프로에서 뛰고 있는 '산드로 마초라'의 자격이 문제가 되어 본선 참가를 포기했다. 그리고 북한은 육상 등에서 출전 자격 정지에 반발하여 본선 대회에서 철수해 버렸다.

1964년 동경올림픽 축구 본선 조편성

A : 동독, 루마니아, 멕시코, 이란
B :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모로코, 북한
C : 체코슬로바키아, 이집트, 브라질, 한국
D : 가나, 일본,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 북한과 이탈리아가 본선 대회에 불참



# 동유럽의 강세와 축구변방에게 기회가 주어진 대회

유럽에서 올림픽 본선 진출 자격을 얻은 다섯 나라 중에서 네 나라가 동유럽의 국가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프로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고 있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비록 아마추어 선수들이지만 프로급의 실력을 갖춘 선수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동유럽 국가들은 1950년대 이후 올림픽 축구를 지배하고 있었다. 1948년 스웨덴이 우승한 이후 세 번 연속으로 동유럽 국가들이 우승을 달성하였는데, 서유럽 국가들은 프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마추어 축구가 약했기 때문에 동유럽 국가들이 올림픽에서 펄펄 나는 것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남미 축구는 올림픽에서는 더 심각한 상태였다. 우루과이가 올림픽에서 우승한 이후, 1930년대 이후 남미 축구는 올림픽에서 4강에 오른 팀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초라한 성적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지역예선을 무패의 성적으로 통과한 아르헨티나와 영원한 축구 강국 브라질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올림픽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국가들에게는 그동안 쌓아온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월드컵에서 잇다른 참패와 축구선진국들의 방해로 본선에조차 오르지 못하는 1950년대의 좌절기를 거치며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나름대로 꾸준히 실력을 쌓아왔다. 월드컵과 같은 뛰어난 팀들이 참가하는 대회에서 경험을 쌓지 못한 것이 약점인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서서히 점차적으로 실력을 향상시켜왔고, 올림픽 무대는 그들이 보다 높은 축구의 기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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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축구 15] 유고슬라비아, 3전 4기의 신화
1960년 올림픽 축구, 행운의 여신도 그들의 신화에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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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의 준우승, 이제는 우승할 때도 되었다

축구가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지 50여 년이 흐르면서 초창기의 투박한 모습은 많이 세련되어졌다. 이렇게 점차 모양이 갖추어지면서 올림픽 축구 대회는 본선 진출을 위한 지역예선조차도 상당히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새롭게 출발한 올림픽 축구에서(1948년, 1952년, 1956년) 모두 다 결승에 진출했지만 결승전에서 상대방에게 패하며 아쉽게 준우승에 머문 유고슬라비아로서는 1960년 로마 올림픽은 네 번째 도전이었다.

4년 전 챔피언이었던 소련이 지역예선에서 불가리아에게 밀려 본선에 오르지도 못한 것은 유고슬라비아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본선에서 그것도 결승전이라는 큰 경기에서 패한 적이 있는 팀은 실력을 떠나서 상당한 부담을 줄 수 있는 팀이기 때문에 소련의 탈락은 유고슬라비아로서는 기쁨이었다.

한편 유고슬라비아에게 마냥 다행스러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4년이라는 세월 동안 다른 나라들이 상당한 실력을 쌓았고, 지역예선을 통해서 상당히 위협적인 팀이 많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힘들게 통과한 조별리그

유고슬라비아는 불가리아, 이집트, 터키와 1조에 속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을 피한 것이 그들로서는 행운이었으며, 소련을 따돌리고 올라온 불가리아를 제외하고는 쉬운 경기가 예상되었다.

8월 26일, 이집트와의 첫 경기에서 유고슬라비아는 코스틱(Kostic)이 세 골을 넣는 활약을 하며 6-1로 승리하고 기분 좋은 출발을 했다. 같은 날 불가리아 역시 터키를 3-0으로 제압하며 1승을 거두었다.

8월 29일, 터키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 유고슬라비아는 코스틱(Kostic)이 두 골을 넣는 활약을 하며 4-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날 불가리아 역시 이집트를 2-0으로 꺾으며 2승째를 거두었다.

9월 1일, 2승을 기록하고 있는 유고슬라비아는 역시 2승을 기록하고 있는 불가리아와 조별리그 통과를 위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이 경기에서 양 팀은 전반을 득점없이 비겼지만, 후반전에는 총 여섯 골이 터지는 접전을 벌였다. 유고슬라비아는 Galic이 헤트트릭을 하였고, 불가리아는 Kovatchev(1골), Debarski(2골)의 활약으로 양 팀은 3-3으로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행운의 여신, 유고슬라비아를 돕다.

유고슬라비아가 조별리그에서 거둔 성적은 2승 1무, 불가리아 역시 2승 1무를 기록하였다. 하나의 팀만이 선택되어 준결승에 진출할 자격을 얻게 되는 상황에서, 행운의 여신은 유고슬라비아를 선택했다. 당시의 피파의 기록을 살펴보면 양 팀이 승점이 같았기 때문에 동전 던지기로 조별리그 통과자를 가렸으며, 그 행운의 주인공은 유고슬라비아였다고 알려주고 있다.

어렵게 불가리아를 따돌리고 준결승에 진출한 유고슬라비아는 이탈리아와 결승 진출을 놓고 한바탕 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개최국으로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브라질을 3-1로 꺾으며 2승 1무를 기록하였고, 2승 1패의 브라질을 극적으로 따돌리고 준결승에 진출한 팀이었다.

9월 5일에 치러진 유고슬라비아와 이탈리아와의 경기는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1-1로 비겼는데, 다시 한 번 동전 던지기로 결승 진출자를 가린 결과 유고슬라비아가 선택되었다. 유고슬라비아로서는 행운의 여신이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미소를 던져준 것이다.

유고슬라비아, 마침내 금메달을 획득하다.

유고슬라비아의 결승전 상대는 막강한 전력으로 지역예선부터 조별리그까지 무패의 전적을 자랑하는 헝가리를 2-0으로 잠재운 덴마크였다. 덴마크는 당시에 남미의 강호 아르헨티나와 지역예선에서 무패로 본선에 진출한 동유럽의 다크호스 폴란드, 그리고 비교적 약체인 튀니지와 한조를 이루며 힘든 조별리그가 될 것이 예상되었지만 아르헨티나(3-2), 폴란드(2-1), 튀니지(3-1)를 차례로 격파하고 준결승에서 헝가리까지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

앞선 두 번의 행운으로 결승까지 오른 유고슬라비아는 결승전까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비록 결승까지는 누군가의 도움이 작용했다고 하지만, 결승에서만큼은 자신들의 실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우승을 해야 비로소 진정한 챔피언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9월 10일에 치러진 결승전에서 유고슬라비아는 전반에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Galic이 30야드를 돌진하여 첫 골을 넣었고, 11분에 Matus가 유고슬라비아의 두 번째 골을 넣으며 2-0으로 앞선 상황에서 전반전을 마감하였다. 비록 점수상으로는 2-0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후반전을 맞이하였지만, 유고슬라비아는 전반에 Galic이 심판에게 무례한 행동을 해서 퇴장당하고 10명이 싸워야 했다.

숫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네 번째 도전에서 반드시 금메달을 따야겠다는 유고슬라비아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서 싸웠고, 결국 후반전에는 양 팀이 한 골씩 추가하며 최종 스코어는 3-1, 유고슬라비아의 승리로 끝났다.

세 번의 준우승 이후 차지한 우승이기에 유고슬라비아로서는 감격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결승전 전날에 치러진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헝가리가 이탈리아를 2-1로 꺾으며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올림픽 축구 14] 남미축구의 자존심을 회복하라!
1960년 로마 올림픽 축구 지역예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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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로마 올림픽 축구대회

1960년 로마 올림픽은 개최국 이탈리아를 포함하여 지역예선을 통과한 15개 팀이 본선에 합류했다. 유럽에서 7개국(덴마크, 폴란드,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영국, 프랑스, 헝가리), 아메리카 대륙에서 3개국(아르헨티나, 페루, 브라질), 아프리카에서 2개국(이집트, 튀니지), 아시아에서 2개국(인도, 대만), 그리고 근동에서 1개국(터키)이 참가했다.

# 유럽 대륙의 지역예선

유럽의 지역은 총 7개의 티켓이 걸려 있었는데 대부분 강자로 인정받은 팀들이 지역예선을 통과했다.

덴마크는 아이슬란드와 노르웨이를 제압하며 본선에 합류하여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힘찬 출발을 했다. 세 번 연속으로 올림픽에서 준우승에 머물렀던 유고슬라비아는 네 번째 도전을 위해 이스라엘과 그리스를 따돌렸는데, 이스라엘로서는 2승 1무 1패로 유고슬라비아와 동률을 이루었으나 골득실에서 밀려 탈락하고 말았다.

영국은 아일랜드와 네덜란드를 제압하며 본선에 올랐는데, 네덜란드로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내세울만한 성적을 내지 못하며 고국의 축구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프랑스는 룩셈부르크와 스위스를 제압하며 여전히 강자의 면모를 유지했다.

유럽의 치열한 지역예선을 통과한 팀들 중에 두각을 나타내는 나라도 있었다. 그 중에 동유럽의 폴란드는 전승(4승)으로 서독(1승 3패)과 핀란드(1승 3패)를 꺾으며 자신들이 강함을 증명했다. 그 밖에 헝가리는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와 한조가 되었지만 4승으로 체코슬로바키아(1승 1무 2패), 오스트리아(1무 3패)를 제치고 본선에 올라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올랐다.

지역예선 이변의 주인공은 불가리아가 차지했다. 불가리아는 2승 1무 1패를 기록하며 디팬딩 챔피언 소련(1승 2무 1패)과 루마니아(1승 1무 2패)을 따돌리며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다.

# 아시아, 아프리카, 근동의 지역예선

아프리카에서는 첫 번째 라운드에서 튀니지가 모로코와 몰타를 따돌리고 최종 라운드에 진출했고, 이집트는 가나와 나이지리아를 제압하며 최종 라운드에 진출했다. 수단은 이디오피아와 우간다를 제치며 최종 라운드에 진출했으나 이집트(3승 1무), 튀니지(1승 1무 2패)에 이어 1승 3패로 3위를 차지하여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그 밖에 아시아에서는 대만과 인도가 일본, 한국 등을 따돌리고 본선에 합류하였고, 근동 지역에서는 터키가 이라크와 레바논을 제치고 마지막 남은 본선 티켓을 획득하였다.

# 아메리카 대륙의 지역예선

1960년 지역예선에서 아메리카 대륙이 하나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3장의 본선 티켓을 놓고 격돌하였다. 북미에서는 멕시코와 수리남이 최종 라운드에 진출했고, 남미에서는 칠레를 누른 아르헨티나, 콜롬비아를 제친 브라질, 우루과이를 꺾은 페루가 최종 라운드에 진출했다. 총 다섯 개 나라가 3장의 본선 티켓을 놓고 격돌한 최종 라운드에서 아르헨티나가 4승으로 1위를 차지했고, 2위는 브라질을 2-0으로 격파한 페루가 차지하였다. 브라질로서는 아르헨티나와 페루에게 패했지만 나머지 북미의 멕시코와 수리남을 격파하며 간신히 본선 티켓을 확보할 수 있었다.

# 남미 축구의 자존심을 회복하라!

프로의 참여가 허용된 월드컵에 비해서 올림픽의 무대에서 남미의 위치는 그다지 확고하지 않았다. 1924년과 1928년 올림픽에서 우루과이가 돌풍을 일으키며 우승한 이후, 남미의 축구는 네 번의 올림픽 무대에서 단 한차례도 4강 진출을 이루지 못했다. 유능한 선수들이 일찍 프로의 무대에 뛰어들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남미 축구로서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지역예선을 통과한 남미의 세 나라는 나름대로 남미 축구의 자존심을 회복해야 할 사명이 있었다. 월드컵(프로)의 무대에서는 축구의 양대산맥을 형성하고 있지만, 올림픽에서의 부진함을 털어버리기 위해서 우선 아르헨티나가 주목을 받았다. 그들은 탄탄한 실력으로 지역예선에서 6전 전승(25득점, 6실점)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에 반드시 본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되었다.

다음으로는 비록 지역예선에서는 페루와 아르헨티나에게 패했지만, 2년 전 월드컵을 기억하는 세계의 축구팬들에게 브라질은 강력하고 화려한 팀으로 확실히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브라질 또한 지역예선과 본선은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본선에서 지역예선에서의 부진을 씻으려고 벼르고 있었다.

페루는 지역예선에서 브라질을 2-0으로 격파하며 2위로 본선행을 확정지었지만, 세계의 무대에는 낯선 팀이었다. 그러나 남미의 축구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증명해 보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1960년 로마 올림픽을 기다리는 세계의 축구팬들은 남미 축구가 아마추어의 무대에서도 그들의 뛰어남을 증명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 새로운 경기 방식의 도입

1960년 로마 올림픽 축구 대회에서는 과거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본선 대회를 진행하였다. 한번의 경기로 초반에 탈락하는 토너먼트 방식에서 4개 팀이 한 조가 되어 조별리그를 벌이고, 그들의 승자가 준결승에 진출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본선에 참가한 팀들에게는 각자 3번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그 기회를 잘 살려서 각 조의 최종 승자가 되는 것이 첫번째 목표가 되었다.

 

# 1960년 로마 올림픽 축구 본선 조편성

 

1조 : 유고, 불가리아, 이집트, 터키
2조 : 이탈리아, 브라질, 영국, 대만
3조 : 덴마크, 아르헨티나, 폴란드, 튀니지
4조 : 헝가리, 프랑스, 페루,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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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도 올립니다.

[올림픽 축구 13] 소련, 아마추어 대회의 정상에 오르다
[1956년 올림픽] 월드컵에 밀리기 시작한 올림픽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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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 아마추어를 고집하는 올림픽 축구


올림픽 축구는 1950년대 이후 그 규모나 위상이 월드컵에 비해서 상당히 축소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올림픽 축구 대회에 참가팀의 수준이 월드컵에 비해서 떨어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철저하게 프로 선수의 참여를 제한하고 있는 올림픽 정신 때문이다.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프로화가 활발히 진행되는 종목에서 아마추어 대회는 프로로의 진출을 위한 디딤돌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다시 말해 아마추어 대회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해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이후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길(프로의 길)에 접어들기가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프로는 이미 자체적으로 선수를 선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전에 뛰어난 기량을 보유하고 있는 선수들을 발굴하기 위한 스카웃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량이 뛰어난 선수는 일찍 프로의 무대에 뛰어들어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축구의 경우는 이미 상당히 프로화가 진행되어 있었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유명한 프로 구단이 아마추어 대회를 거치기 이전부터 뛰어난 선수는 거의 다 프로 선수가 되어 있었다.

소련과 같은 동유럽 국가들은 프로의 존재가 원천 봉쇄되고 있었기 때문에 축구에서 막강한 전력을 아마추어 팀이 보유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냉전 기간 동안 동유럽의 축구는 올림픽에서 정상의 자리를 오랫동안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월드컵에서 절대 강자로 떠오른 브라질이 올림픽에서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것에 대한 설명이 된다.

# 11개국이 참가한 초라한 올림픽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축구 경기는 1912년 이래 가장 적은 규모의 축구대회가 되었다. 총 11개 나라가 참가했는데(소련,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일본, 태국, 인도네시아, 인도, 서독, 영국, 호주, 미국), 당시에 유럽과 남미의 대부분의 축구 열강이 불참을 선언하였고, 축구의 불모지로 여겨지는 아시아에서 4개의 나라가 참가할 정도로 역대 대회에서 중량감이 상당히 떨어지는 대회가 되었다.

이 대회는 프로의 참여가 공식적으로 허용된 월드컵이 화려하게 성공을 거두면서 상대적으로 그 비중이 절감된 측면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헝가리 혁명(1956년 10월 23일)이라는 역사적인 배경이 존재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헝가리는 전쟁이 끝나면서 소련에 의해서 공산화가 진행되었는데, 스탈린 사후 소련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헝가리 민중들에 의해서 혁명으로 크게 타올랐다. 이 ‘헝가리 혁명’은 소련군의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견고했던 ‘철의 장막’을 무너뜨리기 위한 자유를 위한 운동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바로 이 헝가리 혁명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서방의 국가들은 소련과의 정치적인 관계 때문에 침묵을 지키며 자유를 위한 헝가리 민중들의 죽음을 외면했다. 그러나 그해 겨울 남반구 호주의 멜버른에서 열리는 올림픽 축구 종목에서는 소련의 만행에 대해서 다수의 국가들이 참가를 거절하면서 헝가리 민중들의 죽음에 대해 동참했다.

물론 이러한 불참이 전적으로 헝가리 침공에 저항의 의미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불참한 나라들은 나름대로 다각적인 측면에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세대들을 위하여 초라하게 줄어든 참가국이 자유를 짓밟은 만행에 대한 항거였다는 설명은 중요한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소련, 올림픽 정상에 서다

소련은 4년 전 헬싱키 올림픽에 참가해서 첫 번째 라운드에서 불가리아에게 연장전 승부 끝에 2-1로 이기고 16강에 진출했었다. 16강에서 유고슬라비아에게 0-3으로 뒤지다가 5-5로 극적인 무승부를 이룬 소련은 재경기에서 1-3으로 패하고 탈락한 바 있었다.

1956년, 다시 한 번 올림픽에 도전하는 소련은 4년 전에 상대했던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 그리고 비록 프로 선수가 빠졌다고 하지만 서독과 영국의 존재가 상당히 거슬렸을 뿐, 나머지는 그다지 걱정할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소련이 우승을 노릴 수 있었던 것은 훗날 전설이 되어버린 야신이라는 골키퍼가 그들의 골문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11월 24일, 첫 번째 라운드에서 월드컵 챔피언 서독을 만났다. 소련은 프로 선수가 빠진 서독에게 2-1로 승리하며, 8강에 진출했다.

소련의 8강 상대는 아시아의 인도네시아였다. 이 경기는 당연히 소련의 승리로 예상되었으나 인도네시아의 수비는 소련을 당황케 하였다. 인도네시아는 소련이 공격을 하게 되면 한명의 스트라이커를 제외한 열 명이 페널티 지역에 들어가서 수비했다. 이러한 인도네시아의 작전은 성공했고 소련은 인도네시아와 0-0의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강자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강자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는’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소련이 강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인도네시아의 밀집수비를 뚫어야 했다. 결국 소련은 재경기에서 Sergei Salnikov가 두 골을 넣는 활약에 힘입어 4-0으로 승리하고 준결승에 진출하였다.

소련의 준결승 상대는 4년 전에 연장 승부 끝에 이긴 바 있는 불가리아였다. 불가리아는 영국(Great Britain)을 6-1로 격파하며 준결승에 진출하였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사기가 올라 있었다. 이 경기에서 소련은 수비수 Nikolai Tisjenko가 쇄골뼈 부상을 당했지만 당시에 선수교체의 룰이 없었기 때문에 붕대를 감고 뛰는 투혼을 발휘했으며, 이러한 정신력이 발판이 되어 소련은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2-1로 승리하고 결승에 올랐다.

불가리아는 연장전에서 먼저 선취골을 넣었지만 소련의 Eduard Strelzov와 Boris Tatushin에게 연속으로 골을 허용하며 역전패하고 3-4위전으로 밀려났다. 불가리아는 3-4위전에서 인도에게 3-0으로 승리하고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소련의 결승전 상대인 유고슬라비아는 4년 전에 소련을 재경기 끝에 이긴 뒤 끝내 결승에까지 올라 스웨덴에게 패하며 준우승을 차지한 동유럽의 강호였다. 또한 이들은 2년 전 월드컵에도 참가하여 8강 토너먼트까지 진출한 경험이 있었다. 월드컵에서 빈곤한 득점력을 보여주었던 유고슬라비아는 이번 대회에서 미국을 9-1, 인도를 4-1로 누르고 결승에 진출하였다.

12월 8일, 10만 명이 입장한 올림픽 파크에서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의 결승전이 벌어졌다. 후반전에 소련의 Anatoly Ilyin의 헤딩 골은 득점으로 인정되었지만, 유고슬라비아의 Zlako Papec의 골은 오프사이드가 선언되었다. 결국 소련이 1-0으로 승리하고 올림픽 정상에 등극하였다. 유고슬라비아로서는 세 번의 연속 준우승(1948년, 1952년, 1956년)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작성하였다.

이 대회는 비록 그 규모나 중량감은 역대 다른 대회들이나 월드컵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감이 있다. 그러나 전설적인 한 선수가 화려하게 국제무대에 등장하였는데, 그가 바로 소련의 수문장 레프 야신이었다. 오늘날 월드컵에서 최고의 골키퍼에게 수여되는 ‘야신상’은 바로 그를 기억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상이다.

[올림픽 축구 12] 헝가리, 불패의 신화를 시작하다
[1952년 올림픽] 완벽한 우승, 헝가리 신화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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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5회 헬싱키 올림픽

1952년 제15회 헬싱키 올림픽에는 총 25개 팀이 참가를 희망했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령 큐라소(Curacao), 핀란드, 서독, 노르웨이, 스웨덴, 터키 등 7개 나라가 부전승으로 16강에 진출하고, 나머지 18개 팀(헝가리, 루마니아, 덴마크, 그리스, 폴란드,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인도, 이탈리아, 미국, 이집트, 칠레, 룩셈부르크, 영국, 브라질, 네덜란드, 소련, 불가리아)이 16강의 나머지 9자리를 위해서 서로 대결을 펼쳤다.

16강 결정전에서 이름 있는 나라들이 줄줄이 탈락하고 일찌감치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그 중에는 축구 종주국 영국(Great Britain)이 포함되어 있었다. 영국은 1950년 잉글랜드의 충격적 패배 이후, 올림픽에 단일팀을 이루어 출전했지만 당시 유럽에서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던 약체인 룩셈부르크에게 3-5로 패하고 말았다. 그 밖에 루마니아는 헝가리에게, 프랑스는 폴란드에게, 네덜란드는 브라질에게 패하고 16강에도 들지 못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 매직 마자르, 헝가리의 등장

루마니아를 2-1로 제압하며 16강에 오른 헝가리는 1950년 5월 이후로 무패의 행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만약 헝가리가 1950년 제4회 브라질 월드컵에 참가했었더라면 헝가리의 축구 역사와 세계 축구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헝가리의 축구 실력은 대단했다.

결과적으로 1950년대 중후반 이후 브라질이 세계 최강의 군단으로 등극하지만, 그 이전에 세계 축구는 ‘매직 마자르’라고 불리우는 마법사 군단 헝가리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헝가리는 1952년 제15회 헬싱키 올림픽에 출전하여 아마추어 무대를 정복하고, 뒤이어 1954년 제5회 스위스 월드컵에서 프로의 무대도 접수해 버리기 위한 거침없는 행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1950년 제4회 브라질 월드컵이 남미 축구의 진가를 보여주었다면 1952년 제15회 헬싱키 올림픽은 동유럽 축구의 진가를 보여준 대회였다. 특별히 올림픽의 역사에서 1950년대 이후는 동유럽 축구가 오랜 기간 동안 정상을 차지하게 된다.

‘매직 마자르’의 헝가리는 전설적인 영웅 푸스카스(Ferenc Puskas)와 뛰어난 골게터 콕시스(Sandor Kocsis)를 앞세워 올림픽 정상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기 시작했다.

# 헝가리, 정상을 향한 행진

16강에서 헝가리가 만난 상대는 1930년대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아주리 군단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는 16강 결정전에서 미국을 8-0으로 대파하며 기대를 걸었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다. 헝가리는 1952년 7월 21일에 이탈리아를 상대로 팔로타스(Palotas)가 두 골, 그리고 콕시스가 한 골을 넣으며 이탈리아를 3-0으로 잠재워 버렸다.

7월 24일, 헝가리는 8강에서 터키를 상대로 일곱 골을 넣으며 7-1로 가볍게 승리하고 준결승에 진출하였다. 이 날의 경기에서 푸스카스와 콕시스는 나란히 두 골을 넣으며 헝가리의 승리를 도왔다.

헝가리는 준결승에서 디팬딩 챔피언 스웨덴을 만났다. 올림픽 챔피언이었던 스웨덴은 2년 전 월드컵에서 남미 축구에게 호되게 당하며 3위에 머무르며 자존심을 구긴 바 있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타이틀을 방어하기 위해 출전한 스웨덴은 16강에서 노르웨이를 꺾고(4-1), 8강에서 오스트리아를 제압하며(3-1) 준결승에 진출하였다.

헝가리와 4년 전의 챔피언과의 경기는 의외로 쉽게 끝났다. 헝가리는 골게터 콕시스가 두 골을 넣으며 6-0으로 승리하였는데, 헝가리의 공격력은 그야말로 화려함 그 자체였다.

# 올림픽 정상, 그리고 또 다른 정상을 향한 시작

결승까지 거침없이 행진한 헝가리의 마지막 상대는 또 하나의 동유럽의 강국 유고슬라비아였다. 유고슬라비아는 4년 전에 스웨덴에게 패하며 은메달에 머문 바 있었고, 2년 전 남미에서 벌어진 월드컵에서도 브라질과 접전을 벌일 정도로 강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유고슬라비아는 16강 결정전에서 인도(10-1), 16강에서 소련과 비긴 후(5-5) 재경기를 통해 3-1로 승리하고 8강에 진출하여 덴마크를 5-3으로 제압하고 준결승에 올랐다. 유고슬라비아는 준결승에서 남미의 브라질을 연장 승부 끝에 4-2로 꺾고 올라온 서독을 3-1로 제압하고 결승에 올랐다.

6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8월 2일 열린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의 결승전에서 헝가리는 푸스카스가 25분에 선제골을 넣었고, 후반에 치보르(Czibor)가 경기 종료를 2분 남겨놓고 1-0의 불안한 리드에서 벗어나는 쐐기골을 넣으며 헝가리에게 금메달을 안겨주었다.

유고슬라비아로서는 4년 전의 결승전 패배에 이어 또다시 결승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유고슬라비아로서는 자국의 선수들인 Mitic와 Zebec이 나란히 7골로 최다 득점자에 오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한편 스웨덴과 서독의 3-4위전에서는 스웨덴이 2-0으로 승리하며 동메달을 차지하였다.

헝가리는 우승하기까지 20골을 넣고, 2골을 실점하며 5연승으로 완벽하게 금메달을 거머쥐게 되었다. 골게터 콕시스는 결승전을 제외한 네 경기에서 매 경기 득점하며 총 6골로 팀이 5연승을 하는데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또한 팀의 주장인 푸스카스는 결승전의 한 골을 포함하여 네 골을 넣으며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아마추어의 정상인 올림픽을 재패한 헝가리로서는 다음 번 목표가 분명했다. 2년 뒤에 열릴 1954년 제5회 스위스 월드컵 재패였다. 특별히 2년 뒤의 월드컵에는 아마추어와 프로가 총 출동하는 대회인 만큼 헝가리의 상대도 한층 업그레이드 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자는 상대방을 가리지 않는다. 어떤 팀을 만나도 승리할 자신이 있다는 것이 헝가리 팀의 1950년대 초반의 상황이었고, 2년 뒤의 월드컵을 기다리는 헝가리의 자신감이었다.

[올림픽 이야기 11] 국적없이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 축구
[1948년 올림픽] 한국 축구, 세계 무대에 등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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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적없이 참가한 올림픽 축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8년 영국의 런던에서 제14회 올림픽의 막이 올랐다(7월 29일 - 8월 14일). 전쟁의 기간 동안 축구는 더욱 대중적 스포츠로 발전하였으며, 1948년 올림픽 축구경기에 18개 나라가 도전장을 냈다. (룩셈부르크, 아프가니스탄, 아일랜드, 덴마크, 이집트,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인도, 유고슬라비아, 스웨덴, 오스트리아, 한국, 멕시코, 이탈리아, 미국, 터키, 중국)

이들 중에 한국은 아직 정식으로 정부가 수립되지 못한 상황으로 참가 자격이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되었기 때문에 제14회 올림픽 기간에는 국가의 존재가 인정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대한민국의 출전을 허락했다.

# 대회에 참가하기까지

한국에서 축구는 식민지 시절부터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일본이 물러난 뒤, 한국은 대표팀을 구성하여 제14회 런던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준비했다. 그런데 대표팀 구성에 있어서 마찰을 빚으며 감독이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표팀이 구성되었지만 2개월 정도를 허송세월로 보낸 것이다.

영국에 도착한 한국 선수단은 먼지가 가득 일어나는 흙으로 된 경기장에서 연습을 하였다. 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영국의 공군팀, 경찰팀과 연습경기를 치르면서 경기 감각을 익혔는데, 특별히 다른 참가국 중 아프리카의 이집트와 연습 경기에서는 6-0으로 승리하기도 했다.

한국팀으로서는 영국 경찰팀과의 연습경기에서 주전 골키퍼 차순종이 허리 부상으로 본선 무대에 참가할 수 없게 되자, 후보 선수였던 홍덕영으로 문전을 지키도록 하였다. 홍덕영으로서는 좋은 기회였지만, 동시에 세계의 강호들이 겨루는 올림픽에서 골문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도 갖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상황이 달라졌지만, 예전에는 선수들에게 골키퍼는 별로 선호의 대상이 못되었다. 축구를 웬만큼 잘하는 사람들은 공격수가 되었고, 골키퍼는 실력이 뛰어나지 못한 선수가 담당하는 자리로 여겨졌던 시대, 홍덕영 역시 자의반 타의반으로 골키퍼가 되었다. 축구 선수가 되기 위해서 면담을 하던 도중, 상대적으로 경쟁률이 적은 골키퍼를 선택한 것이 그의 축구 인생을 결정한 것이다.

# 첫 승의 감격과, 패배의 슬픔

한국은 8월 2일, 북중미의 멕시코와 역사적인 첫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경기장에 등장하면서 비단결 같은 잔디구장에 매료된 한국 선수들은 맨발로 잔디를 밟아보기도 하였는데, 먼지가 가득 일어나는 흙으로 된 운동장에서 연습을 해온 한국 선수들에게는 그야말로 비단 위를 걷는 듯 했다고 한다.

한국의 상대인 멕시코는 기술과 전술적인 면에서는 한국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러나 한국 선수들은 악착같이 달려들었고, 상대적으로 몸싸움을 싫어하는 멕시코 선수들의 플레이는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이 경기에서 한국은 공격수들이 다섯 골을 넣었고(최성곤, 정국진 2골, 배종호, 정남식), 주전 골키퍼의 부상으로 대신 골문을 지킨 홍덕영이 세 골만을 허용하면서 5-3으로 승리하고 8강이 겨루는 두 번째 라운드에 진출하였다.

한국의 8강 상대는 북유럽의 강호 스웨덴이었다. 스웨덴은 비록 12년 전에 아시아의 일본에게 2-3으로 패한 바 있지만, 실력과 체력면에서 한국을 압도하고 있었다. 한국 선수들은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비록 이기긴 했지만 체력 소모가 컸으며, 장비적인 면에서 다 낡고 헤진 축구화를 신고 비가 오는 가운데 경기를 치러야 했다.

방수도 되지 않은 축구화는 비를 맞아 무거워졌고 선수들은 빗속에 미끄러워서 제기량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결국 한국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0-12라는 엄청난 점수 차이로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같은 조건에서 싸웠더라도 기술이나 전술, 체력적인 면에서 한국을 압도한 스웨덴에게 최소한 다섯 점 이상은 내주었을 것이다.

한국의 골키퍼 홍덕영은 이날 열 두골을 스웨덴에게 허용했다.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는 국가대표의 불명예 기록을 갖고 있는 그는 패배의 일차적 원인으로 오늘날까지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스웨덴은 당시 결승에서 유고슬라비아를 꺾고 금메달을 획득할 정도로 강팀이었으며, 12골을 허용한 이 경기에서 스웨덴의 유효슈팅은 48개에 육박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홍덕영의 선전은 박수받을만한 일이었다.

# 열악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한국 축구

처음으로 세계 무대에 등장한 한국으로서는 멕시코를 격파하며 기분좋은 출발을 했지만 스웨덴에게 무참하게 깨지면서 높은 세계의 벽을 실감해야 했다. 그러나 빈약한 자료를 토대로 해방 전후의 한국 축구를 살펴보면, 꽤 유능한 선수들이 한국 축구를 이끌어 나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축구에서 세계 정상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인재도 필요하지만, 그 인재를 발굴하기 위한 시스템과 인재를 키울 수 있는 주변의 상황들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발도상국을 거쳐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기 전까지 한국 축구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하고, 어이없는 성적을 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축구에 대한 투자는 뒷전으로 하고 오로지 경기의 승패에만 집착하여 축구대표팀을 평가하고 도마 위에 올려놓고 사정없이 난도질을 가하기도 했다.

스포츠에서 처음부터 정상을 차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수많은 좌절과 피와 땀을 흘려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적인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상황에서 올림픽과 월드컵에 참가한 초창기 한국의 축구는 비록 초라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나름대로 소중한 기록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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