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김상진 열사 할복자결
“네 목소리는 바람이 되었다./ 어둠으로 덮인 온 나라의/ 강과 산과 마을을 누비며/ 짐승처럼 서럽게 울부짖고 있다./ 네가 흘린
피는 꽃이 되었다./ 말라죽은 나뭇가지 위에, 골목 진흙탕에/ 숨죽인 우리들의 팔뚝 위에/ 불뚝불뚝 일어나는 숨결이 되었다”(1975년
5월22일 서울대에서 거행된 김상진 열사 추도식에서 낭독된 조시의 일부)
1975년 4월11일 오전 11시 수원의 서울대 농대 대강당 앞 잔디밭에서는 농대생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국 성토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원래 이날 성토대회는 4일 데모 주동자로 경찰에 연행된 축산과 4학년 김명섭과 학생회장 황연수의 석방을 재차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한 75년 봄 전대학가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던 학생들의 민주화투쟁과 보조를 같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에 앞선 2월12일 박정희는 유신체제에 대한 국내외의 거센 비난을 잠재울 작정으로 자신에 대한 신임과 연계한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하였다.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을 비롯하여 민주회복국민회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등 모든 민주세력은 찬성의 자유는 있으나 반대의
자유는 없는 이런 기만적인 국민투표에 대하여 전면 거부 의사를 분명히하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투표를 강행하여 80% 투표에 73% 찬성이라는
결과를 얻고는 이것이 국민의 뜻이라고 하면서 민주세력에 대한 강경방침을 천명한다. 그러한 조치의 일환으로 정부가 2월15일 석방된 민청학련사건
관련 학생·교수에 대한 복교·복직을 전면 불허하면서 대학가는 또 다시 석방학생 복교문제를 놓고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처음 돌파구를 연 것은 연세대였다. 연세대 박대선 총장이 문교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석방학생 복교를 추진하자 문교부는 연세대에
계고장을 보내면서 총장, 재단 이사장 승인을 취소하겠다고 경고하였다. 3월14일 연세대생 4,000여명은 긴급 학생총회를 열고 문교부에 대하여
계고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어 서울대와 서강대, 성균관대 등에서도 석방학생 복교운동이 전개되었다. 학생들의 석방학생 복교운동이 점차
전대학가로 확산되고 대규모화하면서 학생들의 주장도 언론탄압 중지, 고문정치 원흉 처단, 유신철폐 등으로 고양되기 시작하였다. 3월31일 고려대생
1,500여명이 반독재구국선언을 발표하고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하였으며, 4월3일에는 연세대와 서울대, 서강대, 한신대도 대규모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날 연세대는 휴강에 들어갔으나 학생 3,000여명은 4일에도 등교하여 이화여대 교정 등에서 경찰과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연일 데모가
계속되면서 서울대도 4월7일 휴강에 들어갔다. 한편 고려대에서는 4월7일과 8일 이틀에 걸쳐 독재정권 퇴진,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며 가두진출을
시도하는 격렬한 데모가 계속되었다.
이에 박정희는 4월8일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여 고려대에 휴교령을 내리는 한편 군인을 진주시켰다. 또 고려대 내 모든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고 이 조치를 위반할 경우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위협하였다.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될 때 발동해야 할 긴급조치가 일개 대학의 학생데모 때문에 선포된 것이다. 또
4월9일에는 바로 전날인 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인혁당 관계자 8명에 대한 사형이 전격적으로 집행되었다.
이날 서울대 농대의 시국성토대회는 이러한 사회상황의 영향을 받아 자못 심각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11시20분쯤 김상진이 세 번째 연사로 등장하였다. 신사복 바지에 흰 셔츠를 입고 있던 그는 죽음을 앞둔 사람으로서는 너무 침착한 자세로,
그러나 정열적인 어조로 학내문제를 설명한 뒤 죽음을 택하게 된 ‘양심선언문’을 읽어 나갔다.
“더 이상 우리는 어떻게 참을 수 있으며, 더 이상 우리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어두움이 짙게 덮인 저 사회의
음울한 공기를 헤치고 죽음의 전령사가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하고 있다.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고 한다. 들으라! 동지여! 우리의 숭고한 피를 흩뿌려 이 땅에 영원한 민주주의의 푸른 잎사귀가
번성하도록 할 용기를 그대들은 주저하고 있는가! 들으라!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비민주적 허위성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우리의 사랑스런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저 지하에선 내 영혼에 눈이 뜨여 만족스런 웃음 속에 여러분의 진격을 지켜보리라. 그
위대한 승리가 도래하는 날! 나, 소리 없는 뜨거운 갈채를 만천하에 울리게 보낼 것이다”
그는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라는 대목을 읽으며 20㎝ 길이의 과도를 서서히 품 안에서 꺼냈다. 곁에 있던
동료 학생 두 명이 얼른 팔을 잡았으나, 그는 오른손에 쥔 칼로 왼쪽 하복부를 찌른 후 온 힘을 다해 위로 그어 올렸다. 이 때가 오전
11시30분쯤이었다. 동료들이 부축하자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한 후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동료들이 부르는 애국가를 뒤로한 채 그는
수원도립병원으로 실려갔고 12일 아침 8시55분쯤 서울대 의대 병원으로 향하는 앰뷸런스의 덜컹거리는 침대 위에서 마침내 영면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만 25세였으며,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지 4년5개월 만의 일이었다.
김상진은 1949년 11월16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혜화초등학교와 보성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8년 서울대 농대 축산과에 입학한
그는 당시 이념서클로 불리던 한얼에서 활동하며 정치·철학·역사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양의 책을 읽고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과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73년 군대에서 제대한 후 74년 2학기에 복학한 그는 복학생으로서 후배들에게는 부드럽고 포용력 큰 선배였다.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
애먹이는 일도 없고, 공부도 잘했으며, 마음이 착했던” 김상진은 그 “경치 좋은 수원 농대에 어머니와 함께 바람 한 번 쐬지도 못한 채”,
어머니에게 임종조차 보지 못하게 한 한을 남기고 이 나라 민주주의의 제단에 자신의 몸을 바쳤다. 김상진의 유해는 12일 저녁 8시쯤 사망한 지
채 12시간도 안되어 박정희 정권에 의해 벽제 화장터에서 서둘러 화장되었다. 물론 장례식도 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김상진 장례식을 금지하였지만 살아남은 동료 학생들은 그를 장례식조차 없이 보낼 수는 없었다. 서울대 문리대
민속가면극연구회의 장만철(장선우)과 김도연, 사범대 야학문제연구회의 박연호와 천희상 등은 김상진 장례식을 갖기로 합의하고 계획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5월13일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어,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반대행위와 학내 집회·시위가 전면 금지되었다. 이 조치를 위반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게 되어 있었다. 주모자들 사이에서 계획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졌으나 강행하기로 결정되었다. 민주주의를 위하여 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친 그를 생각할 때 긴급조치가 무서워 도망갈 수는 없었다. 드디어 5월22일 오후 1시쯤 꽹과리 소리를 신호로 플래카드가 걸리고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교직원과 기관원들의 제지로 난투극이 벌어지는 가운데 김도연이 ‘장례 선언문’을, 김정환이 ‘조시’를, 천희상이 ‘조사’를,
박연호가 ‘반독재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어 약 500명의 학생이 스크럼을 짜고 교문 밖으로 진출하려 하였으나 경찰에 의해 곧 해산되었다.
경찰은 강의실 안까지 난입하여 학생들을 연행해 갔다.
세칭 ‘오둘둘’로 알려진 이날 시위로 학생 56명이 구속되었으며 그 중 24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서울대 총장 한심석이
사임하였고, 시위를 제때에 진압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서울 남부경찰서장과 치안본부장이 경질되었다. 첫 번째 긴급조치 9호 위반사건으로 기록된
이날 시위로 서슬이 시퍼렇던 긴급조치 9호는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김상진 열사의 영령이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는 한 박정희의 어떤 공갈 협박도
민주주의를 향한 학생들의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2001년 5월21일 김상진이 의거한 장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념표석이 설치되었다.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
“그는 늘 깨어있던 사람”
“상진이 선택한 방법이 반드시 옳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상진의 죽음 이후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고 정권의 경직성이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결국 상진의 죽음은 박정희 체제가 무너지는 시발이지 않았나 합니다”
1968년 김상진과 함께 보성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축산학과에 입학한 동기로서 김상진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한 안종건(방송대 교수)은
김상진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하였다. 대학에 들어와 김상진과 친해진 안종건은 김상진이 자결하던 당시 대학원에 재학중이어서 현장을 목격하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죽음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가 밤새 병상을 지켰다.
안종건이 기억하는 김상진의 외모나 성격은 평범하디 평범하였다. 당시 졸업을 앞두고 있던 김상진은 큰 목장에 취업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고 대학원 진로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애인도 있었다.
그렇다고 생활방식이 틀에 박힌 ‘모범생’은 아니었다. 김상진은 바둑을 두느라 며칠 밤을 세워 강의를 빼먹기도 했다. 늦잠을 자다가
세수를 하지 않고 강의실에 나타날 정도로 털털한 성격이었다.
김상진은 이념서클에 가입해 많은 독서와 토론을 거치면서 사회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불만을 키워나갔지만 자신의 주장을 그리 강하게
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도를 더해가는 정권의 폭압은 점점 그로 하여금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들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안종건은
말한다. 안종건은 소위 ‘보혁 대결’이 치열한 요즘 김상진이 많이 생각난다고 말한다. 안종건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김상진은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열려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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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이영진(시인)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장종택(출판인)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종합기획부장) 김재중(경향신문 기자)
=-=-=-=-=-=-=
[출처 : 경향신문, 2003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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