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방직 노조 사수투쟁
한국 경제는 197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연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지속했다. 하지만 그런 외형적 성장 아래 노동자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혹사당했다. 10만원 미만의 절대적 저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60%를 상회했고, 주당 노동시간은 50시간을 넘어 세계
1위였다. 필연적으로 저항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법적·제도적 장치의 개선이 시급했다. 하지만 군사독재 정권은 형식적인 법 조문으로나마
존재하던 기존 노동3권마저 봉쇄했다. 71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으로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제한한 데 이어 73년과 74년 두 차례
노동법을 개악하여 단결권마저 제한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유일한 전국 조직인 한국노총은 이에 맞서기는커녕 유신체제를 환영하는 성명서를 내는 등
정권의 앞잡이로 전락했다.
이런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노동자들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싹을 틔워
동일방직·반도상사·원풍모방·YH무역·콘트롤데이타·한일공업·청계피복 등의 노동자들이 조직적인 투쟁을 감행했다. 특히 섬유와 전자산업을 중심으로 한
여성 노동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이른바 ‘나체 시위’와 ‘똥물 투척’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동일방직 노조 사수투쟁은 이러한 70년대
노동운동의 특징과 면모를 집약하고 있는 대표적인 투쟁이었다.
인천시 만석동에 소재한 면방업체 동일방직의 노동조합이 특별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72년 한국 최초로 여성 지부장을
탄생시키면서부터였다. 여성이 노조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회사의 지원을 받는 남성 기능공들이 집행부를 장악하고 있던 섬유노조의 현실에
비추어 이는 뜻깊은 사건이었다. 이때를 전환점으로 하여 동일방직 노조는 노조원에 대한 교육선전 활동을 크게 강화하면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으로 변화해 갔다.
노조 간부나 열성 노조원에 대해 욕설, 협박, 부당 해고, 사표 강요, 부서 이동 등 부당노동행위를 일삼던 회사는 76년 2월의
대의원 선거를 앞두고 노골적으로 노조 파괴 공작에 들어갔다. 파괴 공작의 핵심은 임금이나 노동조건이 여성에 비해 훨씬 나았던 기능공 남성들을
앞세워 노조를 분열시키고 집행부를 갈아치우는 것이었다. 남자 대의원들은 임금협상안과 단체협약안을 다루는 정기 대의원대회를 몇달간이나 무산시키면서
갖은 억지주장으로 집행부 불신임을 시도했다.
76년 7월23일, 고두영을 비롯한 남자 대의원들은 기숙사 강당문을 걸어잠그고 자파 대의원만으로 대의원대회를 열었다. 노조원들에게
단결을 호소하는 유인물을 돌렸다는 이유로 지부장 이영숙이 경찰에 연행된 가운데 집행부 불신임안이 통과되었고, 고두영이 신임 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노조원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회사측이 기숙사 출입문에 아예 못질을 해 두었지만, 소식을 듣고 격분한 200여명의 노조원들은 문을
부수거나 창문에서 뛰어내려 농성에 돌입했다. 대회가 끝난 뒤 이영숙을 일시 석방했던 경찰은 오후 들어 다시 지부장과 총무부장을 연행해 갔다.
3교대 중 밤 10시 출·퇴근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노조사무실 앞 마당에서 자발적으로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이튿날엔 농성자수가 800명으로
불어났고 회사 밖에도 300여명의 노조원이 모여들어 호응했다. 사실상 거의 모든 노조원이 농성에 참가한 셈이었다.
때는 7월, 뜨거운 땡볕이었다. 회사는 노조사무실과 기숙사의 수도·전기를 끊었고, 화장실도 잠가 버렸다.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실
수 없는 상태에서 농성 노조원들은 땀과 눈물에 젖어 외쳤다. “지부장을 석방하라!” “회사는 노조 활동에 개입하지 말라!” “7·23 대회는
무효다!”
농성 사흘째인 7월25일 오후 5시쯤, 경찰 수백명이 들이닥쳤다. 완전무장한 전투경찰을 보고 노조원들은 손을 놓치면 죽음이라는 듯
한 덩어리로 엉키고 뭉쳤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옷을 벗자. 벗고 있는 여자 몸엔 그 누구도 손을 못 댄대!” 그 말이 순식간에
번져나가면서 노조원들은 너도 나도 작업복을 벗어들었다. 벗은 작업복을 흔들며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총가를 불렀다. 노래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절규였다. 머리 위로는 방망이가 내려쳐지고, 진압 과정에서 속옷까지 찢겨져 버린 노동자들은 머리채를 휘어잡힌 채 끌려갔다. 격앙된 일부
노조원들은 알몸으로 경찰차 앞에 드러누웠으며, 달리는 차에 매달리기도 했다. 이때의 충격으로 노조원 2명이 정신분열증세를 보여 한달간 입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한 여성 노동자는 그날을 이렇게 증언한다.
“내가 옷을 벗다니! 그것도 많은 남자들 앞에서!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끔찍하면서도 놀라울 뿐이다.
부끄러운 걸 따지자면 벗은 우리보다도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른 그놈들의 몫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부끄러움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몫이다”(조직부장 김순분의 글 가운데서)
파업 농성 이후 회사는 130명의 노조원들을 강제 퇴사시켰고, 작업 현장에서는 노조원에 대한 욕설과 조롱, 모욕, 협박이 일상사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노조 집행부는 ‘동일방직 사건 수습 투쟁위원회’를 꾸려 각계에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여성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투쟁에 대한 동정 여론이 높아지자 사건의 여파를 두려워한 노동청이 중재에 나섰고, 노조는 이듬해인 77년 4월4일 수습 대의원대회를
통해 총무 이총각을 지부장으로 하는 새로운 집행부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승리는 오래 가지 못했다. 새 집행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노조원을 강제 탈퇴시키는 등의 탄압을 일삼던 회사는 78년 2월
대의원 선거를 앞두고 더욱 악랄한 노조 파괴 공작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섬유노조 본조까지 내놓고 가세했다. 본조는 대의원 선거 일정이 확정되자
회사와 손잡고 도시산업선교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본조는 회사 인근에 여관방을 빌려 놓고 각종 명목으로 노조원들을 불러들여
“집행부가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지시로 움직이는 도시산업선교회의 조종을 받고 있다”고 선동했다.
선거일이 가까워오면서 노동조합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투표일 하루 전에는 남자 노조원들이 폭력배와 함께 노조사무실로
난입하여 투표함을 부수고 지부장에게 폭력을 휘두르기까지 했다. 선거 당일인 78년 2월21일 새벽 6시. 작업을 마친 야근조 노조원들이 투표를
위해 줄지어 나오는 순간, 회사측이 내세운 지부장 후보와 남자 노조원 대여섯명이 똥이 가득 담긴 방화수통을 들고 이들을 덮쳤다. 그들은 경찰과
본조의 간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노조원들의 몸에 닥치는 대로 똥을 바르고 뿌렸다. 달아나는 노조원들을 붙잡아 젖가슴 속으로
똥을 집어넣기도 했고, 통째로 뒤집어씌우기도 했다. 탈의실과 기숙사에까지 똥물을 뿌리고 나중에는 지부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들을 끌어내고
노조사무실을 점거했다.
노조원들이 노조사무실을 되찾고자 밀고 들어갔으나 점거자들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50여명이 부상했다. 회사나 본조 차원을 넘어서
치밀하게 계획된 야만적인 폭력이었다.
사건 직후 본조는 지부장 이총각을 비롯한 네 명의 노조 간부들을 ‘반노동자적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제명했고, 회사는 4월1일자로
노조원 124명을 해고했다. 그러자 섬유노련 위원장 김영태는 저 악명 높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배포했다. 해고자들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지를 적은 명단을 전국의 사업장에 돌려 재취업의 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124명의 해고자들이 이후 벌인 투쟁은 끈질김과 강인함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그들은 TV로 생중계되는 노동절 행사장에
들어가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는 플래카드를 펼치는가 하면, 명동성당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을 벌이기도 했으며, 50만명이 운집한 여의도
부활절 연합예배 단상에 올라가 “노동3권 보장하라!” “동일방직 사건을 해결하라!”고 절규했다. 새벽 일찍 공장의 담을 넘어 현장으로 들어가
점거 농성을 하기도 했으며, 섬유노련 위원장 김영태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멀리 부산까지 내려가 유인물을 뿌리기도
했다.
밟히고, 차이고, 갇히고, 모욕당하며 그들은 무엇을 배웠을까. “저희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헌법에 보장된 대로 조합활동을 했는데
개처럼 두들겨맞고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맙시다. 이러한 부조리와 비인간적인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더욱 강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불행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인간을 위한 투쟁의 용기와 희생정신의 숭고함을 배우며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노예처럼 따라하는 바보들이
아니라 자기 주장과 고통을 말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점을 알려주어야 합니다”(동일방직 사건 1주년에 즈음한 선언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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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방직 53명 민주화운동 인정
1978년 노조탄압 중지를 요구하다가 해고당한 124명의 동일방직 노동자 가운데 53명은 2001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라는 인정을 받음으로써 명예를 회복했다. 2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20대 처녀들은 이제 40~50대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이미 세상을 뜬 사람도 여럿이다.
그러나 이들의 복직 요구는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해고는 적법했다. 법대로 하라”는 회사측의 입장은 한치의 물러섬도 없기
때문이다.
해고의 공식 사유는 무단결근. 당시 회사는 외부에서 농성을 계속하는 노조원들에게 ‘3일 이내에 복귀하지 않으면 해고하겠다’고 통고한
뒤 해고를 단행했다. 해고당한 이들은 “결근의 원인을 당신들이 제공하지 않았느냐. 오죽하면 결근을 했겠느냐”고 항의하지만 회사는 묵묵부답이다.
현재의 노동조합 역시 이들의 목소리에 크게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민주노조를 만들고 이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대가는 크고 오래 갔다. 회사에서 쫓겨났고 빨갱이, 과격분자로 낙인찍혀 당국의 끊임없는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당시 21살의 평노조원이었던 정강자씨는 “만석동 판자촌/ 수제비로 끼니를 때우고/ 방직공장에서 데모하다 해고당한 딸을/
시커먼 경찰들이 감시하고/ 어느 날엔가/ 쇠고랑 차고 엄마를 대하던 딸 앞에서/ 통곡하던 엄마”라고 노래했다.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했지만
재취업을 봉쇄한 블랙리스트 탓에 가명으로 취업했다가 사문서 위조 혐의로 처벌받은 사례도 많았다.
하지만 엄혹하던 시절 자신들이 펼친 활동에 대한 자부심만은 여전하다. 당시 노조 지부장이던 이총각씨는 “섬유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 동일방직 노조는 가부장적 분위기 때문에 숨죽이고 있던 많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줬고 미조직 사업장에 노조가 조직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에게서 희망을 발견한 사람들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물러설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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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장종택(출판인)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종합기획부장) 김재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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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3년 9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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