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년 겨울, 교도소
검찰 발표에 의하면 1986년 12월16일 당시 정치적 이유로 구속돼 있는 양심수는 3,400여명. 이중 2,900여명이
학생이었다. 전국 구치소와 교도소는 이들을 관리하는데 수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수감자들은 접견, 서신, 도서열독 등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데
항의해 옥중 투쟁을 벌이기 일쑤였다. 그러면 교도소측은 집단폭행, 금치(행형법규를 어긴 수형자에게 운동, 접견 등을 일절 금하고 0.7평 독방에
수용하는 징벌) 등으로 대응했고, 이 바람에 전국 감옥은 바람잘 날이 없었다.
민가협은 감옥에서 부당한 금치가 빈발하자 대책 세우기에 골몰했다. 금치기간 중이라도 변호사 출신 국회의원의 접견은 가능했기에, 이들을 앞세워 금치의 경위를 알아내고 당사자들과의 소통을 시도했다. 민가협 간부들은 학부모들에게 떼밀려 한 밤중도 마다하지 않고 상도동(김영삼의 집)과 동교동(김대중의 집)으로 쳐들어가기 다반사였다. 두 사람 모두 반독재운동 최전방에 선 구속자 가족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건국대 사건 이후 투옥 학생 수가 급증하다 보니 하루가 멀다 하고 감옥으로부터 비명이 새어나왔다. 1986년 11월 말 어느 날,
여성들이 대거 수용된 의정부교도소. 고려대 곽윤이를 비롯한 10여명의 여학생들이 집단폭행을 당해 부상을 입었는데, 교도소측이 이를 은폐하려고
면회를 금지시키고 있다는 가족들의 다급한 전갈이 왔다. 민가협은 우선 가족들과 함께 의정부교도소 앞으로 갔다. 정문은 이미 봉쇄된 이후였다. 밤
늦게 변호사 출신 의원들이 교도소에 도착하기까지 정문 앞은 농성장으로 바뀌었다. 날선 찬바람에 얼굴은 시퍼렇게 얼어붙었다. 추위에 오그라든
손가락을 펴가며 마른 빵과 찬 우유로 겨우 허기를 때웠다.
자정이 넘어 금치 상태의 여학생들을 잠시 접견하고 나온 의원들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치약을 뭉텅 짜서 수의(囚衣) 등판에 ‘전두환
타도’라고 쓰고 운동시간에 나오는가 하면, 러닝셔츠를 찢어 이은 천에다 고추장으로 ‘고문정권 자폭하라’라고 써 창틀 앞에 내거니 어찌 금치가
부당하느냐고 오히려 교도소측이 항의하더라는 거였다. 소등시간이면 일제히 샤우팅(구호 외치기)을 하거나 ‘님을 위한 행진곡’ 등 노래를 부르는
일도 잦았다.
“의원님들도 그래. 우리 애들같이 이판사판 똑소리나게 전두환 하고 싸워 보소. 흰죽맹키로 희미하게 있지 말고.”
차에 오르는 의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는커녕 도대체 누구 편이냐고 일침을 가하는 부모들로 인해 날이 갈수록 의원들의 도움을 받기도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다. 자구책으로 온갖 기발한 방법들이 등장했다. 민추위 사건으로 홍성교도소에 수감 중인 서울대 문용식의 어머니는 마늘을 찧을
때 쓰는, 작고 단단한 봉을 품에 숨겨넣고 교도소 면회실로 접근, 유리창틀을 통통 두드리고 다녔다. 금치당한 아들 얼굴을 볼 때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서울 현저동 서울구치소는 매일 매일 전쟁과 다름없었다. 미국 상공회의소 점거사건의 서울대 김한정의 어머니는 제목에 ‘민주’라는 말만
있으면 도서 차입을 거절하는 교도소측을 향해 마산 사투리로 천장이 날아가게끔 떠들었다.
“와? 느그는 그라마 민주보다 독재가 존나?”
그러다가 멱살드잡이로 발전하기도 했으며 욕설과 고성이 거침없이 오갔다. 교도소에서도 결코 잠들지 않는 구속자들의 투쟁은 가족들을
한없이 괴롭혔다. 그러는 사이 감옥 담장을 사이에 두고 수감자들과 민가협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유대의식이 쌓여갔다.
이교도소 안팎의 투쟁이 절정을 이룬 것은 건국대 사건 이후, 모종의 비상조치설이 나돌던 86년 12월 즈음이었다. 수도권 교도소는
그래도 찾아가기가 수월한 편이었지만, 진주·부산·광주·경주·순천쯤 되면 가족들의 고생은 극에 달했다.
강릉의 경우를 돌아보자. 서울에서 가자면 4시간 이상 달려야 하는 먼 길. 그곳에는 민청련 의장 김근태, 민정당사 기습 점거를
주도한 서울대 이기정 등 10여명이 수감돼 있었다. 이기정 등은 징벌방에 갇힌 상태였다. 그의 어머니 이중주는 작고 토실한 체구의 대전 사람.
아들이 구속될 당시만 하더라도 철없는 아들을 용서해달라고 손이야 발이야 빌고 다녔던 그녀였지만 몇 달만에 맹렬 투사로 변모해 있었다. 다른
어머니들 같이 법정은 그녀에게도 살아있는 민주주의 학교였던 것이다.
김근태의 아내 인재근 등 민가협 회원들은 굳게 닫힌 교도소 정문 앞에 섰다. 철문을 돌멩이로 두들기자 교도소측은 몸으로 그들을
밀어낸 후 차량차단기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경비교도대를 증원했다. 끝내 열리지 않는 철문 앞에서 수감자들의 이름만 목메어 외치다가 어두워진 후
인근 여관에서 일행은 눈을 붙였다. 오라에 꽁꽁 묶인 채 개처럼 밥을 먹어야 한다는 징벌방의 아들 생각에 이중주는 새벽에 혼자 몰래 몸을 빼
교도소로 향했다. 그리고는 정문 옆의 미루나무 나목(裸木)에 올라탔다.
“기정아, 엄마가 왔다. 힘내라, 기정아!”
짜랑짜랑 그녀의 음성은 새벽의 적막을 찢어놓았다. 동해 바다에서 달려온 바람은 칼끝처럼 살을 파고 들었다. 해가 뜨면서 그녀를
찾아나선 일행은 그 자리에서 전날과 똑같은 하루를 열어야 했다.
집안 일이 바빠서, 혹은 메아리 없는 외침에 지쳐서 어머니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떴다. 하지만 이중주는 결코 돌아갈 수 없었다.
일행들이 떠난 터미널 대합실에서 잠시 한기를 다스린 그녀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상대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강릉교도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김근태와 이기정이 무슨 일로 징역을 사는지, 건국대 사건의 진상은 무엇인지 열변을 토했다. 허름한 아주머니의 그런 모습을 쳐다보더니
사람들이 마구 박수를 쳐주는 게 아닌가.
용기 백배한 그녀는 걸음을 되돌려 교도소로 다시 갔다. 철문을 두드리면서 지하 징벌방의 금치를 풀라고 소리치기를 두어시간, 보다
못한 경비교도대 한명이 문을 열고 나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는 말했다.
“어머니, 고생 그만하시고 돌아가서 좀 쉬세요. 금치 풀리면 제가 연락해 드릴게요. 이러시면 몸 상합니다. 학생들 잘못 아닙니다.
저는 이 옷 때문에 여기 있는 겁니다.”
선량한 눈망울에 눈물이 글썽이는 걸 보고 이중주는 청년을 끌어안고 한참이나 울었다. 어두워진 후, 여관에서 몸을 잠시 뉘었다가
새벽에 다시 교도소 뒷산으로 갔다. 그녀는 담장 가까이 있는 나무를 타고 가뿐히 담을 넘었다. 망루에서 탐조등이 비치고 있었다. 재빠르게 마당을
가로질러 감방인 듯한 건물 옆으로 접근해 키가 무척 높은 느티나무를 탔다. 어려서 나무를 곧잘 타던 솜씨로 맨 꼭대기에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등걸을 잘라놓은 평평한 면에 날렵한 소년처럼 걸터앉았다.
“이기정, 김근태. 엄마가 왔다. 힘내라.”
어둠을 베는 여자의 고함은 잠든 교도소를 깨웠다. 교도관들이 우왕좌왕 혼비백산으로 여기 저기를 쳐다보았다.
“군사독재 몰아내자.” “살인적 징벌방 폐쇄하라.”
아들의 귀에까지 엄마의 목소리가 닿기를 바라며 그녀는 혼신으로 소리쳤다. 이윽고 소리가 나는 곳을 알아낸 교도관들이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오려고 하자, 그녀는 사다리를 밀쳐버렸다. 아들 면회를 할 수 없다면 투신하겠다는 그녀 때문에 교도관들은 담요를 나무 아래에 깔았다. 그녀의
고함이 계속되자 경비교도가 사다리로 올라왔다. 그녀는 눈을 지끈 감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다행히 담요가 그녀를 받아서 다치지는 않았다. 그녀는
사지를 붙들린 채 교도소 밖의 뚝방 아래쪽으로 끌려나왔다.
정신이 가물거리는 그녀에게 협박과 회유를 반복하던 경찰이 터미널로 데려다 줄테니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고 애원했다. 그녀는 너무나
지친 나머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터미널에 도착해 보니 대전행은 오후 4시에 있었다. 짐짝처럼 쓰러져 눈을 붙인 그녀에게 구세주처럼 인재근
등 일행이 나타났다. 그들은 다시 강릉으로 오는 길이었다. 인재근은 이중주를 부여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이중주는 완전히 넋나간 거지 행색이었다.
그간의 경위를 서로 확인한 후에 교도소로 향했다.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두꺼운 방한모와 파카를 입은 채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강릉과 유사한 풍경은 그 겨울 내내 지속됐다.
바람을 끼니 삼고 한뎃잠을 자는 가족들의 고행은 군사독재가 언젠가는 끝나리라는 막연한 희망에 의지한 채 끝없이 이어졌다. 60년대
문단을 뒤흔든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처럼 ‘정의사회 구현’을 이마에 써붙인 지극히 불의한 사회의 감옥 안팎에서 벌어진 고통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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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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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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