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월 노동자 대투쟁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29선언이 발표되면서 6월항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대통령 직선제는 그간 군부독재에 의해 유린당해온,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소생시켰다는 점에서 의심할 바 없이 위대한 승리였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구석구석에, ‘절차’로서뿐만 아니라 ‘정의와 평등을 지향하는 정신’으로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더 길고, 더 끈질기고, 더 성숙한 투쟁의 여정이 남아있음을 알려주는 태풍이 곧 몰아닥쳤다.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명명된 그 태풍의 눈은 울산지역의 현대그룹 노동자들이었다. 울산은 7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성장한 중화학공업을 대표하는 지역으로 조선·자동차·기계·화학 등 남성 노동자 중심의 대규모 사업장, 특히 현대중공업·현대자동차를 비롯해 현대그룹의 주력 기업이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강도 높은 노동과 열악한 작업조건, 자칫 죽음으로 이어지는 심각한 산업재해 속에서도 울산에선 대중적인 노동쟁의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노조를 금기시하는 현대그룹의 방침과 머리 모양까지 규제하는, 군대를 방불케 하는 가부장적인 노동통제 때문이었다.


그런데 87년 7월5일 대투쟁의 서막이 열렸다. 현대엔진에서 현대 계열사 최초로 노조가 결성된 것이다. 소모임 활동을 통해 노조를 준비해왔던 권용목 등은 6월항쟁으로 조성된 민주화 국면을 놓치지 않았고, 현대엔진 노동자들은 노조 결성 6일 만에 생산직 거의 전원이 가입원서를 제출하며 열렬히 호응했다.


현대엔진에서 시작된 불길은 삽시간에 울산의 현대 계열사 전체로 번져나갔다. 7월15일 미포조선, 7월27일 현대중전기, 8월1일 현대정공에서 노조가 결성됐다. 민주노조 결성을 봉쇄하기 위해 회사쪽에서 어용노조를 급조했던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에서는 노동자들이 농성과 조합원 총회를 통해 집행부를 갈아치웠다. 금강개발과 한국프랜지를 마지막으로 울산지역 현대 계열사 전체에 노조가 들어서자 11개 노조는 곧바로 ‘현대그룹노조협의회’를 결성했다. ‘왕회장’(고 정주영 회장)이 전권을 행사하고, 각사의 경영실적과 상관없이 그룹 차원에서 임금인상이 이루어지며, 종합기획실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현대그룹의 중앙집권적 지배질서에 맞서기 위한 노동자들의 자구적 연대조직이었다.


당황한 현대그룹은 8월16일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6개사에 휴업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태풍의 반경을 더욱 넓히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현대그룹노조협의회는 연합시위를 선언했고, 17일 현대중공업 앞에 3만여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가두로 진출한 데 이어 18일에는 6만여명의 노동자들이 운집해 공설운동장으로 행진했다. 덤프트럭, 지게차, 샌딩머신 등의 중장비를 앞세운 노동자들의 시위 대열은 무려 4㎞에 이르러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도 대열에 합류했다.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했지만, 울산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한 경계를 넘고 있었다.


울산에서 시작된 태풍은 곧 전국을 휩쓸었다. 마산과 창원, 거제를 거쳐 수도권, 대구·경북, 광주·전남, 강원으로, 대공장에서 중소공장으로, 금속에서 화학·신발·광산·섬유·버스·택시·호텔·병원·백화점으로, 전지역과 전산업에 걸쳐 자연발생적인 파업과 농성, 시위가 일어났다. 87년 7~9월 석달 동안 발생한 쟁의 건수는 3,311건으로 하루 평균 40건에 이르렀다. 특히 8월에는 하루 평균 83건의 쟁의가 일어났다. 또한 쟁의에 참여한 노동자는 1백22만명으로 당시 상용 근로자 10인 이상 사업체 노동자 3백33만명의 37%에 이르렀다. 석달 동안 벌어진 파업 건수는 지난 10년간 파업 건수의 2배였고, 참가자 수는 지난 10년간 참가자 수의 5배였다.


실로 한국에서 근대적인 임금노동자가 형성된 이후 발생한 최대 규모의 집단적인 저항운동이요, 10년을 하루에 뛰어넘은 노동운동의 거대한 비약이었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주로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에 집중돼 있었으나 80년 서울의 봄 때와는 구별되는 뚜렷한 차이점이 있었다. 노동자들은 정부의 비호 아래 공공연하게 자행돼온 부당노동행위를 규탄하고, 인격적인 대우와 작업장 민주화를 요구했다. 이제 그들은 비참한 노동현실을 폭로하면서 사회의 동정과 여론에 호소했던 70년대 노동자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기를 ‘노동운동의 거대한 전진’으로 평가할 수 있는 특징은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이 자연발생적인 투쟁을 어용노조 민주화와 노조 결성으로 연결시켰다는 점에 있었다. 쟁의에 참가한 사업장의 55%에서 노조가 결성돼 87년 6월 말 현재 2,742개였던 노동조합이 87년 말 4,104개로 증가했다. 또한 87년 6월 말 현재 약 1백5만명이었던 조직노동자가 87년 말에는 1백27만명으로 6개월 사이에 무려 20만명이 늘어나는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하지만 온 나라를 뒤흔든 노동자들의 투쟁은 9월 들어 급격히 수그러졌다. 반격은 언론으로부터 시작됐다. 5공을 찬양하던 펜으로 다시 6월항쟁을 찬양하는 기회주의적 행태를 보이던 보수언론들은 노동자 대투쟁의 실상과 본질을 왜곡해 노동자들을 여론으로부터 고립시키려 했다. ‘무법·광란, 울산시청 수라장…술 마시고 부수고 노래하고’ ‘현대중공업 3백여명 차고 방화 등 난동 1시간’ ‘사장 등 맨바닥에 앉히고 폭언’ 등등.


노동자 대투쟁은 구조적으로는 개발독재 아래서 30년 가까이 기본권을 박탈당하고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온 필연적 결과였고, 가까이는 ‘3저 호황’에도 불구하고 그 과실이 전혀 분배되지 않은 데 대한 항거였다. 그러나 언론은 이러한 본질은 외면하고 자연발생적인 투쟁에 따르게 마련인 몇몇 사례들을 침소봉대해 노동자들을 ‘폭력·용공세력’, 심지어 ‘반인륜적’ 폭력배들로 몰아붙였다. 6·29선언으로 시간을 번 집권세력도 언론과 손발을 맞춰 공세로 전환했다. 9월 초에 열린 임시국무회의는 전경련 전무 조규하를 참석시켜 쟁의현황에 대한 보고를 들었는데, 그는 “기아기공 근로자들이 부사장을 포클레인 삽에 싣고 올렸다내렸다 하면서 위협하고, 노래값을 요구했다” “영창악기에서는 사장을 드럼통에 넣고 굴렸다”는 등의 보고를 했다. 기아기공은 회사측이 사실이 아님을 밝혔고, 영창악기 작업장에는 애시당초 사람을 넣을 수 있는 드럼통이 존재하지도 않았으나, 방송과 신문은 기본적인 사실 확인조차 없이 이러한 ‘반인륜적 행위’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정부와 언론은 노동자들을 무분별한 폭력세력으로 매도하는 동시에 민주화운동 진영과 시민사회를 분열시키려 했다. 8월22일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경찰의 직격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재야인사들이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장례절차를 지원하자 정부와 언론은 유가족을 자처한 현역 소령(실제로는 이석규와 8촌도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을 앞세워 일제히 “장례식도 가족 마음대로 못하게 하고 죽음을 이용하려 한다”며 악의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은 직선제를 쟁취한 것에 만족하는 중산층을 이반시키는 데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운동의 조직적 토대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기득권층의 이념 공세 및 반격, 직선제를 환호하면서도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선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던 여론의 흐름 등은 한국 민주주의의 척박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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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5년 0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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