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애국가의 왜곡된 상징성

 

1882년 조미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국기를 제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조정 역할을 맡은 청나라의 마건충은 중국 용기(龍旗)를 모방해 삼각형 청색 바탕에 용을 그리라는 따위의 조언을 했다. 그러면서 황색은 황제의 상징색이므로 속국에서는 이 색을 써서는 안된다고 제언했다.

 

고종은 분개했다. 결국 고종의 지시에 따라 사각형 옥색 바탕에 태극을 적색과 청색으로, 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표시하는 괘를 붙이게 했다. 그리하여 태극은, 적색의 머리 부분과 청색의 꼬리 부분은 위로 가게 했으며 4괘는 위에 왼쪽부터 손(巽)과 진(震)을, 아래에 왼쪽부터 이(離)와 간(艮)을 배치했다. 최초로 만든 국기였다.

 

마침내 박영효가 조미조약체결의 대표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갈 때 영국 선장의 의견을 참작해 태극과 8괘를 배치하되 태극에는 음양을 나타내는 붉은 색과 푸른 색을 사용하는 기를 만들었다.

 

 

 

 

 

 

조정은 박영효의 보고를 수용하여 1883년 1월27일 전국에 공포했다. 이때부터 공공건물에 국기를 내걸었고, 이를 태극기라고 불렀다. 이 대목에서 한번 따져보자. 자주국가를 표방하면서 왜 하필 중국의 고전인 주역의 원리를 국가의 상징인 국기에 올렸나.

 

비록 주역이 동양의 보편적 사상이라 할지라도 국가의 상징물로 삼은 것은 가치의 혼돈을 가져올 수 있다. 더욱이 터무니없게도 조선이 중국의 속국임을 주장한 마건충의 제의를 일부 수용한 것도 흠이다. 물론 태극과 8괘는 우리의 전통문양으로 널리 쓰여져 왔다. 또 주역사상은 우리의 생활과 의식 속에 깊이 침투해 있었다. 하지만 그 원리를 중국 고전인 주역에서 빌려왔다면 우리의 자주의식에 생채기를 낼 수 있는 구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역의 원리에도 크게 어긋난다. 우주와 음양을 상징하는 태극을 중심에 둔 것은 접어두고라도 8괘 중에 4괘만 빌려왔다는 결함을 지적 받을 수 있다. 건곤(乾坤)은 천지와 부모, 감이(坎離)는 물과 불 또는 둘째 아들과 둘째 딸을 나타낸다. 큰 아들 딸과 막내 아들 딸을 나타내는 괘들은 빠져 버린 것이다.

 

또 국기가 너무 복잡하여 그 뜻을 알기도, 그리기도 어렵다. 대중성이 떨어진다. 원리를 터득하고 제대로 그릴 줄 알려면 상당한 교육이 필요하다. 국기는 국가의 상징이므로 단순 명쾌하게 국민에게 다가가야 하는데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마지막 한 가지 더. 태극기를 처음 사용하고 공식화한 인물이 박영효였다. 그는 초기 개화파로 근대화 과정의 주역이었으나 친일파로 전락했다. 임금의 사위였지만 일제에 협력하면서 온갖 특권을 누리고 살았다. 그의 친일행적을 덮어둘 것인가? 이는 결국 태극기의 상징성을 모독하는 결과를 빚는다.

 

이제 애국가의 제정과정을 알아보기로 한다. 애국가는 1880년대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운동이 일어날 때 지어 불렀다. 서양 국가를 참작해 여러 단체와 개인이 국가의식이나 시가 행진 때 불렀다. 1890년대부터 나돌기 시작한 애국가는 나필균, 전경택, 새문안교회, 배재학당 등에서 지어 부른 것 등 10여종에 이르렀다.

 

이와함께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국가 상징물로 애국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01년 의정대신 윤용선에게 국가(國歌) 제정을 명령한다. 이때 왕립군악대 지도자로 초빙된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는 1902년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한다. ‘상제(上帝)는 우리 황제(皇帝)를 도우소서’로 시작되는 이 애국가는 이후 한일합방 때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국가로 사용됐다.

 

1907년 무렵부터는 윤치호 작사의 애국가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윤치호는 여러 애국가를 참작해 다듬어 작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가사는 “우리 대한만세” “바람 이슬 불변함은” 등 몇 구절을 제외하고는 오늘날의 애국가 가사와 거의 일치한다.

 

윤치호 작사의 가사 첫 구절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이다. 동해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도록 전지전능한 하나님에게 보호해 달라고 소구(訴求)하는 내용이다.

 

이어 ‘화려강산’을 보존하고 ‘남산의 소나무’를 우리 기상으로 삼고 ‘가을 하늘’과 ‘밝은 달’ 따위 자연 현상을 빌려 ‘일편단심’의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뜻을 담았다. 첫 구절부터 동해물이 넘치고 백두산이 솟구쳐 오른다는 기상과는 동떨어진다. 마르고 닳는 퇴영적 소구일 뿐이다. 하나님에게 의타적 소구를 통해 나라를 보호하자고 했다. 인간의 의지는 온데 간데 없다.

 

이 하나님이 우리 민족의 정서에 보이는 ‘하늘님’인지 기독교에서 받드는 창조주 하느님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그는 열렬한 감리교도로 기독교적 인생관이 형성된 사람이 아니었던가?

 

다음 자연 현상의 용어들을 사용해서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무시되었다. 열강의 식민지 경영으로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한 현실에 대한 자기 각성과 타개의 용어들이 사라졌다. 그저 막연히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라고 촉구한 것이다. 인간이 실종되었으며 자주와 독립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인권사상과 평등사상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한’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대한제국을 의미한다. 대한제국은 주권 재민의 국민국가가 아닌 전주군주를 추구한 왕조의 연장이었다. 임시정부가 대한제국을 계승했으나 그 정체는 국민국가를 지향했다는 점이 달랐다.

 

아무튼 삼일운동 당시 우리의 강산에는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였다.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와 지사들은 태극기를 내걸고 애국가를 부르며 나라 찾자는 결의를 다졌다. 그 호소력과 전파력은 몇 만개의 총칼보다 위력을 발휘했다.

 

해방 뒤 대한민국 정부는 예전의 태극기와 애국가를 별 생각 없이 그대로 수용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사려가 깊지 못했다. 더욱이 애국가의 가사는 물론 그 곡조도 배재학당의 애국가 곡조(오늘날은 안익태 작곡을 사용)를 그대로 사용했다. 민족의식과 민주가치를 너무나 소홀하게 다뤘다는 혐의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또 작사자 윤치호 역시 교활한 친일파로 부귀를 누리고 살았다.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 이 대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더욱이 친일부역배 진상규명을 위한 법에 따라 이 두 사람도 그 조사 대상에 올라가게 되어 있다. 그들의 행적이 제대로 밝혀지면 태극기와 애국가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된다. 여기 어설픈 한 역사학자는 이 대목에서 가슴이 답답해진다.

 

- 박영효와 윤치호는 누구? -

 

박영효(1861~1939)는 철종의 부마(사위)로 많은 특혜와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는 초기에는 개화파의 주요 멤버로 꺼져 가는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의지가 충만했다.

 

갑신정변에 앞장 섰으며 독립협회의 주역으로 만민공동회를 이끌었다. 개혁을 선도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근대화를 모방하고 일본의 힘을 빌리려는 방법적 모순을 저질렀다.

 

일제식민지 지배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합병에 공로가 있다고 하여 후작(侯爵)과 많은 은사금을 받았다. 또 조선총독부 정책을 자문하는 중추원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조선 사람으로는 드물게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되기도 했다.

 

그는 삼일운동의 33인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친일단체의 모임에는 거의 빠짐없이 고개를 내밀었다. 많은 재산을 끌어안고 일본 사람들과 어울려 파티를 벌이거나 요정을 출입하면서 살았다.

 

윤치호(1865~1945)는 박영효보다 더 기교를 부리며 살았다. 젊은 나이에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미국을 시찰하기도 하고 미국 공사의 통역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드물게 영어 회화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그도 학부협판(교육부 차관격) 등 여러 벼슬을 하면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도 하고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다. 또 독립협회를 조직, 그 회장이 되어 정치·민권운동에 나서기도 했고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105인 사건, 곧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안창호 등이 신민회를 결성하여 민족운동을 벌일 때 여기에 가담했다 하여 10년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이때까지도 민중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실력양성운동을 펴는 온건론자였다.

 

“우리나라 사람이 땅 한 뙈기라도 사는 것이 실력”이라고 주장했다. 국내외의 여러 민족운동을 부정하는 말이나 같았다. 교묘한 화법이었다. 이런 그의 현실관과 행동방식은 일본 귀족원 의원을 지내는 따위로 식민지 정책에 협조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는 해방을 맞고 나서 죽었다. 죽음을 두고 말이 많았다. 친일파로 규탄을 받자 고민 끝에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주변 사람들이 지어냈다는 설이 유력하게 떠돌았다. 열렬한 감리교인인 그가 자살을 죄악시하는 교리를 어길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친일행각을 희석시키려는 잔꾀를 부렸다는 뜻이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으니 무엇이 진실인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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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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