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역대의 군주들 속에서 특별히 세종과 정조에게 문화군주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세종은 왕조체제가 안정기를 누릴 때 여러 문화적 업적을 이룩했다. 이와 달리 정조는 조선후기 왕조체제가 흔들릴 때 이를
수습해야 할 역사적 과제를 안고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정조는 세손으로 있을 때 자신을 지지하는 시파와 자신을 반대하는 벽파 사이에서 여러모로 시달림을 받았다. 이런 몇 가지 조건으로 정조는
세종과는 달리 수난의 역정을 걸었다. 정조는 흩어지는 민심을 수습하고 묵은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많은 개혁을 단행했다.
그가 왕위에 오른 뒤 맨 먼저 궁녀의 수를 줄였다. 궁녀는 일종의 궁중 노예였다. 그들 중 일부는 정5품까지 승진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결혼할 수도 없었다. 보수는 하급인 무수리의 경우를 보더라도 한 달에 쌀 4말, 한 해에 명주와 무명 각 한 필씩을 받았으며 때로 특별 하사품을
받았다.
이를 보아도 궁녀들의 보수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궁녀의 수는 500명 또는 600여명을 헤아렸다. 임금이 있는 대전에는
적어도 100여명이 복무하고 있었다. 정조가 궁녀를 없애려 하자, 할머니인 정순대비가 완강하게 반대했다. 첫 시련이었다.
정조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수발하는 대전의 궁녀만 없애버렸다. 궁녀를 없앤 것은 국가의 재정을 절약하면서, 결혼도 못하고 일생을 궁중에서
사는 여성의 한을 달래주려 한 것이다. 더욱이 궁녀들이 온갖 음모에 동원되는 오랜 궁중의 폐단도 없애려 했다. 그리고 대전에는 하급 벼슬아치를
두어 일을 맡게 했다. 대비는 이 조치를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가 맨 먼저 설치한 새로운 기구는 규장각(奎章閣)이다. 그는 세손으로 있을 적부터 오랜 구상을 한 끝에 왕위에 오르자마자 규장각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창덕궁 안에 둔 규장각의 건물은 6개월의 공사 끝에 완성되었다. 그 설치 목적은 역대 임금들의 초상화와 인장, 책 등을 보관하는
곳임을 표방했다. 규장각은 최초의 왕립도서관 또는 박물관의 구실을 했다.
규장각 건물과 인원 수는 가장 규모가 큰 홍문관의 배가 넘었으며 소속 벼슬아치들은 특별 권한을 누렸다. 각신은 임금이 새벽이나 밤에 대신을
만나 정사를 논의하는 장소에도 참여했다. 승지가 입시할 적에도 배석해 의견을 낼 수 있었으며 벼슬아치의 부정이나 과실을 적발해 탄핵하는 권한도
주었다.
규장각의 각신과 검서는 임금이 외부로 행차할 때마다 수행했으며 밤늦도록 임금과 함께 학문과 국사를 토론했다. 또 밤에 근무를 하거나 독서를
할 때 음식을 내려 보살펴 주었다. 이들이 바깥 출입을 할 적에는 궁중의 말을 내주었으며 녹봉의 지급도 넉넉했다. 정조가 일세의 인재들을 모았던
탓으로 세상 사람들은 “임금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고 출세를 보장받은 벼슬아치”로 칭송하여 부러움을 샀다.
규장각 설치의 의도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 외척의 발호를 막으려는 장치였다. 역대 왕조는 늘 외척들의 발호에
시달렸다. 그는 규장각을 외척을 배제하고 측근의 신하를 등용하는 기구로 활용했다. 둘째, 문풍의 진작에 두었다. 당시 선비와 문사들은 퇴폐풍조에
빠져 있었다. 셋째, 당파에 따라 인재를 등용치 않고 탕평(蕩平) 정책의 일환으로 당파의 인사를 고루 등용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인재의 고른 등용으로 친위세력을 키워 이들을 활용해 개혁정책을 펴겠다는 의도를 지녔던 것이다. 당연히 도서관이나 학술기구로서의
기능보다도 정치기구 또는 친위세력을 키우는 기능을 맡았던 것이다.
다음 규장각이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인 1781년 초계(抄啓) 문신을 두었다. 한번 과거에 합격하면 거의 학문이나 문자를 접하지 않은
폐단을 없애려 한 것이다. 초계 문신은 37세 이하의 중간 벼슬아치를 뽑아 3년 동안 특별교육을 시키는 제도였다. 처음 당파를 망라하여
20여명을 뽑았다. 이들에게 실직을 떠나 잡무에서 해방시켜주고 명예직을 주어 승진에 지장을 받지 않게 했다.
이들에게 경서를 다시 익히고 시사를 공부케 하고 문체 작법을 배우게 했다. 한 달에 한번씩 경서를 시험하는 시강(試講), 글을 짓는
시제(試製)를 보였다. 성적이 좋은 자에게는 승진, 성적이 나쁜 자에게는 승진에서 제외시키고 벌을 내렸다.
19년 동안 초계 문신 138명이 선발되었다. 그 가운데 정약용도 포함되었다. 이들을 어찌나 혹독하게 다루었는지 정약용은 “어린애같이
때리고 학생같이 단속했다”(‘경세유표’)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들은 정조의 충실한 신하가 되었으며 개혁의 추진세력이 되었다. 따라서 규장각의
각신과 초계 문신들은 정조의 지원을 받아 새 바람을 일으켜 문예부흥의 한 표상이 되었다.
정조는 이런 바탕 위에서 인재를 기르고 한 단계씩 개혁정책을 폈다. 그는 강력한 힘을 기초로 해야 바른 개혁을 이룩할 수 있다고 보고
군사지휘권의 일체화를 도모했다. 당시 군사 조직은 5군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5군영의 장수들은 군사동원에서 군무직의 최고 책임자인 병조판서의
지휘를 받지 않았다. 따라서 장수들은 5군영의 군사들을 가병(家兵)처럼 부릴 수 있었다. 정조는 5군영을 3군영으로 개편하고 그 지휘권을
병조판서에게 주었다. 또 새로운 군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해 친위부대로 만들었으며 그 책임자를 근신으로 임명했다. 장용영은 왕궁이 있는 서울과 서울
주변의 방위임무를 맡았다. 장용영의 군사는 특별히 정예병으로 양성했다. 아주 의미심장한 새 군영의 설치였다.
그는 결국 병조판서와 장용영을 직접 지휘할 수 있게 하여 군사 동원의 일원화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해서 무예를 진작시키고 자신이 직접 군을
동원할 수 있게 했다.
-규장각의 성쇠…정조 사후 당쟁소굴 전락-
한편 각신은 실력으로만 선발한 탓에 많은 신하들이 무한한 영광으로 여겼다. 각신과 검서들은 여러 특혜를 받았다. 규장각 건물 안에는 아무리
높은 인사가 오더라도 일어나지 말고 근무하라는 ‘객래불기(客來不起)’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그런 탓으로 벼슬아치가 죽어 신주를 만들 때, 아무리 높은 관직을 지냈을지라도 쓰지 않고 규장각의 하위 벼슬의 이름을 올렸다 한다. 그만큼
영예로운 자리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니 각신에 들지 않은 다른 벼슬아치들은 아무리 높은 벼슬을 누려도 주눅이 들었다 한다.
그런데 정조가 죽고 난 뒤 규장각은 변질되었다. 정치를 파행으로 이끌었던 안동 김씨와 노론들이 이 영광스러운 자리를 권력을 이용해 몽땅
차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야말로 무식쟁이도 규장각의 각신이 되어 거들먹거렸다. 규장각은 문벌과 당파의 소굴로 변질되었다. 오히려 양식 있는
선비 출신의 벼슬아치들은 이 시기에 와서는 각신에 드는 것을 수치로 여길 지경이었다.
1894년 개화파에 의해 여러 개혁조치가 이루어졌을 때 규장각 폐지 조항이 들어있었다. 그 폐단을 없애려 한 것이다. 그 뒤에 많은 논란을
빚다가 마침내 1910년 나라가 병합될 때 공식적으로 없어졌다. 하지만 그 유산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입했을 때 강화 유수 관아 안에 있던 외규장각의 의궤 등 많은 도서와 보물들이 약탈되었으며 건물과 많은
도서들은 불태워졌다. 오늘날 그 반환문제가 프랑스와 한국 사이에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되고 있다.
규장각 도서는 1911년 도서 10만여 책, 각종 기록 1만1천여 책이 조선총독부로 이관되었다가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졌다. 오늘날
서울대학교에서는 규장각관을 설립해 이들 도서를 소중하게 보관 관리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등 국보급에 해당하는 도서들이다. 그리하여 규장각관은
우리나라 최대의 한국학 관련자료를 모은 한국학의 산실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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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정조는 1776년 왕위에 올랐다. 그는 늘 검소한 생활을 했다. 평상복은 무명으로 지어 입었고 해어지면
기워 입었으며 수라상의 반찬은 다섯가지쯤으로 제한했다. 쇠고기 따위의 고급 음식은 되도록 올리지 못하게 했다. 또 화려한 자기 따위를 방 안에
벌여놓지 않았다. 스스로 백성과 벼슬아치들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 이유였음이 곧 드러났다. 뒤이어 만들어진 조직과 기능을 보면 이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다시 말해 친위세력을 키우는 장소로 만든 것이다. 규장각의 책임자는 제학(提學)이다. 정조는 제학으로 홍국영, 채제공 등 근신을 임명했다. 또
핵심적인 실무를 맡은 검서에는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 참신하고 당파와 관련이 없는 인사 또는 서자 출신을 임명했다.
규장각은 도서관 기능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다. 많은 도서를 수집하고 보관했는데 ‘규장총목’에 따르면 정조
당시 3만여권을 수집해 보관하고 중국과 한국 책으로 분류했다. 규장외각을 강화도에 두어 의궤(儀軌)와 도화 등 여러 궁중 관련의 책을 보관케
했다. 또 내각일력(內閣日曆) 등 많은 기록을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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