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동안 침묵을 지키던 삐삐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동안 하도 안와서 없애버릴까 고민하던 차였는데 이렇게 가끔가다 오는 소식 때문에 없애지도 못하고 애매한 돈만 매달 소비한다. 삼일에 한 번이면 한달이면 열번... 이 열번 때문에 매달 만원을 사용한다는 것은 엄청난 낭비라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막상 없애려고 하니까 망설이게 되고... 그렇게 지낸 세월이 벌써 6개월이다. 삐삐의 화면에는 내 번호가 찍혀 있고 그 뒤에 음성메시지가 왔다는 신호 [01]이 찍혀 있었다. 보통 음성을 녹음하면 자신의 신분을 금방 알아볼수 있게 특정한 번호를 찍는 것이 예의인데, 지금 삐삐의 주인공은 그러한 예의를 무시하고 있었다. 순간 일주일전의 악몽이 떠올랐다. 그때도 오늘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공중전화에서 10분을 기다려 확인해본 결과, 잘못온 삐삐였었다. 설마 이번에는 제대로 온 삐삐겠지. 그렇지만 주인공이 누굴까? 오늘따라 공중전화박스에는 만원이었다. 그중에 제일 빨리 전화를 끝낼 것 같이 생긴 사람 뒤에서 기다리는데, 제일 오래까지 전화기를 붙잡고 상대방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학교에 지각했어.” 신호등이 한 번 바뀌었다. 사람들은 뭐가 그리 바쁜지 빨간색이 초록색으로 바뀌기전에 서둘러서 길을 건너기 시작한다. “그런데 말이야, 오늘 교수가 사정이 있어서 휴강을 했지 뭐야. 그 기념으로 복권하나 샀지.” 도대체 누구한테 이야기를 하길래 저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보고하는 걸까? “오늘 날씨가 참 좋다. 환장할 지경이야.” 신호등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이번에 건너는 사람들도 좀전에 건너갔던 사람들처럼 참을성이 별로 없었다. 앞에 사람이 잠시후에 나를 돌아보고는 이렇게 양해를 구했다. “저, 음성을 남기다가 도중에 끊겼거든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웃는 얼굴에 침뱉지 못한다고, 나는 고개만 끄덕거려 주었다. 그 사람은 다시 번호를 누르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응 이건 두 번째 메시지야. 내가 #표를 두 번 눌러야 하는데, 실수로 세 번을 눌러버렸지 뭐야. 그건 그렇고 언제 시간이 나냐? 나야 뭐 매일 시간이 있으니까. 너가 되는 시간에 연락해 그러면 모든 일 제쳐놓고 달려갈게.” 저렇게 여자한테 저자세로 나가다가는 주도권을 빼앗기는데... 여자들은 좀 당당한 남자를 좋아하지 않나? 신호등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여전히 바쁜 사람들만 길을 건너 다니는 것 같다. “혹시 이 음성 듣고 연락할수 있으면 내 삐삐에다가 음성좀 남겨줘. 기다릴게.” 내용으로 보아, 여자는 어느정도 이 남자에게서 마음이 떠나간 상태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전화박스에서 나오는 그사람의 얼굴을 보고도 알수 있었다. 나는 전화박스에서 나오는 그 사람의 얼굴을 흘낏 보고는 전화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삐삐의 주인공은 천만뜻밖에도 혜선이었다. [안녕하세요? 저 혜선이예요. 참으로 오랜만에 남기는 메시지 같아요.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저는 잘 지내고 있는데. 그냥 길가다가 전화박스가 있길래 생각나서 음성을 남기는 거예요. 언제 시간나면 만나서 함께 얘기도 해요. 오늘 날씨가 참 좋아요. 그럼 즐거운 하루 되세요. 그럼 나중에 다시 음성 남길께요. 안녕히 계세요.] 또 일주일동안 고생하겠다... 자식, 잊을만 하면 연락하고... 잊을만 하면 연락하고... 메시지 확인하고 곧바로 연락하는 건 약한 모습이라고 스스로 주장하고 다니던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왠지 곧바로 연락하지 않으면 다시는 연락할수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혜선이냐? 참 오래간만이다. 오늘 늦잠자서 학교에 지각하고...” 생각해보니 좀전에 그 남자와 같은 말을 한다는 생각에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면, 너가 시간 나는 날 정해서 연락해라. 그때 만나서 이야기하지.” 혜선이와는 내가 대학 2학년에 올라가면서 우연하게 만났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6년전이다. 당시에 혜선이의 나이는 중학교 3학년... 한없이 어려보이는 그런 소녀였다.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과외를 시작했는데 그때 만난 학생이었다. 처음에는 7살 차이라는 생각에 아무런 감정없이 과외를 할수 있었다. 조용한 듯 하면서도 가끔 황당한 질문을 해서 나를 골탕먹이는 그런 소녀였다. “선생님은 어떤 영화를 제일 감명깊게 보셨어요?” “선생님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고백할 거예요?” “선생님은 첫사랑이 이루어질수 없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대학 4학년이 되면서 과외를 그만두게 되었는데, 혜선이는 선물로 영화음악 테이프를 사주었다. 내가 평소에 감명깊게 보았다는 ‘미션’이란 영화의 오리지날 사운드 트랙이었다. 그냥 무심코 듣고 넘어갔는줄 알았는데,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일주일동안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했다고 하면서 또 하나의 테이프를 건네주었다. 이렇게 서로의 기억속에 영원히 남고, 현실에서는 더 이상 만나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화를 끊고 길을 건너기 위해서 건널목에 섰을 때, 좀전의 그 남자가 옆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삐삐를 꺼내 손으로 들고 삐삐줄을 계속 돌리면서 건너편을 바라보는 그 남자의 시선이 어딘지 모르게 처량해 보였다. 정수와의 약속장소인 CF 커피전문점에는 이미 많은 선남선녀들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에 전화기가 있는 줄 진작에 알았으면 아까 괜한 시간 허비하는게 아닌데...’ 평소에 구석자리를 좋아하는데, 오늘은 이미 다 채워진 상태여서 하는수 없이 가운데 테이블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 주변을 살피다가 구석자리에서 혼자 커피를 시켜놓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발견했다. 좀전에 전화박스에서 전화걸던 사람이었다. 오늘은 계속 저 사람만 만나는 구나. 곧이어 정수가 전문점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 형! 왠일이야 구석만 고집하더니...” “괜찮은 구석이 없어. 그건 그렇고, 왜 불렀냐?” “잠깐 숨좀 돌리고 이야기하자. 왜 그리 급한 사람처럼 굴어? 시간도 남아돌면서...” 이때 시간을 보려고 테이블 위에 꺼내놓았던 삐삐가 진동을 했다. “봐라. 이래도 내가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으로 보이냐?” “어, 왠일이지? 형한테 삐삐가 다오고...” 번호가 7077로 찍혀 있었다. “7077... 이건 무슨 뜻이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형 아는 사람중에 이 번호와 관련된 사람 없어?” “글세 없는 것 같은데... 잘못 온건가? 한 번 확인하고 올게.”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갔는데, 좀전의 그 사람이 전화를 걸고 있었다. 설마 이 남자와 내가 사귀라는 하늘의 뜻은 아니겠지. 하나님도 동성연애는 좋아하시지 않으시니... “거기 은정이네 집이죠? 은정이 있습니까? 아... 예... 언제 나갔죠? 예... 그러면요 철민이한테 전화왔었다고 전해주세요. 안녕히 계세요.” 철민이란 사람은, 당연히 긴 통화를 예상했는데 짧게 끝내고 다시 자리에 돌아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음성을 확인해보니, 혜선이였다. [예, 안녕하세요, 선생님? 좀전에 메시지 확인했구요. 이번주 금요일에 시간이 있어요. 선생님은 어떠세요? 그날 만났으면 하는데... 그리고 저 머리 짧게 짤랐어요. 아마 보시면 몰라보실 거예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오늘이 수요일이니 이틀 남았다. 자리에 돌아오니, 정수가 궁금해서 안달이었다. “형 누구야? 여자지?” “그래 여자다. 속 시원하냐?” “시원하긴 배아프다... 그 여자 누구야? 뭐래?” “싱거운 녀석아. 만나자고 한 건 너야. 니 이야기나 해!” “그냥 간만에 만나서 차나 한잔 마시자는 거지 뭐.” “그래. 참으로 오래간만이다. 어제 만나고 오늘 만나니...” “형 혹시 소개팅 안할래요? 내가 좋은 여자 소개시켜줄께요.” “왜 안하던 짓 하냐? 사람이 갈때가 되면 안하던 짓 한다고 하던데... 혹시...” “괜히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봐요. 소개팅 할꺼유 안할꺼유.” “별로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왜?” “그냥...” “좀전의 여자가 사귀자고 했나보지? 그래서 튕기는 거구나.” 평소에 아무생각없이 지내는 정수가 던진 한마디가 이렇게 날카롭게 들릴줄은 몰랐다. 그런가? 내가 혜선이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나? 그리고 한가지 궁금한 것은... 왜 혜선이는 7077이라고 번호를 찍었지? 내가 삐삐를 없애지 않고 계속 살려두는 이유가 바로 이것인지도 모른다. 혜선이가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삐삐였다. 혜선이는 오랜만에 삐삐를 치고 안부를 물어왔다. 그리고는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동안 나는 다시 혜선이에 대한 기억을 잊기 위해서 몸부림 쳐야만 했다. 너무 즐거웠던 추억이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수 없는 추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잊어버려야 현실에서 내가 살아갈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간신히 마음을 정리하고 잊을만 하면, 어김없이 혜선이에게서 삐삐가 온다. 이렇게 짧게는 3주, 길게는 두달 사이를 두고 혜선이에게서 삐삐가 왔던 것이다. 만약 내가 삐삐를 없앤다면 혜선이는 나에게 연락할 방법을 모른다. 전화를 하라고 했지만 전화를 걸었을 때 내가 없을지도 모르니 전화는 싫다고 했었다. 하긴 나도 4년전에 한 번 전화를 했었는데, 혜선이 어머니가 받으셔서 누구냐고 물었을때는 말하기가 난감했었다. 이미 관둔 과외 선생이라고 하면 이상할 것 같고, 아는 오빠라고 하면 더 이상할 것 같고... “형, 잘생각해봐. 내가 소개해주는 여자는 어디가서 찾을수 없는 여자야.” “됐다. 커피나 마시고 일어나자.” “오늘따라 꽤 비싸게 구는데? 뭔가 예사롭지가 않아.” 왜 꼭 커피전문점에 가면 선배가 후배의 커피값도 내야 하는지 모르겠다. 커피값을 내고 밖으로 나오니 4월의 햇살이 그렇게 따사로울수가 없었다. ‘내일 모레도 이런 날씨여야 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