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몽항쟁의 격전지, 처인성(處仁城)을 가다...
누가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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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 남사면 아곡리의 입구 왼쪽에 자그마한 야산이 하나 있다. 멀리서 보면 그냥 자그마한 야산으로 보이지만, 실은 이 야산이 고려의 몽고 항쟁의 최대 격전지 중의 하나인 처인성(處仁城)이다.

     ▲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 입구 왼쪽에 위치한 처인성... 비석과 안내문이 처인성임을 알려주고 있다...
     ⓒ 이인배


처인성은 규모가 425m의 사다리꼴의 토성이다. 주변이 평지라 비교적 멀리서도 잘 보이는 이 성은 입구에 경기도 기념물 제44호라는 비석과 함께 처인성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으며 성의 남쪽에 ‘처인성 승첩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경기도 기념물 제44호라는 비석...
                            ⓒ 이인배

     ▲ 남쪽으로 향해있는 '처인성 승첩 기념비'
     ⓒ 이인배


잔존하는 성의 길이는 약 250m 정도이다. 주변보다 높은 지형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평면은 사다리꼴에 가까우며, 성을 쌓은 방법을 보면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다졌다. 지형의 높이를 고려하였기 때문에 성벽의 높이는 4.8∼6.3m로 차이가 난다. 이 성에서 북쪽으로 마주 보이는 곳에 말안장 같은 야산이 있는데, 여기서 살리타이가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사장(死將)터’라고 부른다.

     ▲ 남서쪽에서 성으로 오르는 자그마한 길...
     ⓒ 이인배

     ▲ 오솔길 끝에 우측으로 펼쳐져있는 성벽...
     ⓒ 이인배

     ▲ 오솔길 끝에 좌측으로 펼쳐져있는 성벽...
     ⓒ 이인배

     ▲ 성 안쪽...
     ⓒ 이인배

     ▲ 성에서 바라본 북쪽의 들판...
     ⓒ 이인배


처인성을 찾는 사람들은 커다란 기대감을 갖고 찾지만 막상 둘러본 이후에는 실망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안내표지판과 승첩기념비가 없으면 그곳이 대몽항쟁의 격전지라고 생각할 이렇다할 것이 없이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이 곳에서 13세기 초 동북아시아의 평원을 누비며 일으킨 정복전쟁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했던 몽골에게 뼈아픈 일패를 안긴 역사가 숨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3세기 초, 칭기즈칸에 의해 통합된 몽고 제국이 전 세계를 휩쓰는 과정에서 고려가 예외일 수는 없었다. 당시 고려의 조정은 몽고군이 수전에 약하다는 생각에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몽고에 대항하기로 결심했다. 장기전을 통해서 몽고군을 물리친다는 작전이었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1231년 몽고의 살리타이가 압록강을 넘어 침입한 이후 거의 40년의 세월 동안 몽고의 부대는 고려의 국토를 사정없이 유린했다. 1차(1231년), 2차(1232년), 3차(1235~39년), 4차(1247년), 5차(1253년), 6차(1254~59년)에 걸친 몽고의 침략에 고려의 전국토는 그야말로 초토화되었다.

잔학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몽고의 침략에 대항한 고려의 자존심은 지도층이 아니었다. 고려의 지도층이 자신들만의 안위를 위해서 강화도에 피신한 결과, 육지에 남아있는 고려의 백성들이 몽고군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1차 침략과 마찬가지로, 1232년 몽고의 2차 침략의 지휘를 맡은 살리타이는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의 조정을 고립시키기 위해서 고려의 본토를 초토화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살리타이는 몽고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개경을 거쳐 한양을 공략한 후, 수원을 지나 남쪽으로 진격하다가 처인성을 공격하게 되었다(1232년 9월).

왜 살리타이가 처인성을 공격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처인이 수원-오산-안성으로 통하는 동서로의 교차로였기에 남쪽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처인을 지나야 했으며, 당시에 처인이 군창으로 사용되던 곳이라 몽고군의 군량 보급을 위해 점령해야 할 곳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고 있다.

처인성을 지키던 승려 김윤후는 처인의 지역민들과 하나가 되어 몽고의 대군과 맞서 싸웠으며 이 싸움을 통해서 적장 살리타이가 전사하여 장수를 잃은 몽고군은 패하고 후퇴하게 된다. 김윤후는 이 싸움의 승리를 자신의 공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조정에서 내리는 상장군의 벼슬을 사양하고 섭랑장을 제수받은 그는 이후 몽고의 5차 침략 때(1953년) 충주성의 노비들과 합세하여 몽고군을 막는 전공을 세우기도 한다.

     ▲ 처인성 전투를 그린 그림
     ⓒ 엠파스


고려시대 처인성은 처인부곡에 속한 성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곳은 ‘고려시대의 군창지’로 성의 위치가 화성, 평택으로 이어지는 경기평야의 가장자리에 있어서 군량미나 식량의 저장과 보급기지로 기능을 담당했던 곳으로 보여진다.

전통적으로 향(鄕)·소(所)·부곡(部曲)을 천민집단이 거주하는 곳으로 알고 있지만, 최근의 학설은 그것이 군·현과 같은 행정구획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대세로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향과 부곡민들이 추가로 역을 부담하기는 했지만 천민 집단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것이다.

처인성 전투의 주역은 처인부곡의 주민들이었다. 그 지역의 주민들이 일반 평민이었든, 천민이었든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신분적인 구분을 떠나서 누가 고려의 자존심이었는가는 고려의 대몽항쟁에서 확실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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