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49] 1970년에는 우리도 있었다!
[1970년 월드컵] 서독, 아쉬운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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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월드컵 이전의 독일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분단 이전의 독일은 그다지 월드컵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라가 분단된 이후, 서독과 동독은 각각 따로 팀을 구성하여 참가하기 시작했다. 동독은 1964년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였지만, 월드컵에서는 본선에도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서독은 1954년 마법의 팀 헝가리를 누르고 기적같은 우승을 차지한 이후 꾸준히 본선 무대에 참가했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유고슬라비아를 누르고 4강에 진출했지만, 스웨덴과 프랑스에게 패하며 4위를 차지한 서독은,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는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했지만 유고슬라비아에 패하며 4강 진출에 실패한 바 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우루과이, 소련을 누르고 결승에 진출했지만 개최국 잉글랜드에게 석연찮은 판정으로 연장에서 패하고 준우승에 머물렀다.

브라질이 50년대 후반부터 화려하게 비상하고 있을 때, 비록 그들을 능가하지는 못했지만 서독 역시 나름대로 전열을 가다듬으며 새로운 축구 강국으로 비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리베로’ 베켄바우어가 2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후방을 든든히 지키고 있었고, 게르만 폭격기 게르트 뮬러가 뛰어난 득점감각을 보여주며 공격을 주도하고 있었다.

# 조별리그

서독은 페루, 불가리아, 모로코와 함께 본선 조별리그 4조에 속했다. 이들 중에서 서독의 전력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었지만 상대팀들도 그다지 만만한 팀들은 아니었다. 페루는 지역예선에서 아르헨티나를 침몰시키며 등장한 팀이고, 불가리아는 2년 전 올림픽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나라였다. 모로코는 첫 출전한 팀이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안고 있는 아프리카의 대표로 호락호락한 팀은 아니었다.

서독은 6월 3일 아프리카 대표인 모로코와 조별리그 첫 경기를 가졌다. 모로코로서는 객관적인 전력이 뒤지기 때문에 져도 손해볼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했다. 마음을 비운 모로코가 먼저 선취득점을 하면서 전반전을 1-0으로 앞서나갔다. 서독은 후반에 우베 젤러와 게르트 뮬러가 골을 성공시키며 2-1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서독의 두 번째 경기는 6월 7일 불가리아와의 경기였다. 불가리아는 지역예선에서 네덜란드와 폴란드를 제압하며 본선에 올랐으며 2년 전 멕시코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팀이었다. 불가리아는 첫 경기에서 페루에게 2-0으로 이기다가 후반에 2-3으로 역전패하며 충격에 빠져있었다.

첫 경기에서 역전패한 불가리아는 전반 12분경 니코디모프(Nikodimov)가 선취골을 넣으며 기사 회생을 노렸다. 그러나 서독은 게르트 뮬러가 세 골을 넣는 활약에 힘입어 불가리아를 5-2로 제압하고 2승을 거두며 페루와 함께 2승으로 일찌감치 결승 토너먼트 진출을 확정지었다.

서독의 세 번째 경기는 6월 10일 페루와의 경기였는데, 양 팀이 모두 2승으로 이미 결승 토너먼트 진출이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 1위와 2위를 가리는 경기가 되었다. 이 경기에서 서독은 게르트 뮬러의 헤트트릭에 힘입어 페루를 3-1로 제압하고 조 1위로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하게 되었다.

# 결승 토너먼트

서독은 준준결승에서 디팬딩 챔피언 잉글랜드와 맞붙게 되었다. 이들은 4년 전에 결승에서 만난 상대였다. 당시에는 잉글랜드가 연장 승부 끝에 이기며 우승을 차지했는데, 서독으로서는 결승골 판정에 대해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경기였다.

잉글랜드는 조별리그에서 브라질에 이어 조 2위를 차지하고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한 팀이었다. 조별리그에서 단 두 골을 성공시켰지만 각각 승리를 얻기에 충분한 골이었다. 잉글랜드는 루마니아에게 1-0, 체코슬로바키아에게 1-0으로 승리하고, 브라질에게는 0-1로 패하며 조 2위를 차지하였다. 비록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은 했지만 내용적으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6월 14일, 4년 뒤 설욕에 나선 서독은 초반에 0-2로 끌려다녔다. 조별리그에서 빈약한 득점력을 보여주었던 잉글랜드는 전반에 한 골을 선취하고 후반에서도 먼저 추가골을 넣으며 2-0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경기는 잉글랜드의 승리로 굳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반격에 나선 서독은 베켄바우어가 한 골을 넣으며(68분) 추격의 불씨를 당겼다. 곧이어 우베 젤러가 동점골을 성공시키며(76분)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았고, 양팀은 2-2로 무승부를 기록하고 연장전에 돌입하였다. 서독은 연장전에서 게르트 뮬러가 결승골을 성공시키며 4년 전의 패배를 설욕하는 동시에 준결승 진출에 성공하였다.

서독의 준결승 상대는 빗장수비의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는 지역예선에서 동독을 따돌리고 본선에 진출한 팀이었고, 조별리그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세 경기에서 한 골을 넣으며 골결정력에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준준결승에서 멕시코를 4-1로 격파하며 조별리그의 부진을 말끔히 털어버린 팀이었다.

6월 17일 서독과 이탈리아와의 경기는 연장에서 승부가 가려졌다. 3일 전에 연장 혈투를 벌인 서독은 경기 초반에 한 골을 잃고서 0-1로 90분 내내 끌려다녔다. 서독은 이탈리아의 견고한 수비를 뚫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좀처럼 이탈리아의 골문은 열리지 않았다. 후반 45분도 거의 다 되어 심판이 호각소리를 불기 시작할 무렵, 서독의 슈넬링거가 천금같은 공점골을 성공시켰다. 끝내 이탈리아의 빗장수비가 풀려진 것이다.

양 팀 모두 수비가 탄탄한 팀으로 정평이 나 있었지만 연장전은 화끈한 공격 축구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한번 풀린 이탈리아의 빗장수비는 서독에게 두 골을 추가로 내 주었고, 리베로 시스템의 서독 역시 세 골을 이탈리아에게 헌납하였다. 이 경기에서 베켄바우어는 어깨가 탈골되는 부상 투혼을 보이며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이탈리아가 4-3으로 승리를 거두고 결승에 진출하게 되었다. 서독으로서는 준준결승에서 잉글랜드와 연장 혈투 이후에 이탈리아와도 연장 승부를 펼치며 축구팬들에게 좋은 경기를 선사했지만, 아쉽게 패하고 3-4위전으로 밀려났다.

# 서독, 다음 대회를 기약하며...

3-4위전에서 서독은 브라질에게 1-3으로 패한 우루과이와 만났다. 결승전이 열리기 전날(6월 20일) 오후 4시에 그동안 박진감 넘치는 명승부를 연출한 서독과 남미의 우루과이와의 경기를 보기위해서 10만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았다. 비록 결승전은 아니었지만 서독과 우루과이와의 경기는 그만큼 값어치 있는 경기라고 판단한 것이다. 준결승전에서 부상을 당한 베켄바우어가 빠진 서독은 우루과이에게 1-0으로 승리를 하며 3위를 차지하였다.

브라질이 세 번 우승을 달성한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수비축구로 준우승을 달성하며 재기에 성공한 이탈리아와, 꾸준히 본선에 올라 4강 이상의 성적을 올리고 있는 서독의 움직임이 포착된 대회였다. 서독은 아직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충분한 가능성을 두 번의 대회(1966년, 1970년)에서 보여주었고, 다음번 대회를 통해서 1954년의 감격을 되풀이하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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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도 올린 글입니다.

[월드컵 27] 서독, 헝가리의 마법을 풀다
[제5회 월드컵] 최후의 승리를 위해서는 순간의 패배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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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드 배정도 못 받은 이류 국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16개 나라는 피파에 의해서 두 개의 진영으로 구분되었다. 선택된 8개 팀은 강자로 분류되었고, 나머지 8개 팀은 비교적 약자로 분류되었다. 지역예선에서 노르웨이를 제압하고 본선에 오른 서독은 후자에 속했다.

제2차 대전의 주범으로 전쟁이 끝나고 동서로 나뉜 독일의 한쪽 진영인 서독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노르웨이와 핀란드를 제치고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지역예선에서 3승 1무의 성적을 거두었지만 당시 서독의 축구는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류 국가에 속했다.

서독이 배정받은 2조에는 당시 무패의 팀 헝가리와 터키, 그리고 아시아의 한국이 함께 배정되었다. 피파는 네 나라 중에서 헝가리와 터키를 강자로 구분하여 시드를 배정하였다. 서독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노릇이었지만 어차피 승부의 세계에서는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그 이전에 강자로 구분되건 약자로 구분되는 것은 크게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 불리한 조별리그

분명 당시 조별리그는 서독보다는 터키가 유리했다. 서독은 세계 최강 헝가리와 터키를 상대해야 했고, 터키는 헝가리를 피하고 서독과 한국을 상대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독으로서는 1패가 이미 예약된 상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 각 조에 속한 팀들이 모두 대결하는 일반적인 방식을 취한다면 서독도 한국과 대결할 수 있기 때문에 비교적 여유 있는 조별리그 운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독은 시드 배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과 대결할 수 없었다.

터키로서는 한국을 당연히 이긴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독과의 대결에서 비기기만 해도 조별리그 통과는 이룰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지역예선에서 제비뽑기라는 행운이 터키에게 본선 진출을 가져다 준 것처럼 특별한 조별리그 운영 방식은 터키에게 유리하게 적용되는 듯 했다.

서독으로서는 비록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지만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당시에 승점으로만 순위를 가리고 있었고, 오늘날처럼 골득실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규정이었다. 그래서 서독으로서는 헝가리에게 패하더라도 터키만 붙잡는다면 조 2위는 불가능한 상황이 아니었다.

물론 터키가 약체인 한국을 이긴다고 하더라도 세계 최강 헝가리가 터키를 꺾어준다면 서독은 터키를 제치고 2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하다’

서독은 처음부터 조 1위가 될 생각이 없었다. 워낙 헝가리라는 존재가 컸기 때문도 있었지만 조 1위가 된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결승 토너먼트에서 유리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독은 조 2위가 되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 유리한 점이 많았다. 8강이 겨루는 결승 토너먼트는 각 조의 1위 팀은 1위 팀끼리, 그리고 2위 팀은 2위 팀끼리 대진표가 짜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서독이 욕심을 부려서 조별리그에서 1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헝가리와의 대결에서 총력을 기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베스트 맴버를 출전시켜 헝가리를 잡는다는 보장이 없었고, 설사 잡고서 조 1위를 확정한다고 하더라도 8강 토너먼트 이후에는 남미의 강호들과 상대할 것이기에 차라리 조 2위가 서독에게는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서독으로서는 애초에 조 1위의 욕심을 과감히 버렸다. 어차피 세계 최강 헝가리와 조별리그에서 정면승부를 펼쳐봤자 터키에게 어부지리를 줄 수도 있기에, 헝가리와의 대결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오로지 터키와의 경기에 승부를 걸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서독의 작전은 주효했다. 서독은 첫 번째 경기인 터키와의 경기(6월 17일)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 4-1로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번 경기는 모두가 예상했듯이 헝가리에게 패했다(6월 20일). 서독으로서는 예상보다 큰 점수차(3-8)로 패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결승 토너먼트를 위해서 그러한 아픔을 감수할 수 있었다.

서독과 비기기만 해도 2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터키는 서독에게 패한 뒤, 다음 경기인 한국과의 경기(6월 20일)에서 7-0으로 대승을 거두었지만 결국 서독과 1승 1패를 기록하며 동률을 이루었다. 오늘날과 같았으면 골득실에서 앞선 터키가 2위를 차지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의 규정에 따라서 서독과 터키의 플레이오프가 6월 23일 진행되었고, 이 경기에서 서독이 7-2로 승리하여 조 2위를 차지하고 8강이 겨루는 토너먼트에 진출하게 되었다.

# 순탄한 결승 토너먼트

우여곡절 끝에 8강에 진출한 서독은 비교적 순탄한 토너먼트에 합류하게 되었다. 각 조의 1위가 득실거리는 쪽을 피했기 때문에 서독으로서는 행운이었다.

물론 강팀들을 피했다고는 서독의 상대가 되는 팀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8강에서 서독이 만난 상대는 올림픽에서 연속으로 준우승을 차지한 동유럽의 강호 유고슬라비아였다. 유고슬라비아는 비록 시드를 배정받지 못해서 약체인 멕시코와의 경기는 할 수 없었지만 강호 브라질과 연장 접전 끝에 1-1 무승부를 이루었고, 시드를 배정받은 프랑스를 1-0으로 누르며 조 2위를 기록하고 8강에 오른 팀이었다. 유고슬라비아의 단점이라면 지역예선과 본선 조별리그를 통해서 매 경기 한골밖에 못 넣는 골 결정력에 있었다.

유고슬라비아의 형편없는 득점력은 결국 서독과의 경기(6월 27일)에서도 진가를 발휘했다. 서독은 유고의 골결정력 부족에 힘입어 유고슬라비아를 2-0으로 누르고 준결승에 진출하게 되었다.

서독이 결승에 오르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상대는 역사적으로 감정이 있는 오스트리아였다. 오스트리아는 1938년 제3회 월드컵에서 지역예선을 통과하고도 독일에게 합병되는 바람에 본선의 무대를 밟지 못했던 뼈아픈 과거를 갖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다행히 조별리그에서 시드를 배정받아 강호 우루과이를 피할 수 있었고, 스코틀랜드(1-0)와 체코슬로바키아(5-0)를 제압하고 8강에 진출한 팀이다.

오스트리아는 역사적 감정을 서독과의 경기에 쏟아부으려고 했으나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독일에게 1-6으로 패하고 3-4위전으로 밀려났다.

# 베른의 기적

조별리그에서 3-8로 패한 바 있는 서독이 결승에서 다시 헝가리를 만났을 때 모든 축구팬들은 당연히 헝가리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독으로서는 헝가리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8강 토너먼트에서 브라질과 우루과이를 상대하며 비록 승리를 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피해를 입은 헝가리에 비해서 체력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는 서독은 베스트 맴버를 결승전에 투입시켰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듯이 헝가리는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두 골을 먼저 넣으며 신화를 이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헝가리의 무패 신화는 서독의 기적에 의해서 깨지고 말았다. 2-2의 동점 상황에서 터진 란의 역전골이 결승골이 되면서 서독은 무패의 신화 헝가리를 침몰시키며 세계 축구의 정상에 오르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하였다.

월드컵과 같은 축구 경기에서 절대 강자로 지목된 팀이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가끔 보게 된다. 1954년의 헝가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절대 강자였다. 절대 강자는 자신의 강함을 인정하기 위해서 어떠한 변칙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는다. 변칙으로 승리를 얻는 것은 자신들의 성취에 흠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헝가리는 강자들이 득실거리는 곳을 피하거나 돌아가지 않고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절대 강자가 아닌 서독은 패배해도, 최후의 성공을 위해서 약간 돌아가더라도 그것이 확실하다면 택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가지고 있었다. 3-8의 패배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최후의 승리를 얻기 위해서라면 순간의 패배도 감수할 수 있는 것이 서독의 우승이 가져온 귀중한 경험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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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법의 팀, 헝가리

1950년대 초반을 휩쓴 헝가리는 1952년 아마추어의 정상인 헬싱키 올림픽에서 완벽하게 승리를 거두며 금메달을 획득한 이후, 1954년 월드컵 재패를 목표로 거침없이 행진하고 있었다.

1953년 헝가리는 홈그라운드에서 백 년 동안 진 역사가 없다는 잉글랜드 대표팀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6-3으로 격파하였다. 이 충격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서 잉글랜드는 월드컵 개막을 한 달 앞두고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설욕을 노렸지만 오히려 7-1이라는 엄청난 스코어차로 패할 정도로 헝가리의 실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헝가리는 1938년 제3회 월드컵에서 결승에 오른 적이 있었지만 당시에 최강 이탈리아에게 2-4로 패하고 준우승에 머문 바 있었다. 당시에 헝가리는 비교적 강하다는 평가는 받았지만 절대 강자의 칭호는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1954년 월드컵을 맞이하여 헝가리는 그야말로 ‘절대 강자’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팀이었다.

월드컵을 앞두고 스위스의 1부 리그 팀과 맞붙어 10-0이란 스코어로 승리하는 등 그야말로 천하무적의 팀이 1954년 월드컵 당시의 헝가리였다.

그러나 이런 천하무적의 팀은 결국 월드컵 정상 일보직전에서 무릎을 꿇었다. 능력이 모자라서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다. 오늘날 당시의 월드컵을 살펴보면 여러모로 허점투성이를 발견할 수 있고, 바로 이러한 허점투성이의 대진 방식은 헝가리의 신화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 조별리그

헝가리가 속한 제2조는 터키, 서독, 한국이 배정되었다. 피파는 헝가리와 터키에게 시드를 배정하여 서로 경기를 하지 못하게 하였고, 시드를 배정받지 못한 서독과 한국 역시 서로 경기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헝가리는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한국을 압도하며 무려 9-0이라는 스코어로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한국팀의 골키퍼 홍덕영은 당시의 경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헝가리의 슈팅은 마치 대포알 같았고, 푸스카스나 치보르, 콕시스가 때린 공은 안보일 정도였다. 특히 골포스트나 바에 맞으면 마치 천둥이 치는 듯 했다.”

한국이 기나긴 여행으로 제 기량을 펼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베스트 컨디션으로 맞붙었어도 (점수 차이에는 변화가 있었겠지만) 헝가리의 상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헝가리는 4-2-4 전법을 변형한 혼베드 전법으로 미드필드를 완전히 장악했으며 한국팀은 전반에 두 번의 슈팅 이외에는 제대로 공격조차 하지 못했다.

헝가리의 두 번째 상대는 서독이었다. 서독의 감독은 헝가리와의 경기를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포기였다. 베스트 맴버를 출전시켜 헝가리를 잡는다는 보장이 없었고, 설사 잡고서 조 1위를 확정한다고 하더라도 8강 토너먼트 이후에는 남미의 강호들과 상대할 것이기에 차라리 조 2위가 서독에게는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서독으로서는 어차피 한국이 터키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터키만 잡는다면 조 2위를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헝가리와의 경기에 전력을 쏟을 필요가 없었다. 결국 서독은 주장인 F. Walter을 제외한 2진급 선수들을 헝가리와의 대전에 출전시켰다.

이러한 서독에 대해서 헝가리 역시 2진급 선수들을 내보냈지만 서독처럼 다양한 경우의 수를 고민하지 않았다. 헝가리로서는 세계 강호들을 피해서 결승에 진출하기보다는 정면승부로 돌파하는 방법이 그들에게 어울리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별리그에서 헝가리는 서독에게 8-3이라는 큰 스코어차이로 이기며 조 1위를 확정하고 8강이 겨루는 토너먼트에 진출하였다.

# 험난한 결승 토너먼트

오늘날의 월드컵은 조별리그에서 1위를 차지하면 16강 토너먼트에서 다른 조의 2위 팀과 겨루게 되어 있다. 그러나 1954년의 월드컵은 이상하게도 각 조의 1위가 준준결승을 치렀고, 역시 각 조의 2위가 준준결승을 치렀다. 그렇기 때문에 조 1위를 확정지은 헝가리는 스스로 강자들이 득실거리는 사지에 자신을 내던진 꼴이 되었다.

헝가리가 8강에서 만난 상대는 남미의 브라질이었다. 4년 전 다잡았던 우승을 우루과이에게 넘겨준 브라질은 분명 헝가리에게는 힘든 상대였다. 그러나 헝가리는 복수의 칼을 갈고 닦은 브라질보다 훨씬 날카로운 칼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양 팀의 충돌은 서로 주먹이 오가는 난투극으로 발전하였다.

6월 27일에 벌어진 브라질과 헝가리의 경기는 <베른의 난투극>이라는 이름으로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폭력 사태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세 명이 퇴장당하며 경기가 끝난 뒤 샤워실에서의 난투극으로까지 이어진 이 경기에서 헝가리는 4-2로 승리를 거두었다. 비록 승리를 거두었지만 헝가리는 브라질과의 격렬한 사투의 후유증으로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헝가리가 결승에 오르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상대는 디팬딩 챔피언 우루과이였다. 헝가리로서는 산 넘어 산이었다. 우루과이는 비록 20년 전의 전성시대 보다는 전력이 다소 약화되었다고 하지만, 4년 전 월드컵 정상에 오른 저력이 있는 팀으로 그때까지 월드컵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은 강팀이었다.

헝가리는 부상 중인 푸스카스를 빼고 우루과이와 준결승을 치르게 되었다. 이 경기에서 헝가리는 2-0으로 앞서나가며 쉽게 승리하는 듯 했다. 그러나 큰 경기에 강한 우루과이는 후반전에 호베르크가 두 골을 넣으며 동점에 성공하였고, 경기는 연장전에 돌입하였다. 전통의 우루과이와 마법의 헝가리의 연장 경기는 콕시크의 두 개의 헤딩 슛으로 마무리 되었다. 결국 헝가리는 우루과이에게 월드컵 첫 패배를 안겨주며 결승전에 진출하였다.

# '베른의 기적'과 함께 침몰한 마법사 군단

서독으로서는 ‘베른의 기적’이라고 불리우는 7월 4일, 베른의 모든 신문들은 헝가리가 승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객관적인 전력상 7-3 혹은 8-2의 우세가 점쳐지는 가운데 역사적인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헝가리로서는 사실상 브라질, 우루과이와의 사투를 벌이며 세 번째 결승전을 치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반면 독일은 비교적 순탄한 행진으로 결승에 안착하여 체력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마법의 군단 헝가리는 결승전 휘슬이 울리자마자 8분만에 푸스카스와 치보르가 득점에 성공하며 2-0으로 앞서나갔다. 전반 10분이 헝가리의 시간이었다면 그 뒤 10분은 서독의 시간이었다. 서독은 Morlock이 11분 경 한 골을 만회하였고, 18분경 란(Rahn)이 동점골을 넣어 경기를 2-2로 만들었다.

후반전 6분을 남겨놓고 서독의 란이 독일이 앞서는 역전골을 성공시켰다. 헝가리로서는 종료 직전에 푸스카스가 골을 넣었으나 오프사이드로 득점이 인정되지 못하고 결국 2-3으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최강의 실력을 갖춘 헝가리는 결국 서독에게 우승을 넘겨주고 준우승에 머물렀다. 헝가리로서는 32연승의 신화가 깨진 동시에 세계 축구의 정상을 향한 자신들의 꿈이 깨진 것이다. 헝가리는 1950년부터 1956년까지 헝가리 국가대표팀은 40승 6무 1패를 기록하였는데 유일한 패배가 바로 월드컵 결승에서 당한 2-3의 패배였다.

헝가리 신화의 종지부는 서독이 달성했지만, 서독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진행된 경기 진행 방식과, 준준결승의 브라질, 준결승의 우루과이가 합심해서(?) 이룬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침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던 헝가리라는 무적의 군단은 결승에 오르기까지 서서히 위기를 축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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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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