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의 조연, 이길환을 기억하며
췌장암으로 사망한 이길환 선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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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 선발투수, 이길환
2007년 6월 12일, 프로야구 역사에 한 발자취를 남긴 선수가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개인 타이틀 하나 없이 프로야구 원년부터 9년 동안 44승 31패 4세이브, 방어율 3.69을 기록한 언더핸드(사이드암에 가까움) 투수 이길환이 그 주인공이다.
워낙 유명한 투수들이 프로야구를 거쳐갔기 때문에 이길환의 기록은 그다지 뛰어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인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에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조연으로서 한국 프로야구의 초창기 역사를 묵묵히 걸어간 선수였다. 또한 그는 한국 프로야구의 시작을 알리는 원년(1982년) 개막전 선발투수였다.
# 이길환의 고등학교 시절
이길환은 고등학교 시절에 꽤 유명한 선수였다. 1959년생인 이길환은 선린상고 1학년인 1975년부터 선린상고의 실질적 에이스로 마운드를 지키기 시작하였다. 이 해 청룡기 서울지역 예선에서 상문고를 1-0으로 이길 때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며 혜성처럼 등장하였다.
이길환은 청룡기 대회 본선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하며 팀을 결승까지 진출시켰다. 결승전에서 맞붙은 팀은 성낙수가 버티고 있는 경북고였다. 이길환과 성낙수의 맞대결은 연장 13회까지가는 접전 끝에 2-2로 무승부를 기록하였고, 다음날 재경기에서 선린상고는 0-3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 대회에서 이길환은 어깨 통증이 심해서 진통제를 맞아가며 역투했다고 한다. 비록 우승은 이루지 못했지만 이길환은 감투상을 받으며 뛰어난 투수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76년은 이길환에게 있어서 가장 화려했지만 가장 불운한 해였다고 할 수 있다. 1976년 청룡기 대회 본선에서 이길환은 준결승전에 진출하였지만, 최동원이 버티고 있는 경남고에게 0-1로 패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타격 감각도 좋은 이길환은 이 대회에서 14타수 6안타(4할2푼9리)로 타격2위에 올라 투타 양면으로 재주가 있음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 해 여름방학, 선린상고는 고교야구 최고의 축제인 제6회 봉황대기에 참가했는데, 봉황대기는 다른 대회와는 달리 지역예선이 없기 때문에 전국의 고등학교 야구팀이 총출동하는 대회였다. 이 대회에는 고등학생으로 국가대표에 선발될 정도의 실력을 갖춘 투수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경남고의 최동원, 군산상고의 김용남, 대구상고의 김시진 등이 모교의 명예를 걸고 마운드를 지켰다. 이 대회에서 이길환의 선린상고는 결승에까지 오르는데는 성공했지만, 결승에서 부산상고의 이윤섭과 맞대결해서 0-4로 패하고 또 다시 준우승에 머물렀다. 비록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그는 ‘우수 투수상’을 받기도 했다.
그해 선린상고는 다시 제30회 황금사자기 결승에 올랐지만 신일고에 0-6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투수는 대회 기간 중 거의 모든 경기를 책임져야 했는데, 이길환은 선린상고의 마운드를 지키며 팀을 결승까지는 이끌었지만 마지막 고비에서 무릎을 꿇으며 끝내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다.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 진학한 이길환은 대학야구를 한양대학교와 양분하며 각종 상을 휩쓸며 한국의 대표적인 투수로 자리잡았다. 그는 다른 투수와는 달리 언더핸드(사이드암에 가까움) 투수였기 때문에 타자들이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 이길환의 프로 시절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을 때 이길환은 MBC 청룡에 입단했는데, 당시 MBC 청룡의 마운드는 기록상으로 보면 다른 구단보다 훨씬 뛰어난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기룡, 정순명, 유종겸, 이길환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실업을 거치며 철저히 검증된 선수들이었다. (물론 이 검증의 과정에서 혹사당한 측면이 없지 않았을 테지만...)
1982년 3월 27일, 역사적인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MBC 청룡의 선발투수는 원래 하기룡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기룡이 복통을 일으켜 이길환이 대신 선발투수로 등판하게 되었다. 갑작스런 등판이라 이길환은 몸이 덜 풀렸는지 2회까지 3안타 5실점을 허용하였고, 3회에 교체되었다.
이길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MBC 청룡이 극적으로 동점을 만들고 연장에서 이종도의 만루홈런으로 11-7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기 때문에 패전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프로에서의 첫 등판에서 거둔 성적으로는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이길환이 자존심을 회복한 경기는 6월 13일 OB 베어스와의 경기로, 이 날 이길환은 5회에 김우열에게 유격수쪽 내야안타 한 개를 허용하면서 프로 최초 1안타 완봉승을 거두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프로출범 첫 해에 이길환은 7승 7패, 평균자책점 3.61이라는 비교적 평범한 성적을 기록하였다. 아마추어의 이길환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라한 성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 2년차에 접어든 이길환은 프로 무대에 완벽하게 적응하였고, 15승 7패, 평균자책점 2.51로 승률 1위, 다승 4위에 오르는 빼어난 성적을 남기고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진출시켰다. 언더핸드 투수가 별로 없던 시절이었기에 이길환의 공은 타자를 현혹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선수로서 가장 왕성할 활약을 보여주어야 할 20대 중반 이후의 시절, 이길환은 깊은 슬럼프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1984년(3승 3패), 1985년(1승 2패), 1986년(1승), 1987년(4승 4패)의 성적은 더 이상 왕년의 이길환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했고, 기라성같은 특급 투수들이 잇달아 등장하면서 투수로서의 입지가 점차 좁아지고 있었다.
1988년, 이길환이 30세가 되던 해, 그는 10승 4패(방어율 3.53)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 해에 MBC 청룡이 40승을 거두었으니 이길환 혼자서 팀이 거둔 승리의 4분의 1을 책임진 것이다. 그러나 이해가 이길환이 선수로서 화려하게 날아오른 마지막 해였다.
1989년 2승 4패를 기록한 이길환은 1990년에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 되어 9게임에 등판해 1승(방어율 7.54)를 기록하고 유니폼을 벗었다.
# 48살의 나이, 짧은 인생을 마감한 이길환
선수 생활을 마감한 이길환은 LG 트윈스의 코치직을 맡다가 스카우트를 담당하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1993년에 연세대학교 입학이 거의 성사된 신일고 거물 김재현을 한-일고교야구대회가 열린 오키나와까지 쫓아가 마감 시간 직전에 계약서(계약금 9100만 원)에 사인을 받아내며 LG 트윈스의 전력 강화에 한 몫을 담당하기도 했다.
48살의 나이, 아직 한창 일할 나이인 이길환은 지난 11월 중순, 서울 아산중앙병원에서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12일 오전 9시30분 경기 안양시 한림대 성심병원에서 그의 짧은 운명을 마감하였다.
한국 프로야구가 처음 시작된 그 해(1982년), 처음으로 마운드에 올라 한국 프로야구의 시작을 알렸던 조용한 2인자 이길환은 비록 화려하게 꽃피우지는 못했지만,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우리 프로야구를 지켜온 증인이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 속에서 뛰어난 기록을 작성하지는 않았지만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팀의 승리를 위해 기여한 선수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뛰어난 소수보다 묵묵히 자리를 지킨 다수가 진정한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를 이끈 주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 중에 한 사람, 이길환을 떠나보내며 그에 대한 기억을 다시금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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