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의 우승과 세대교체의 바람
[올림픽 축구 5] 1920년, 판정 논란으로 중단된 결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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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간의 공백

1912년 영국이 올림픽 챔피언이 된 이후, 8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전쟁이 유럽을 휩쓸었고, 유럽은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었다. 전쟁으로 인하여 1916년 제6회 올림픽은 취소되었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1920년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제7회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비록 전쟁이 끝난 뒤에 복구가 진행되는 힘든 기간이었지만, 제7회 올림픽에 축구팀을 참가시킨 국가는 개최국 벨기에를 포함하여 총 14개 팀이었다(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대영제국, 노르웨이, 이집트,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그리스, 스웨덴, 덴마크, 스페인, 프랑스, 벨기에). 특별히 벨기에의 적대국이거나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역(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터키)은 애초에 초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8년의 공백 기간 축구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두었다. 전쟁의 기간 축구는 오히려 더 빨리 보급되었고, 유럽의 각 국가들은 자국의 축구 협회와 리그를 통해서 착실하게 성장하였다. 또 프로화도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8년 만에 세계 축구의 챔피언을 결정하는 1920년 올림픽은 나름대로 많은 관심거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8년 전의 최강 군단 영국과 덴마크가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다크호스가 등장할 것인지도 상당한 관심거리 중 하나였다.

특별히 이번 올림픽에서는 비유럽국가가 처음으로 참가한 대회로 기억된다. 아프리카의 이집트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독립한 유고슬라비아와 체코슬로바키아가 참가를 신청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축구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남미, 깊은 잠에 빠져있는 아시아는 여전히 올림픽 축구에 참가하지 않고 있었다.

영국과 덴마크의 초반 탈락

개최국 벨기에와 프랑스가 첫 번째 라운드(16강)를 부전승으로 통과하였고, 나머지 12팀이 첫 번째 라운드를 진행하였다. 첫 번째 라운드에서는 8년 전 우승국인 영국과 준우승국인 덴마크가 탈락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대영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한 영국은, 8월 28일 노르웨이와 16강전을 치렀다. 노르웨이의 올림픽 성적은 2패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제2회 대회에서 덴마크에 0-7, 패자부활전에서 오스트리아에 0-1로 패한 전적을 갖고 있었다.

그동안의 성적이나 객관적인 전력으로 모두 영국이 쉽게 노르웨이를 제압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노르웨이는 Gundersen(2골), Wilhelms(1골)의 활약으로 Nicholas가 한 골을 넣은 대영제국을 3-1로 꺾는 이변을 낳았다.

다른 한편, 전통의 강호 덴마크는 올림픽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스페인을 상대로 경기를 펼쳤는데, Patricio에게 한 골을 빼앗기고 0-1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덴마크는 이 경기를 끝으로 1948년 올림픽까지 본선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신생국 체코슬로바키아의 돌풍과 실격

체코슬로바키아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새롭게 독립을 이룩한 나라였다. 국가가 탄생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이전에도 보헤미아라는 이름으로 축구 협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등 축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국가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첫 번째 라운드(16강전)에서 같은 신생국가 유고슬라비아와 8월 28일에 경기를 치렀다. 이 경기에서 Janda(3골), Vanik(3골), Sedlaček(1골)의 활약으로 유고슬라비아를 7-0으로 격파하며 8강에 진출하였다. 다음날(8월 29일), 영국을 격파하고 올라온 노르웨이와 경기를 치른 체코슬로바키아는 Janda(3골), Vanik(1골)의 활약으로 4-0의 승리를 거두었다. 준결승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Mazal(3골), Steiner(1골)의 활약으로 Boyer가 한 골을 만회한 프랑스를 4-1로 격파하며 결승에까지 진출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공격력은 세 경기에서 15득점, 1실점이라는 놀라운 기록이 보여주듯이 참가팀 중에 최고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내친김에 우승도 바라고 있었다.

막강한 공격력의 체코슬로바키아와 개최국 벨기에가 9월 2일, 3만 5천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최후의 승자를 가리기 위해 경기를 치렀다. 이날 경기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0-2로 뒤진 상황에서 심판의 편파판정에 항의하며 경기를 포기해 버렸다. 벨기에와 체코슬로바키아의 결승전 심판은 영국인 John Lewis였는데, 당시의 나이는 72세였다.

체코슬로바키아로서는 벨기에가 준결승에서 네덜란드를 이긴 것도 그 당시 심판이었던 John Lewis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회 조직위원회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항의보다 개최국 벨기에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는 실격당하고, 은메달조차 박탈당하였다.

개최국 벨기에의 우승

개최국 벨기에는 비록 판정의 논란이 있었지만 올림픽 정상을 정복하였다. 벨기에는 첫 번째 라운드를 부전승으로 통과하고 준준결승에서 덴마크를 1-0으로 물리치고 올라온 스페인을 상대로 Coppee가 세 골을 넣으며 3-1로 승리를 거두었다. 준결승에서는 이웃나라 네덜란드를 상대로 Larnoe, Van Hege, Bragard가 한 골씩 넣으며 3-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축구가 시범경기로 치러진 1900년 제2회 파리 올림픽에 비록 국가대표는 아니지만 참가한 적이 있었던 벨기에의 축구는 1904년 5월 1일, 프랑스와 처음으로 국가대표 경기를 치른바 있다(3-3). 그 이후 벨기에의 축구는 착실하게 성장하였고, 결국 1920년 자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맞이하여 우승을 차지하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하였다.

2-3위 결정전

결승전에서 체코슬로바키아가 실격패를 당하고, 3-4위전에 참가해야 할 프랑스마저 경기를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가자, 2위와 3위를 결정하는 방법에 대해 대회조직위원회는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남아있는 네덜란드와 이미 진행 중이던 패자부활전의 승자가 2-3위를 결정하는 경기를 치르는 것이다.

패자부활전에서는 스페인이 스웨덴을 2-1, 이탈리아를 2-0으로 누르고 최종 승자로 결정되었고, 9월 5일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2-3위 결정전을 치르게 되었다. 이 경기에서 스페인이 네덜란드를 3-1로 꺾으며 2위(은메달)를 차지하였다. 네덜란드는 세 번 열린 올림픽에서 매번 결승 문턱에서 좌절하며, 세 번 연속으로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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