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순교'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생각한다
순교와 희생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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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들의 피 값으로 세워진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기록들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이렇게 편하게 교회에 다니며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만약 내가 그 당시의 시대를 살았다면 고문이나 죽음이 두려워서 일찌감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최후의 명령은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의 교회를 예수님께서 보신다면, 먼저 우리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라는 말을 제일 먼저 하실 것 같습니다. 올바른 기독교인이 먼저 되어야 땅 끝까지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교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선교라는 인간의 활동을 통해서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수행한다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선교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인간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동역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가 세계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순교자가 생겼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행동인 순교는 기독교의 최고의 덕목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도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종교에서 죽음을 최고의 덕목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전능한 절대자라면 구태여 피조물인 인간의 피를 원하실까?
엔도 슈사꾸의 <침묵>이라는 소설을 보면 자신이 배교하지 않으면 자신을 따르는 많은 일본의 기독교 신도들을 고문하고 살해하겠다며 위협하는 상황 속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주여, 긴긴 세월 동안 나는 수없이 당신의 얼굴을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이 일본에 오고 나서는 더 한층 나는 그랬습니다. 도모기 마을에 있는 산에 숨어있을 때, 산속을 방황했을 때, 그리고 저 옥사에서 밤에 당신이 기도하시고 있는 얼굴을 기도드릴 때마다 생각하고, 당신이 축복하고 있는 얼굴을 고독할 때 생각해내고, 당신이 십자가를 짊어진 얼굴을 체포된 날에 다시 생각하고, 그리고 그 얼굴은 나의 영혼에 깊게 새겨져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귀한 존재가 되어 나의 가슴에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나는 이 발로 밟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부는 발을 들었다. 발에 저린 듯한 무거운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겨진 것을 밟는 것이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 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닭이 멀리서 울었다.
[엔도 슈사꾸, 침묵 中에서]
엔도는 등장 인물의 말을 빌어서 '만약 예수라면... 그도 배교했을 것이다'라는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분명 순교라는 단어는 종교적인 용어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 종교적인 용어가 사회, 정치적으로 무분별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순교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순교란 기독교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행동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이 먼저 순교라는 단어를 너무 남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순교는 기독교의 덕목 중에 최고의 덕목 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순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순교는 예수의 복음을 위한 것이었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야말로 순교자로 선택된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이 믿는 신앙을 위해서 끝까지 굴하지 않는 용기와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그러했듯이)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줄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을 품고 있어야 순교자로 선택될 수 있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고리타분하게 ‘순교’라는 용어를 가지고 트집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할 정도로 오늘날 기독교는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선택받은 자만이 순교자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교’라는 용어는 너무 남발되고 있습니다. 전후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적으로 죽은 사람에게 무조건 ‘순교’라는 용어를 적용해왔습니다.
종교나 예수를 위한 죽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교자로 부릅니다. 이러한 무분별한 용어의 사용이 오늘날 기독교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행동하면서 그것이 바로 예언자적인 활동이고 순교자적인 행동이라고 감히 주장을 하는 원인의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학법 개정에 대하여 ‘순교의 정신’을 들먹입니다. 정부가 사학법 개정을 통해서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확대 해석하면서 순교의 정신으로 끝까지 투쟁한다고 합니다.
이라크에서 저항세력에 의해서 살해당한 김선일 씨의 경우도 순교라고 합니다.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의해서 납치되어 살해되는 경우도 그들이 기독교인이라면 순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김선일 씨는 순교한 것이 아니라 무고하게 희생당한 것입니다. 순교와 희생은 엄밀히 구분해야 합니다. 비기독교인은 이러한 용어의 선택에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기독교인이라면 용어의 선택에 있어서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분들에게도 ‘순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기독교적으로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이들이 납치되고 고통을 당하고 일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한 것은 국제 정치관계에 의해서 무고하게 희생을 당한 것이지, 순교가 아닙니다. 종교적인 용어를 정치적인 국제관계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만약 피랍된 사람들이 정정당당하게 아프가니스탄에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를 목적으로 간 것이고, 자신들을 억류하고 있는 이슬람 과격 단체를 향해서 끝까지 기독교를 전하고 예수의 복음을 전하려고 하다가 죽었다면 그들은 순교한 것이 맞습니다.
순교할 각오를 하고 아프가니스탄에 간 것과, 순교는 다릅니다. 지금의 상황은 온 국민이 그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고 있고, 샘물교회측도 그들이 선교를 목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고, 그들 역시 지금의 상황 속에서 ‘당신들이 믿고 있는 이슬람을 떠나 우리가 믿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은 상식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억류하고 있는 탈레반이 그들에게 기독교를 버리고 이슬람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들이 상상 이상의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그들이 무사히 귀한할 수 있도록 함께 합심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종교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 인도주의적인 정신으로 그들이 무사하게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 마땅히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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