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 역사는 포기했나?
드라마 <이산>, 재미있어서 보고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산을 보면서 역사에 대한 검증은 포기했다. 역사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라면 어느 정도 역사적인 내용에 대한 검증이 필요한데 <이산>은 그야말로 당시 역사의 인물의 이름만 차용하고, 그 인물들이 걸어간 역사의 길은 마음대로 갖다 붙이고 있다.
조선시대의 중흥기를 열었던 영조와 정조의 시대를 그리는 <이산>은 과거 <주몽>이나 <태왕사신기>의 역사왜곡 문제와는 별개로 더욱 심각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주몽>은 고구려 건국에 대한 이야기로 고대사의 사료가 그다지 많지 않았고 ‘퓨전 사극’을 표방하면서 시작된 역사 드라마였다. 그리고 <태왕사신기>는 출발부터 판타지였기 때문에 역사 왜곡의 문제는 조금 다르게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산>은 ‘퓨전’도 아니고 ‘판타지’도 아니다. 사료도 엄청나게 풍부한 시대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등장인물이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를 <주몽>이나 <태왕사신기>보다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산>을 제작하는 이병훈 PD는 그야말로 MBC가 자랑하는 흥행제조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를 통해서 <이산>은 시청자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받고 있다.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에 드라마에 몰입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정도로 이야기의 전개는 나무랄 데 없어 보인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산>은 역사 드라마이다.
<대장금>이나 <다모>와 같이 가상의 인물이 역사 속에서 활약하는 방식의 드라마에는 자유스러운 극의 구성이 가능하다. 이러한 자유도는 가상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가상적인 상황 설정이 가능했던 <허준>에서도 가능했다. 그런데 <이산>은 역사적으로 조선의 임금이 된 이산(정조)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제작진인 이병훈 사단은 <이산>에서조차 과거 자유스러운 극의 전개 방식을 선택했다. 그 결과 드라마의 재미는 건졌지만 역사적 사실에는 상당한 거리감이 생기게 되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이나 그 당시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인물은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의 동생인 홍인한이었다. 그는 역사적으로 1776년 1월에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영조의 의중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다. 당시 좌의정인 홍인한은 “동궁은 조정 논의를 알 필요도 없고 인사 문제를 알 필요도 없으며, 국사는 더욱 더 알 필요가 없습니다”라며 반대하고 나설 정도로 세손을 반대하는 노론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런데 드라마 <이산>에서는 노론 벽파 세력에서 줏대 없는 인물로 그려졌으며, 세손이 왕위에 오를 분위기로 진행되자 혜경궁 홍씨를 찾아가서 비굴하게 살려달라고 간청하기도 했으며, 결국 세손에게 반기를 든 혐의로 잡혀와서는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못난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다.
한편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억울했으며, 세손을 음해한 세력은 비록 숙부라고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강직한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는 훗날 <한중록>을 통해서 자신의 숙부인 홍인한이 억울하게 모함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서 완전 결백을 주장하기는 힘들다는 견해도 있다.
역사에 대해서 관심있게 살펴보고 찾아보는 사람이 아닌 이상, 역사 드라마를 보면서 어느 정도 선입견이 생기게 된다. 드라마 <이산>을 통해서 하나의 가능성으로 여겨지는 영조의 치매는 사실로 확정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치매가 단순히 기억 상실 증세로만 작용되는 독특한 증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로 그려진 것은 치매라는 병 자체에 대해서도 왜곡적으로 그린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결과적으로 정순왕후가 정조의 최대 라이벌이 된 것 같은 흐름이 있다고 하더라도, 영조에서 정조로 권력이 옮겨가는 과정에서 정순왕후가 그렇게 엄청난 우먼파워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도 당시에 조선왕조의 상식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다. 조선은 엄격한 유교의 나라였다. 비록 왕비라 할지라도 여성이 대신들을 쥐락펴락하는 위치에 있었을까? 물론 정순왕후가 보여준 카리스마(정조가 죽은 이후 권력을 장악한 것)를 보면 가능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방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역사 드라마를 통해서 역사적인 상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시청자들은 무의식적으로 드라마를 보면서 당시의 역사적 현실도 드라마와 같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특히 한번 보기 시작하면 몰입하는 매력을 갖고 있는 드라마는 더욱 그러하다. 제작진은 시청자들을 위해서 자막으로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올바르게 알려주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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