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선개헌 반대운동과 유신독재의 성립

 


대한민국의 1960년대는 4·19혁명으로 시작하여 3선 개헌으로 끝난다. 전자가 민주주의의 새 출발을 알리는 희망찬 행진곡이었다면 후자는 저 어두운 70년대 민주주의의 죽음을 예고하는 우울한 장송곡이었다. 박정희 정권 8년 만에 어렵게 소생한 이 땅의 민주주의는 그렇게 고사하고 말았다.


69년 1월7일 공화당 의장서리 윤치영이 대통령 두번 연임까지만 허용한 현행 헌법에 문제가 있다면 헌법을 개정하는 것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했을 때 이미 이 나라 민주주의의 비극적 운명은 결정되고 말았다. 계속되는 개헌 주장에 대해 박정희 본인은 아니라고 부인하였지만,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면서 혁명 과업이 완수되면 군 본연의 자세로 복귀하겠다고 공언해 놓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은 박정희의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69년 6월12일 서울대 법대생 500여명이 헌정수호 서울법대 학생총회를 개최하여 “여하한 개헌 추진 음모도 분쇄하겠다”며 3선 개헌 반대 운동의 봇물을 텄다. 이후 전국의 각 대학에서 성토와 시국선언대회가 연일 계속되었고 7월1일 8,000여명, 7월2일에는 6,000여명의 학생이 거리로 진출하여 경찰과 유혈 충돌하면서 학생들의 데모는 정점에 달하였다. 그러나 연일 계속되던 데모도 7월8일까지 전국 29개 대학이 조기 방학에 들어가면서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방학은 학생운동의 가장 큰 취약점이었다.


이때의 학생운동은 그 역량이 몇몇 대학에 한정되어 있었다. 서울대 문리대·법대, 고려대, 연세대, 경북대, 전남대 등이 학생운동의 거의 전부였고 데모도 대략 그 순서대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운동 역량도 작아 전국적으로 몇십명 정도만 발을 묶으면 데모는 이내 소강상태에 빠졌다.


일단 학생운동을 잠재우는 데 성공한 박정희는 7월8일 드디어 본심을 드러냈다. “개헌안이 발의되면 적법한 절차에 회부하겠다. 찬반은 국민의 자유의사다”라며 3선 개헌의 추진을 사실상 시인한 것이다. 여름방학이 끝나면서 학생들의 데모도 다시 시작되었으나 정부는 휴강 조치로 맞서 개헌안 국회 표결 전날인 9월13일까지 전국에서 33개 대학이 휴강 상태에 들어갔다. 대학은 문을 닫은 채 9월14일 새벽 국회 제3별관에서 개헌안이 날치기 통과되고, 10월17일 국민투표에서 확정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3선 개헌 반대운동의 실패는 학생들에게 큰 좌절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학생들은 철저한 자기반성을 시작하였다. 운동의 과학화·조직화가 강조되면서 후진국사회연구회, 한국사회연구회와 같은 이념 서클이 조직되었다. ‘자유의 종’ ‘전야’와 같은 지하 선전물도 제작 배포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기층 민중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학생운동은 지식인운동에서 민중운동으로 도약을 모색하고 있었다.


71년이 되면서 박정희는 아예 차제에 장기집권의 가장 큰 장애물인 학생들을 병영 안에 가두어 두려고 나섰다. 71년 1월27일 문교부는 대학 교련 교육의 대폭적인 강화를 발표하였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대학을 병영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의 말대로 “민족안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정권안보”를 위한 것이었다.


71년 3월 신학기가 시작되자 학생들은 교련 수강신청을 전면 거부하면서 연일 교련반대 성토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열기를 이어 4월14일에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경북대, 전남대 등 전국 12개 대학 학생들이 모여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회장 심재권)을 결성하였다. 4월 중순 교련반대 시위의 열기는 정점에 달하였다. 4월27일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김대중을 94만표 차로 누르고 승리하자 5월부터 학생들의 이슈는 이제 부정선거 규탄으로 바뀌었다. 5월17일 서울대생 27명이 신민당사에 몰려가 “일당 독재의 파쇼정권만을 위한 5·25 총선을 즉각 거부하고 민주수호 대행진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자 정부는 27명 전원 구속을 지시하면서 강경 방침을 천명한다. 5월28일 서울대에 휴업령이 내려지고 이호웅·심재권 등 주동학생들이 제명당하면서 대학은 곧 방학에 들어간다.


71년 2학기 학생들의 데모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10월5일 새벽에 발생한 무장군인들의 고려대 난입 사건이었다. 고려대생들이 제시한 부정 축재자 명단에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던 윤필룡 소장이 포함된 것에 감정을 품은 수경사 헌병대 소속 군인 22명이 무장한 채로 고려대에 난입하여 도서관에서 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 연행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학원가는 연일 격렬한 시위에 휩싸였다. 10월13일 서울대 등 전국 14개 대학 학생회장단이 문리대에 모여 고려대 군 난입 규탄, 부정부패 원흉 처단 등을 요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한 후 14일에는 전국학생연맹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운동을 전국적으로 조직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회의 장소를 급습하여 주요 학생운동 지도자들을 연행한 데 이어 15일에는 마침내 위수령을 발동하여 군 병력을 서울대, 고려대 등 7개 대학에 진주시키고 8개 대학에 무기한 휴업령을 내렸다. 이후 전국 23개 대학에서 주동 학생 177명이 제적과 동시에 강제 입영당하고 7개 대학에서 ‘후진국사회연구회’ 등 이념 서클 74개가 해체되었으며 5개 대학에서 ‘자유의 종’ 등 지하신문 14개가 폐간당하는 등 학생운동권은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3월부터 11월까지 전국에서 300여회에 걸쳐 연인원 6만5천여명이 참가한 교련반대 투쟁은 이로써 막을 내린다.


학생들의 저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박정희는 고문과 같은 야만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71년 당시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이었던 이호웅은 4월 대통령선거 직전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었다. 지하실로 끌려가자마자 무자비한 구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는 발가벗긴 채 “너 이 새끼, 김일성이 만났지?”. 아니라고 하면 얼굴에 수건을 덮고 물을 부었다. 그 다음날은 “김대중 만났지?” 하고 또 물고문. 무엇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고문으로 인간적인 모멸감과 공포를 주어 운동을 포기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서약하고서야 일주일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문도 민주화운동에 대한 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한동안의 방황과 고민 끝에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 데모 현장에 섰고, 그 길로 지명수배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처음에는 낭만적이었던 활동가들도 점차 투사로 단련되어갔다. 그리고 학생운동도 박정희 독재의 종식과 새로운 민주사회 건설이라는 분명한 자기 목적을 갖게 되었다. 이제 운동은 박정희 독재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60년대의 낭만은 사라졌고 인간을 억압하고 말살하는 박정희 독재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80년대 소위 운동권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되었다.


총칼로 학생들의 저항을 진압한 박정희는 12월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그리고 당시는 정권 내 극히 일부만이 알고 있었지만,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한 시나리오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마침내 72년 10월17일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10월유신이 선포되었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피로 물리친 지 고작 10년을 조금 넘겼는데 또 다시 박정희의 1인 영구집권 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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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3년 05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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