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賊’의 시인 김지하
1961년 5월16일, 박정희가 탱크를 앞세워 한강을 넘어서자 함석헌은 즉각 이를 군사 쿠데타로 규정한다. “대낮에 정정당당하게
걸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야밤에 군인들이 총칼을 앞세워 서울에 진입한 것”이므로 명백한 범죄 행위라고 꾸짖은 것이다. 실로 통렬한 양심적 지성의
한 발현이었다. 그렇다! 박정희와 그를 추종하는 군부 소장파 장교들은 분명 ‘역천(逆天)의 무리’였다.
당연히, 총칼로 장악한 절대 권력은 빠르게 부패했고 그들이 야심에 차서 진행한 공업화와 조국 근대화 정책은 대다수 농민과 도시
빈민, 노동자들의 삶을 황폐화시키며 예속성이 강한 천민자본주의의 그로테스크한 양상을 심화시켰다. 그러나 지상에는 이미 젊음의 눈으로 역사를
목도한 영혼들이 있었으니, 군인들이 짓밟은 4·19정신은 땅 속에 묻혀 군부독재의 억압을 밀어내는 저항의 독트린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박정희의 초법적인 독재가 10년 가까이 계속되던 69년 10월, 서울에서 광주로 한 통의 편지가 발송된다. 발신자는 김지하였고,
수신자는 김준태였다. 두 사람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문예지에 시를 투고해서 이제 막 딱지를 뗀 신인들이었다. 이후 이 문단 초년병들이 주고
받은 10여 차례의 편지는, 행간에 문단 거인들에게나 있을 법한 모색과 폭풍전야의 긴장을 담고 있었다. 편지는 한결같이 격정적인 어조로
이어졌고, 도드라지는 어휘는 놀랍게도 ‘민예’와 ‘저항’이라는 단어였다.
“민예 속에서 ‘저항의 형식’은 혈통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 길만이 모든 문제의 관건입니다. 그러나 민예가 가진 일정한 한계를
뛰어넘어서야 하며, 뛰어넘어서는 길은… 오늘날의 사회 현실, 모순과 질병, 고통과 항쟁, 비판과 투쟁, 좌절과 비애 등을 역동적으로 표현하는
방향에서 열립니다”(70년 3월8일자)
당시의 분위기에서 이 편지가 공개되었다면 눈여겨볼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혈기왕성한 한낱 문학청년들의 미학적 열정이 장차 한국
사회를 어떤 곳으로 끌고갈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70년대를 거쳐 80년대에 꽃을 피운 ‘저항’과 ‘민예’는 문학과
미술은 물론 연극과 마당극 등의 연행예술, 대중음악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퍼져나갔으며, 대학가와 노동자들의 사업장, 그리고 모든 시위 현장에서
일반화된 양식이 되어갔다.
김지하의 인식은 하나의 거대한 미학적 프로젝트이자 민주화 운동의 설계도였던 셈이다. 그의 초기 서정시 ‘황톳길’은 물론 군사정권과
첨예하게 대립했던 ‘오적’과 그밖의 담시들 역시 이같은 맥락을 고스란히 담보하는 것들이다.
‘사상계’ 70년 5월호에 발표한 담시 ‘오적’은 박정희 정권과 민주세력간에 목숨을 건 대투쟁의 발화점이자 철권통치에 저항하는
실천정신의 상징이었다. ‘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차관, 장성 등 당대의 지배계층을 장악하고 있던 주류들의 타락과 부패상을
통렬하게 풍자한 작품이다. 이 시는 유신에 반대하는 반체제 전선 최초의 불꽃이었다. 이 시로 인해 김지하는 반공법 위반으로 70년 6월20일에
구속되었다가 9월8일 보석으로 석방되는데 이는 박정희가 군 내부의 친위 쿠데타로 쓰러질 때까지 장장 20여년에 걸쳐 계속된 민주 대 반민주,
독재 대 반독재 투쟁의 서곡이었다. 71년 8월부터 천주교 원주교구청 기획위원으로 근무를 시작한 김지하는 다음해인 72년 3월 가톨릭 종합잡지
‘창조’ 4월호에 담시 ‘비어’를 발표해 다시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되었으나 감옥 대신 마산국립병원에 폐결핵으로 강제 입원된다.
유신을 통해 영구 집권을 노리는 박정희 군사독재의 폭압을 향해 지탄(紙彈)을 쏘아대며 단기필마로 대응해가는 김지하의 순결한 시정신과
전태일의 분신은 이 땅의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태풍이 되어가고 있었다. 김지하는 73년 11월5일 천관우, 주교 지학순, 목사
김재준 등을 비롯한 15인의 이름으로 유신체제 철폐를 위한 ‘민주회복을 위한 시국선언문’을 발표한 뒤 6개월여의 잠행에 접어든다. 다음해인
74년 4월25일 친구 하길중의 영화 촬영 현장인 흑산도에서 체포된 김지하는 비상군법회의에서 긴급조치 1, 4호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시국선언문뿐만 아니라 소위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한 배후조정 및 내란 선동 혐의가 그를 사형이란 극한 상황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형
선고는 김지하에게 또 다른 지평을 열어주었으며 당대의 지성들에게 천둥 같은 예언과 용기를 쏟아붓는 힘이 되었다.
감옥 안에 있는 김지하의 고통과 절망은 당대의 반체제 전선에 힘을 공급하는 에너지원과 같았다. 부당하고 불법적인 국가권력과 당당하게
싸워나가는 옥중의 김지하는 이 땅에서 올바른 가치와 자유를 실천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끝없이 환기시켰다. 그의 기나긴 옥중 투쟁은
종속적 근대와 분단, 그리고 군부독재를 해체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드디어 74년 그의 사형 선고를 기점으로 지하에 뿌려진 민주의
씨앗에서 싹이 터 지상으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열망이 지식인과 노동자, 농민 등 전 계층으로 번져가며 조직적
저항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학생과 교수, 종교인, 언론인 등이 이 태풍의 동반자들로 합류하기 시작했다.
김수환·윤보선·김대중·함석헌·윤형중·양일동·김영삼·장준하·지학순·김재준·문익환·천관우·리영희·백낙청·황석영·신경림·고은·김병걸·염무웅·임재경…,
빌리 브란트·사르트르·노먼 베일리 등등 김지하가 일으킨 태풍의 단순한 연보만 따라가도 그와 관계된 국내외 인사들을 다 열거할 수 없다. 그것은
거대한 흐름이자 경이로운 시대의 벽화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정치·교육·출판·언론·종교·예술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지식인 운동을 격발시킨
그의 시, 아니 민예와 저항 정신은 그때까지 지속되던 문화적 패러다임 전체에 충격을 줄 만큼 매혹적이었으며 동시에 강한 미학적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었다.
‘지식인적 자기 검열(?)’이 전혀 없는 김지하의 순결한 분노와 실천은 미학적으로 민예의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둔 것이면서 동시에
근대의 천박한 물신화를 구원하는 역동성과 새로움을 지니는 것이어서 전염성 또한 강했다. 대학가에 탈춤패와 마당극 놀이패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은 각기 자신의 분야에서 큰 획을 그은 후라서 새삼스런 설명이 필요없는 사람들이지만 연극반 후배인 김민기·김명곤, 풍물과 탈춤
마당극을 소화한 채희완, 판소리의 임진택, 미술의 오윤·유홍준, 문학의 채광석·김정환(문학의 경우 그의 서울대 후배들뿐만 아니라 이 땅의 문청
전체가 그의 시정신의 괘적을 한번쯤은 답습해 보았다고 할 만큼 전면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등이 김지하의 서울대 후배들로 민예와 저항을 전도하는
미학적 전도사들이 되었다. ‘메아리’라는 민중가요집이 전국의 대학가로 퍼지면서 노래패들이 출현하는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이들의 출현은 민주화
투쟁의 격렬한 현장을 미학적으로 지도하는 리더십을 발휘했으며, 관변 예술로 박제화돼 형태만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민예의 형식을 강력한
양식으로 부활시켜 놓았다. 이런 민중문화운동의 전개는 오늘의 민족예술인총연합을 탄생시킨 모태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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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적’ 아이디어서 출간까지 조력
“당시 ‘사상계’는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광고를 거의 싣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지하의 시를 실은 거죠”. 폐병을 앓던 무명의
청년 시인 김지하를 일약 저항의 상징으로 만들어준 ‘오적(五賊)’ 필화사건. 33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통쾌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권력층과
부유층을 통쾌하게 풍자한 ‘오적’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에는 숨은 조력자가 많았다. 특히 ‘사상계’ 편집 책임을 맡고 있던
김승균(63·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은 김지하에게 ‘오적’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장본인이다.
‘사상계’ 1970년 5월호 주제를 5·16쿠데타로 잡은 김승균은 1970년 3월 초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김지하에게
‘오적촌’이라 불리던 동·서빙고동에 관한 장시를 청탁했다. ‘구악(舊惡)을 청산하겠다’던 쿠데타 세력이 오히려 신악(新惡)으로 등장했다는 판단
때문이다. 김지하가 이를 수락하고 얼마 후 원고를 가져왔지만 우여곡절의 시작일 뿐이었다.
먼저 풀어야 할 숙제는 잡지사 내부에 있을지 모를 반발. 김승균은 “원고를 읽어보고 매우 만족했지만 읽어보지 않은 것처럼 부완혁
사장 책상에 올려 놓았다”고 한다. 김승균은 이미 학생운동으로 두번 투옥된 경력이 있었던 만큼 ‘또 무슨 일을 꾸민다’고 의심을 받을지 몰랐고,
자신이 먼저 읽어보고 칭찬하면 글에 관한 한 자부심이 강한 부완혁이 트집을 잡을 수도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김지하와도 처음 만난 것처럼
행세했다. “점심을 먹고 와 보니 부사장이 원고를 보며 킬킬대고 있더군요. 속으로 ‘됐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두번째는 인쇄상의 어려움. 김지하는 오적이 짐승에 가깝다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평소 잘 쓰이지 않는 한자들을 많이 썼다. 인쇄소에
필요한 활자가 없어 기존 활자를 쪼갠 뒤 조합해서 찍어야 했다.
5월호가 나간 뒤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그대로 지나가는가 싶더니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기관지 ‘민주전선’이 이 시를 전재하면서
사건은 커져버렸다. 결국 김지하와 김승균, 부완혁, 민주전선 편집국장인 김용성이 구속되고 발행인 유진산도 조사를 받으면서 “‘오적’이
‘신오적’을 만들었다”는 말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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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3년 0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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