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승리 이정표, 함평 고구마 사건

 


밤을 지새고 나와 보면 도로변에 쌓아둔 고구마 더미 위에 서리가 하얗게 내려 김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구마는 썩어갔다. 농민들의 분노와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고구마는 농민의 인권이다. 이런 기회에 수매약속을 어긴 농협을 혼내줘야 한다”고 말하는 농민도 있었고, “설마 이제까지 기다렸는데 농협이 거짓말하겠는가”라며 아직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농민도 있었다. 함평군은 전남에서 해남, 무안군과 함께 고구마 주산지로 1976년에는 예년보다 많은 2만5천여t의 고구마를 생산했다. 당시 농협에서는 이를 전량 수매하겠다고 고구마가 한창 자라기 시작할 무렵인 7월부터 농민들에게 널리 선전하고 확약했다. 농협이 수매가를 포당(15관) 2등품 기준 1,317원으로 고시했기에 농민들은 가격이 좋은 농협수매만을 기다렸다. 그래서 농민들은 출하 시기인 11월이 되어도 예년처럼 현지로 직접 고구마를 사러오는 상인들에게 팔지 않았다.


그러나 상인들의 얘기는 달랐다. “두고 보시오. 올해 고구마 값이 떨어집니다. 신한제분이나 진로소주 같은 회사들이 이미 외국에서 주정원료를 수입해왔기 때문에, 농협이 약속대로 고구마 수매를 할지, 안 할지 모릅니다”


실제로 이곳 고구마는 대부분 주정원료로 사용되고 있었다. 상인들은 포당 1,100∼1,200원까지 주겠다며 팔라고 했지만 농민들은 들은 체도 안했다. 농협의 수매 약속만을 철석같이 믿은 농민들은 별다른 저장대책도 없이 그저 농협에서 나누어준 수매용 포대에 고구마를 담아 운송하기 편리한 도로변에 쌓아두었다. 그러나 농협에서는 산발적으로 일부 소량만을 수매해 가며 ‘오늘 실어간다, 내일 실어간다’ 말만 할 뿐 고구마가 썩어갈 지경인데도 수매해 가지 않았다. 이렇게 상황이 심상치 않자 농민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농민들이 농협으로 가서 고구마를 사가라고 아우성치는 소동이 벌어졌고, 농협에서는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느니, 주정회사에서 안 사가니 할 수 없다는 등 무책임한 답변으로 일관했다.


야적한 고구마가 썩기 시작하자 농민들은 이제 앞을 다투어 상인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제값을 받고 못 받고는 이미 문제가 되지 않았다. 썩기 전에 한푼이라도 더 건져야겠다는 생각에서 마구 헐값이라도 팔아넘겼다. 결국 한 포대에 400원을 받고 팔기도 했다.


농민들은 당시 유일한 농민운동단체인 가톨릭농민회를 중심으로 조직적인 피해보상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함평에는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총무로 있던 서경원씨와 후임 총무를 맡을 노금로씨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해 11월17일 ‘함평고구마피해보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피해조사부터 시작했다. 대책위원회가 함평군에서 가장 피해가 큰 4개면 1개읍 9개마을 160농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농협이 고시가격대로 수매를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초래된 손해가 약 2백80만원이고, 수매를 기다리다 썩혀버린 고구마 양이 223포대에 달해 직접적인 총 피해액은 3백9만원으로 집계됐다.


대책위원들의 피해조사가 진행되자, 함평군 농협은 단위조합 직원들을 시켜 피해농가를 찾아다니며 ‘본인이 생산한 생고구마는 본인의 영농 형편상 상인에게 판매하였으며, 대금은 ○월○일 전액 수령하였으므로 농협 기타 관계기관에 대해서는 하등의 이의가 없음을 확인함’이란 이른바 ‘확인증’이라는 것에 날인을 받게 했다.


해를 넘겨도 문제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는 77년 4월22일 광주 계림동성당에서 ‘고구마 피해보상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했다. 600여명의 회원들이 모인 가운데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의 집전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나서 농협 전남도지부장을 면담하기 위해 거리행진에 나섰다. 그러나 경찰이 차단하는 바람에 각자 흩어져 농협도지부에 재집결하여 도지부장 면담요구 연좌농성을 했지만, 이 역시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당하고 몇몇 대표들만 도지부장과 면담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도지부장은 “중앙회와 농수산부에 보고된 사항으로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만 말했다. 이튿날 대책위원회 대표들이 전남도지사를 방문했으나 역시 “이미 농수산부에 보고가 올라가 직접 현지조사단이 오기로 했으니 조사결과를 기다려 보자”는 말뿐이었다.


당국과 가톨릭농민회간의 줄다리기는 계속되었다. 급기야 사건 발생 2년째인 78년 4월24일, 광주시외버스터미널 앞 북동성당에서 다시 ‘농민을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이번엔 전국 각지에서 700여명의 회원들이 참석했고 가두진출을 시도하며 기동경찰과 대치했다. 밤이슬을 맞으며 철야기도로 날을 샌 다음날인 4월25일 점심부터는, 경찰봉쇄 속에서 최후의 수단이자 최강의 무기인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이날 돌아갈 사람들과 단식투쟁에 남을 사람이 서로 마주보며 한쪽은 단식으로, 한쪽은 밖에 나가 싸울 것을 다짐하는 순간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결사단식에 돌입한 60여명은 시위와 농성으로 목이 쉬고 몸은 지쳐 있었지만 각오는 비장했다. 경찰은 가마니를 펴고 머리띠를 두른 채 농성하는 광경을 시민들이 보지 못하도록 성당 정문을 버스 2대로 가로막고 신자들의 미사 참여마저 봉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시민들의 뜨거운 정이 담긴 격려품이 속속 들어왔고, 밖에서 지원활동을 하던 문익환, 황석영씨 등 각계 인사들이 담을 넘어 찾아와 격려했다. 단식 3일째를 맞은 4월27일 단식자들은 먹는 이야기를 더욱 자주 하곤 했으나 결의는 더욱 굳어가고 있었다. 특히 서경원씨의 입담은 좌중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어 배고픔을 잊게 해주고도 남았다. 이날 광주YMCA회관에서 열린 인권기도회 참가자들 중 200여명이 단식현장으로 오다 기동경찰에 해산당했고, 물품조달을 위해 잠시 나갔던 이상국, 조봉훈씨가 연행됐다. 농성자들은 경찰이 강제해산할 것 같은 조짐을 느끼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 밤을 새웠다. 단식 5일째인 4월29일 단식농성자 중 5명이 쓰러져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 양림교회에서는 기도회를 열어 단식투쟁을 지지해주었다. 이날 도지사로부터 ‘3백9만원이 현금으로 준비되었으니 전달방법을 알려달라’는 연락을 받고, 곧 ‘피해농가 임정택 외 159농가 귀하’로 되어 있는 농협의 ‘피해보상금 지불증’과 함께 현금뭉치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운동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단식 중에 연행된 이상국, 조봉훈씨가 석방되지 않아 단식은 계속되었다. 5월1일 전국에서 모인 40여명의 신부와 각계 인사 500여명이 남동천주교회에서 특별기도회를 열었다. 조비오 신부는 구속 중인 춘천의 유남선, 정성헌씨의 조속한 석방과 농민회 탄압을 즉각 중지할 것을 촉구했고, 또 그 자리에서 문익환 목사의 제의로 ‘전국농민인권위원회’를 결성하여 이종창 신부를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결국 연행되었던 이상국, 조봉훈씨 두 사람이 5월2일 석방되면서 단식농성은 승리로 끝을 맺었다. 그들은 수건과 칫솔 등을 치마 밑에 숨겨 갖다주며 단식현장에 찾아와 눈물을 흘리던 아주머니, 할머니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함평 고구마 사건은 전국적으로 알려져 여론화되었기 때문에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보상은 함평군 내 피해농가 모두의 것이 아닌, 끝까지 권리를 포기하지 않은 회원들만의 것이었다.


5월6일 감사원은 ‘전남·북, 경남·북 지역 일부 단위농협이 주정회사나 중간상인들과 결탁하여 76년과 77년 2년 동안 고구마를 농민에게 수매한 것처럼 위장 또는 조작하여 농협자금 약 80억원을 유용한 사실을 밝혀내어 모두 659명의 농협 직원을 인책 징계토록 조치했다’고 발표했다. 함평 고구마 사건은 당시 관제 농협의 부조리한 실상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며, 생존권적 요구마저 물리력으로 억압하던 유신독재의 한 단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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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사건’ 당시 전남지사는 고건 총리

 


함평 고구마 사건의 주역들은 지금도 곳곳에서 왕성하게 시민운동에 몸담고 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당시 정부의 사과담화문 발표 주체였던 고건 전남지사는 그후 농수산부 장관 등을 거쳐 현재 참여정부의 국무총리로 일하고 있다.


투쟁을 주도한 서경원씨(66)는 당시 대동면 금산리에서 고구마 농사 등을 짓던 농부로, 농민운동의 선봉장이던 지역 가톨릭농민회(가농) 총무를 맡고 있었다. 그는 부인이 쌍둥이 아들을 임신한 사실조차 모른 채 7일간 단식투쟁하며 약속이행과 보상을 촉구했다. 이후 5·18 등 민주화투쟁에 몸바쳐 옥고를 면치 못했으나 시대가 바뀌면서 국회의원(평민당)에 당선, 한때 ‘밀입북사건’ 파문의 당사자가 됐다. 지금은 정계를 떠나 파병반대 촛불시위를 주도한 전국 한울타리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와 통일연대 고문 등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지난 10일부터는 전남 목포에서 출발, 광주~전주~대전~천안~서울까지 20일 일정으로 ‘이라크 파병 저지 국토 도보 민중행진단’ 행사를 벌이고 있다.


서씨는 “해방 이후 농민운동사에 획을 그은 사건”이라고 평가하며 “일개 군지역 농협의 부패사건에 정보당국까지 개입하고 정부까지 나서 사과를 하게 된 경위가 아직까지 상세히 밝혀지지 않은 것이 남은 과제”라고 말했다.


서씨의 후임 총무였던 노금로씨는 전국농민협회 사무국장을 맡은 뒤 군의원을 지냈다. 현재는 함평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데 ‘땅의 아들’이란 책을 출간해 화제가 됐다. 이상국씨는 땅과 식탁, 환경을 살리자는 운동에 매진, 현재 서울에서 ‘한살림공동체’ 전무를 맡고 있다.


당시 YMCA에서 일하며 투쟁에 가담했던 조봉훈씨는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남선씨는 이후 6월항쟁에 가담했으며 민통련 강원지부 의장, 국민운동본부 의장 등을 지낸 뒤 현재 춘천에서 살고 있다.


정성헌씨는 우리밀살리기운동을 주창했고 현재는 DMZ생명평화 마을조성 추진위원장과 남북강원도교류협력위원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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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장종택(출판인)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김정섭("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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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3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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