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밟히는 농민운동 ‘오원춘 사건’

 

 

안동농민회사태(세칭 오원춘 사건)는 영양 불량감자종자 피해보상운동을 성공적으로 주도한 오원춘(吳元春)의 납치 폭행을 둘러싸고 가톨릭교회와 유신정권이 정면 충돌한 사건이다. 그리고 당시 YH사건과 함께 전국적인 투쟁을 불러일으켜 부마항쟁과 10·26 박정희 피살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던 사건이다.


그러나 경북 영양군 일월산 속 청기마을 어느 한 평범한 농민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차고 고통스러운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대통령긴급조치 위반사건을 언론에 보도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던 상황에서 이 사건은 이례적으로 1979년 8월10일자 전국 각 신문에 사회면 톱으로 보도됐다.


경북도경은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이사이자 경북 영양군 청기면 분회장인 오원춘은 그해 5월5일부터 21일까지 포항 울릉도 등지를 개인적으로 여행했음에도 불구, 모기관원에게 납치돼 폭행 감금 또는 감시받았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했으며, 안동교구청의 정호경 신부는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의 명에 의해 오씨 납치사건을 조사, 유인물을 작성하면서 정부가 농민부흥을 짓밟고 농민을 천시하며 정당한 농민운동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하려 한다는 등의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왜곡된 설명문을 멋대로 날조 전파하여, 이들 두 명과 ‘짓밟히는 농민운동’이란 유인물을 배포한 안동시 거주 정재돈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 검찰에 송치했다”고 발표했다.


뿐만 아니라 8월13일 대구지검 서돈양 검사실에서, 또 8월22일에는 대구교도소장실에서 증인들까지 동원해 이례적인 기자회견까지 하며 여론재판을 진행했다. 이날 회견은 전국의 신문에 보도되었고, 8월23일 3개의 TV가 공동으로 제작 방영한 보도특집에는 논설위원들의 해설까지 등장했다.


1978년 경북 영양군 청기면 농민들은 군 및 농협에서 알선한 감자씨(시마바라)를 심었으나 싹도 나지 않는 바람에 감자농사를 망치고 말았다. 당시는 ‘관에서 권장하는 것을 안하면 최소한 망하진 않는다’라는 이상 신화가 유행하기도 했던 때였다. 함평 고구마 사건 해결 소식을 접하고 있던 가톨릭농민회 청기분회는 즉각 피해농민들과 함께 대책을 논의, 피해 상황을 조사해 당국에 피해보상을 요구했다. 그 결과 농민회원이 아닌 농민들은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으나, 회원들의 끈질긴 활동과 안동교구 사제단의 지원으로 생각보다 빨리 피해액 전액(7백여만원)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


사건은 이 보상운동에 앞장섰던 오원춘이 바쁜 농사철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날 행방불명된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행방불명은 영양천주교회의 야외미사에 오원춘이 참석하지 않은 것이 확인된 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정작 교회가 오원춘의 고백을 통해 공식적으로 알게 된 것은 납치에서 돌아온 지 20일이 지난 6월13일이었다.


오원춘은 희생을 각오하고 농민운동을 위해 다음과 같이 양심선언을 하였다. “본인은 79년 5월5일 영양 버스 정류장에서 정체불명의 두 사람으로부터 납치당해 안동을 거쳐 포항 모건물(포항제철 부근 잿빛 건물) 안에서 이유 모를 폭행을 당하고(체제에 반항하는 놈은 그냥 둘 수 없다며 폭행하였음) 울릉도까지 15일 동안 강제 격리된 상태에서 불안한 날들을 보낸 사실이 있어, 이를 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구성한 조사단과 농민회 조사단, 본당신부님께 하느님께 받은 양심에 의해 진술한 바 있습니다. 이 사실은 차후에 어떠한 일 있어도 ‘사실’이며, 만약 번복된다면 이는 외부적 압력이나 위협에 의한 강제적 결과일 것입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농민들과 함께 일하려는 나의 동료 형제들에게 또 다시 쏟아질지도 모르는 폭력과 압력 밑에서 주여! 작은 저희들을 지켜주소서. 영양 천주교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아래서. 1979년 7월5일”.


천주교 안동교구는 이를 덮어두는 것은 농민사목과 농민운동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여, 이 사실을 알리는 ‘짓밟히는 농민운동’이라는 문건을 제작하여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조직을 통해 7월17일 전국에 일제히 폭로했다. 이후 정호경·함세웅 신부 및 오원춘·정재돈·최병욱·서경원 등 농민회 간부들에 대한 구속사태가 벌어졌고, 가톨릭농민회 및 교회에 대한 비방 탄압과 온갖 음해가 대대적으로 자행되었다.


춘천농민회사건,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과 관련하여 많은 회원들에 대해 일련의 조사가 진행된 적도 있었지만 이 때는 가히 전 회원에 대해 조사가 이뤄졌다. YH사건과 관련해 도시산업선교회, 안동사건과 관련해 가톨릭농민회에 대한 대통령특별조사령이 그것이다. 대검에서는 헬기를 타고 다니며 조사를 진행했다.


8월6일 안동 목성동 성당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120여명의 사제와 600여명의 농민회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도회를 열었다. 기도회가 끝난 후 참가자들은 ‘순교자 찬가’를 부르며 성당에서 나와 안동시청 분수대까지 구속자 석방, 농민운동 탄압 중지, 긴급조치·유신헌법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촛불시위를 감행했다.


안동 최초의 일이었다. 목성동 성당으로 돌아와 사제단과 농민회원 80여명이 무기한 항의농성에 들어갔다. 당시 매스컴은 죽창으로 무장한 폭도들이라고 보도했지만, 안동시민들은 저녁이면 거리에 나와 농성장에서 나오는 옥외방송을 들으며 더위를 식혔고,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격려방문을 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8월9일 원주, 청주에 이어 8월20일에는 명동성당에서 1만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주최 전국 최대의 기도회가 열렸다. 기도회는 인천, 수원, 광주, 전주, 마산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9월4일 대구에서 첫 공판이 열렸다. 재판장은 서석제, 검사는 서돈양, 변호인단은 유현석 이돈명 홍성우 황인철 이건호 변호사였다. 오원춘은 대부분의 공소사실을 시인하고 변호인 심문 때조차도 검사 쪽만 바라보며 시종 울면서 검찰 측 주장대로 대답했다. 변호인단은 구속기간 6개월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왜 이렇게 재판을 서두르느냐고 변론기일 별도 지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검사가 논고를 시작하자 변호인단은 바로 퇴장했다. 변호인단은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소주로 원통하고 허탈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황인철 변호사는 대취하여 열차 안에서 대성통곡했다. 오원춘에게는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이 선고됐다.


그러나 오원춘은 얼마 안되어 박정희가 죽고 난 후인 12월8일 긴급조치가 해제되면서 다른 긴급조치관련자들과 함께 석방될 수 있었다. 석방 후 오원춘은 수감 당시 매일 밤 불러내 무슨 주사를 놓고 공포 속에서 반복심문을 거듭해 견딜 수 없었고, 그래서 양심선언을 지키지 못했다고 잿빛 과거를 회고했다.


오원춘 사건은 한 농민의 인권이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작은 것이 아님을 확인한, 또 유신 말기의 인권유린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리고 농민회는 유신독재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비 온 뒤에 땅 굳는다고 오히려 굳건한 투쟁을 통하여 한 단계 더 질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농민의 정치투쟁으로서는 70년대의 절정을 이루는 이 사건은 교회 일치와 유신독재 종식에도 큰 몫을 했다.


개학을 하자 대구의 경북대, 계명대, 영남대 학생들이 YH사건과 이 사건을 이슈로 삼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며 이는 부마항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10월26일 박정희가 피살되면서 유신독재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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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춘 씨 근황

 


오원춘(54)은 “당시 사건은 유신정권의 농민운동과 인권에 대한 탄압의 결정판이었다”고 평가하며 “몸은 불편하지만 평생 소박한 농부로서 죽는 날까지 농민운동을 할 것”이라고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몸져 누운 채 집에서 간신히 전화를 받은 그의 음성에는 힘이 없었다. 사건이후 유명인사가 됐지만 당시의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며 줄곧 고향인 경북 영양군 청기면 청기리 산골마을에서 지냈다. 귀가 잘 들리지 않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전신통증을 앓고 있다. 석방 후에는 한동안 칩거하며 폐인처럼 지냈다. 건강이 좀 나아지면 들에 나가 영양 명물인 고추를 가꿨다.


지금도 가톨릭농민회 회원으로서 100여 가구 남짓한 마을을 살피며 밭농사를 짓고 있다. 올해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통해 피해자에 대한 보상 신청도 했고 남북간 농산물 교역을 해보려는 요량으로 북한 농산물을 수입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영락없는 영양 산골의 농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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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3년 11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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