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실세부상 ‘서울의 봄’ 혼돈속으로

 


1979년 10월26일 서울 궁정동에서의 총성 한방으로 절대 권력자 박정희가 사라진 뒤 권력 내부는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 법률상 승계권자(권한대행)인 최규하의 대통령직 수행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문제는 누가 그 계승자가 될 것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실질적 2인자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저격범으로 밝혀져 구속됨과 동시에 무소불위의 중앙정보부도 기능이 정지되었고, 지난 몇년간 막후 실세였던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마저 박정희와 함께 사라지자 권력 내부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일반 국민의 눈에 2인자로 비쳤던 공화당 총재 김종필 역시 실세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비상계엄하이므로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가 실질적 권력을 잡은 것으로도 보였으나, 그 역시 12월12일 저녁 별안간 구속되면서 이제 더 이상 누가 실력자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신문지상에 자주 나타난 용어가 ‘안개정국’이었다.


11월10일 최규하가 “(이미 용도 폐기된) 현행 유신헌법에 따라 제10대 대통령을 선출하고, 새 대통령이 임기 중 이른 시일 내에 헌법을 개정하겠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곧이어 12월6일 어느 누구도 대통령 감으로 여기지 않았던 그가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더더욱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그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국회와는 별도로 정부 주도의 개헌안을 마련하기 위하여 연구중”이라고 밝히고 나서 정국을 혼미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불안한 상황은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선배 장군들을 총격전으로 몰아내고, 소장 전두환을 필두로 하는 소위 하나회 세력들이 군대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훗날 광주민주항쟁을 유혈진압한 뒤 갑자기 전면에 등장한 전두환이 ‘구국의 영웅’으로 일컬어지는가 했더니 어느 순간 대통령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국민 모두가 지난날의 사태를 알게 되지만, 계엄령으로 인해 언론이 군의 검열 하에 놓인 상태에서 ‘서울의 봄’ 기간 내내 국민들은 계속 안개 속을 헤매야만 했다.


안개정국의 주역은 비단 이들만이 아니었다. 79년 가을 박정희에 의해 신민당 총재직과 국회의원직를 박탈당했으나 그것이 계기가 되어 발화된 부마민주항쟁과 이어 터진 10·26사건을 통해 서부 영화의 주인공처럼 극적으로 재기한 김영삼과, 12월6일 오랜 가택 연금에서 풀려나 정치적 재개를 꿈꾸는 71년의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 역시 안개정국의 또 다른 주역이었다.


11월3일 사이러스 밴스 미국 국무장관이 ‘민간정부에 의한 정치발전’을 약속하자, 김영삼 일파는 정권이 바로 자신들에게 건너오리라는 낙관적 기대 아래 미국과 군부의 환심을 사기에 급급하면서 최규하 과도정권의 불투명한 정치일정에 대해 미봉적으로만 대처하고 있었다. 그들은 유정회와 공화당이 무기력해지자 국회가 자신들의 독무대가 될 것이라고 오판해 심지어는 유신 국회를 통한 집권까지 꿈꾸었다. 민주화 일정에 대해 정부로부터 아무런 확답이나 보장도 받지 않은 채 무조건 국회에 등원했고(11월13일), 12·12 군사반란에 대해서조차 공식적으로 아무런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듬해 봄 전국으로 확산된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오로지 허망한 집권의 꿈에만 젖어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 모두 5월17일 저녁 신군부에 의해 연금 혹은 구속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김대중 역시 자신은 71년 선거에서 실질적으로 이긴 대통령 후보였으니, 다시 후보로 나서 대통령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김영삼과의 경쟁에만 골몰해 신민당 입당을 미루면서 자파 세력만으로 또 다른 정당을 만들어 집권할 궁리만 하였다.


안개정국은 당시 또 하나의 실질적 정치세력인 학생들에 의해서도 유발되었다. 7년 동안의 유신독재와 싸우면서 많은 학생들이 구속되었고, 이들은 이전의 선배들과 달리 졸업과 동시에 기성사회에 매몰되는 대신 반독재 투사집단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유신체제의 탄압이 가혹해질수록 그들의 사회의식도 점차 치열해졌다. 다만 60년대와는 달리 공개적인 토론이 봉쇄되는 바람에 각자의 위치에 따라 입장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시위·집회 등 정치투쟁을 통해 유신체제 이전의 민주체제로 복귀하는 것으로 민주화운동이 완성된다고 생각했으나, 이미 상당수는 보다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농민 등 민중의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지 않는 민주화란 허구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선배 학생운동권 내부의 이러한 의식 차이뿐 아니라 이미 사회 경험을 한 이들 선배 복학생과 총학생회를 이끄는 재학생 사이의 견해 차이도 작은 것이 아니었다. 선배 복학생들은 대체로 적극적인 사회민주화 투쟁을 주장했고, 후배 재학생들은 우선 학내민주화 투쟁에 주력할 것을 주장했다.


선배 그룹 중에서 사회민주화 투쟁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민주청년협의회의 홍성엽·양관수 등은 이미 11월24일 서울 명동 YWCA 강당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잠정 대통령 선출 저지 국민대회(이른바 YWCA 위장결혼사건)’를 감행한 뒤 백기완 등과 함께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어 서울의 봄을 교도소에서 보내고 있었다.


이들보다 신중한 그룹은 노동자·농민 등 민중운동의 성장을 좀더 중요시한 이른바 ‘현장파’와 사회민주화 투쟁을 우선으로 생각한 ‘대중운동파’로 갈려 가두시위, 대학생 병영 집체훈련 문제 등을 둘러싸고 학교 내에서 심각한 이론투쟁을 벌였다. 모두가 전두환이 공적 1호라는 것, 유신 잔당들의 재집권 음모인 이원집정부제를 막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들 신군부 세력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세력이 학생뿐이라는 점에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으나, 언제 어떻게 학생이 나서서 이런 반민주·반민중적인 움직임을 저지하느냐 하는, ‘시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운동권 내부의 의견 차이는 각 대학별로 제적생들의 복학이 이뤄지고 총학생회 구성이 끝난 4월 이후 점차 해소되어갔다. 서울대에서는 김병곤·이해찬·원혜영 등 복학생 대표들과 심재철·유기홍·유시민 등 재학생 대표들이 4월14일 영등포의 한 중국음식점에서 만나 이후 학생운동의 방향에 대해 대략적인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비로소 학생운동이 본격적인 서울의 봄을 맞을 준비를 갖추게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바로 같은 날 보안사령관인 육군 중장 전두환은 군인에게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하고 나섰다. 이제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이 집권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가 야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난관이 있었다. 학생들이었다. 그는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면서 10·26 이후 이 나라 정국을 뒤덮었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이제 80년 5월 서울역 광장에서 맞붙을 양대 세력이 각자의 준비를 마치고 안개 속을 헤치고 나와 제 갈 길을 걸어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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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김정섭("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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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3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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