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총궐기 광주항쟁 불꽃댕기다
[서울역 회군]
대학가 곳곳에서 감시의 눈을 번득이던 사복경찰들이 철수한 뒤인 1980년 3월, 실제로 대학에는 봄이 찾아온 듯했다. 안개정국과
비상계엄 상태라는 것이 언뜻 실감나지 않을 정도였다. 겨우내 논란이 되었던 복학·복직문제가 해결되어 개학과 함께 김동길·백낙청·한완상 등
해직교수들이 학교로 돌아왔고 각 대학의 제적생들도 복학했다. 강의실 주변에는 마치 벚꽃축제와 같이 각종 대자보가 넘쳐났다. 그리고 유신시절
빼앗겼던 총학생회를 부활시키기 위해 학생들은 모두 정신이 없었다. 과 대표, 단과대 학생회장 선출을 위한 각종 집회와 토론으로 3월 내내 학교는
활기에 넘쳐흘렀고, 오랜만에 열린 이런 축제 같은 행사를 거쳐 3월28일 서울대에서는 마침내 전국 처음으로 총학생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이 모두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8년의 박정희 독재 아래서 대학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있었다. 특히 족벌경영으로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던 사립대학은 더욱 심각했다. 4월18일 기준으로 재단 퇴진, 총장 사퇴 등 학내문제를 놓고 학생들이 철야농성 중인 대학이
24개교에 이르렀고, 그 중 19개 대학은 휴강 중이었다. 그리고 한양대를 비롯한 일부 대학에서는 학교측이 교직원 등을 동원해 농성중인 학생들을
집단 구타하는 폭력 사태까지 발생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대학 캠퍼스는 모처럼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오직 대학 캠퍼스
안에서만 허용되었을 뿐, 사회 전반에는 여전히 차가운 겨울 날씨가 지속되고 있었다. 캠퍼스 밖에서는 이미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으나 아직은 국민 대중 앞에 직접 나서기에는 이르다고 판단한 신군부가, 다른 유신잔당과 권력을 나눠가질 수 있는 소위 ‘이원 집정부제’
개헌 음모를 물밑에서 추진하고 있었다.
신군부의 음모가 대학가에 알려지면서 대학 사회에는 ‘젊은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학생운동
지도부의 대다수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무엇보다도 언론 검열로 인해 국민 대중이 이러한 사실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학생들만이 나서서 신군부와 맞설 때 학생들이 너무 큰 피해를 보게 될 뿐 아니라 5·16과 같은 군사쿠데타를 또다시 초래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일반 학생들을 설득하며 교문 밖 진출을 의식적으로 자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4월 중순 최초 입소대상인 성균관대를 시발로 1학년생들의 병영집체훈련 거부투쟁이 전 대학가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유신
말기 대학을 병영화할 의도로 1학년 남학생들을 대상으로 의무적으로 10일씩 군대 안에서 집체훈련을 받도록 한 이 훈련에 대해 대학가가 반발한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특히 당사자인 1학년생들의 반발 강도는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성균관대를 위시해 대부분의 대학 총학생회가 1학년생들의
병집훈련을 거부하기로 결의하고 나섰다. 계엄사령부의 통제 아래 있던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학생들을 안보의식이 없는 반국가적 집단으로 연일
매도했다. 실제로 학생들이 병집훈련에 응하지 않으면 군부와 대학이 정면충돌할 기세였다.
점차 결단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5월1일 긴급 소집된 서울대의 복학생 및 학생회 간부 연석회의는 오랜 토론 끝에 대의를 위해
병집문제에서 한발 양보하는 대신, 훨씬 근원적인 문제인 신군부 퇴진운동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된다는 판단에 도달했다. 곧이어 1학년생들에 대해
병집에 응하자는 설득작업이 범대학적으로 벌어졌다.
뜨거운 토론과 눈물겨운 호소를 통해 1학년생들이 선배들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고, 그들이 병집훈련장으로 출발하는 5월2일 낮
12시부터 시작된 서울대 비상학생총회는 참으로 장관이었다. 관악캠퍼스에 위치하지 않은 의대와 농대 학생들까지 스쿨버스를 타고 대거 참여해 재적
1만4천여명 중 1만명 이상이 도서관 앞 아크로폴리스 광장을 가득 메운, 서울대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규모 집회가 열린 것이다. 병집훈련에
들어가는 1학년 후배들을 떠나 보내면서 흥분한 총학생회장 심재철(현 한나라당 의원)은 후배들이 돌아오는 13일까지를 민주화대투쟁 기간으로
선포함과 동시에 “13일까지 안개정국이 걷히지 않으면, 우리들은 전면적인 대정부투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돌발적 발언을 하고 말았다.
5월13일부터 학생들을 거리에 뛰쳐나가게 만든 문제의 발언이 즉흥적으로 나온 것이다.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서울대의 총학생회장 입에서 이같은 발언이 나오자 전 대학가는 여기에 맞춰 5월13일부터 시작될 신군부와의
결전을 준비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서울대에서는 1학년들의 병집훈련 기간 중 실시된 철야농성이 거듭되면서 학생들의 투쟁의지도 점차 증폭되어 가고
있었다. 마침내 5월13일 연세대생들이 야간에 광화문으로 진출하면서 한번 터져버린 가두시위의 봇물은 이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5월14일의 가두시위는 따라서 어쩌면 필연이었다. 서울시내 21개 대학에서 동시에 거리로 뛰쳐나온 7만여명의 대학생들은 비에 흠뻑
젖고 최루탄 가스에 전 채 밤 10시가 넘도록 시내 곳곳에서 경찰과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계속했다. 이들은 “전두환 물러가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2원 집정부제 구상을 즉각 철회하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다녔다. 가두시위 즉시 휴교령과 함께 신군부가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하룻밤이 조용히 넘어갔다. 그리고 다음날인 5월15일 ‘서울의 봄’의 피크를 장식한 서울역 광장 시위가 이어졌다.
서울역 광장을 가득 메운 10만명 이상의 서울시내 대학생들은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쳐대며 스크럼을 짜고 광화문 진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오후에 시작해 밤 늦게까지 이어지며 수백명이 연행되고 부상자만 23명이 나오는 치열한 시위였다. 시위 와중에 전경 한 명이 차에 치여
숨지기도 했으나 이것은 아직도 신군부의 자작극이 아닌가 의심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때 이미 광화문 일대에는 탱크가 진주해있었다. 그리고 도처에 깔린 연락망을 통해 군대의 이동상황과 함께 군대가 곧 치고 들어올
것이라는 첩보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광주사태가 아닌 ‘서울사태’가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이때 별안간 학생운동 지도부의 ‘회군’ 지시가 내려졌다.
소위 저 유명한 ‘서울역 회군 결정’이었다. 이틀에 걸친 가두시위로 학생들의 주장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고 자칫하면 군부 등장의 빌미를 제공할지
모른다는 지도부의 순진한 판단 때문이었지만, 그 잘못된 판단에 대해 역사의 추궁을 받는 데는 불과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5월17일 저녁 6시쯤 수백명의 기동경찰이, 전국 55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연석회의를 열고 있는 이화여대를 급습해 학생회 간부들을
체포했다. 이를 신호로 합동수사본부 수사요원들이 학생회 간부와 복학생들의 집으로 들이닥쳐 이들을 무조건 연행하기 시작했고, 공수부대가 각 대학에
진입해 기숙사에 거주하던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하기도 했다. 학생들뿐 아니라 3김씨를 포함한 정치적 반대세력과 반항적인 언론인들도 대거
연행되었다. 서울시내에는 시퍼렇게 날선 총검으로 무장한 군인들을 가득 태운 트럭들이 백주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줄지어 질주하면서 시민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170명의 구속자를 낸 서울의 봄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또다른 시작이었다. 바로 다음날부터 광주 시민들이 총궐기하여 일어선 것이다. 서울의 봄은 실패했으나 장소를 옮겨
광주에서 다시 피어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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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김정섭("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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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2004년 01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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